글쓰기 최전선

솔직해줘서 고맙습니다.

- 숨(수유너머R)

이번 추석 전날 집에는 식구가 달랑 셋이었다. 아버지 어머니 나. 최소 인원 대여섯은 되던 명절 집풍경이 조금 썰렁하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고등어를 구워라 갈치를 구워라 반찬 걱정이시다. 가난한 서울자취생 둘째 딸래미가 싱싱한 생선은 입에도 못 대지 싶은가보다. 노릇하게 굽힌 도톰한 갈치살 위에 직접 양념간장을 올려주시며 어서 먹으라고 성화다. 이렇게 먹어야 맛있다며 뼈바르는 것까지 시범을 보이신다. “나는 너거가 대여섯 살 때, 쪼깨말 때 그때가 기립다.” 밥을 먹으며 아버지가 건내시는 한마디. 올망졸망 꼬맹이들을 넷이나 달고 동그란 유리탁자가 있는 해바라기 제과점에서 사먹곤 하던 팥빙수. 아버지 월급날이면 동네 서점으로 우르르 몰려가 각자 한권씩 책을 고르던 기억. 머릿속에 박힌 장면은 사진처럼 또렷한데 어느새 그 아이들과 젊은 아버지는 간데없다.

1.
아버지의 고향은 거제도다. 학교를 마치고 오면 소 풀 먹이러 가고 쉬는 날에는 논이나 밭으로 일을 하러 가야했다. 논밭 일이 없으면 땔감을 장만하러 산에 갔다. 배를 곯지 않으면 먹고 살만하다 말하는 시절이었다. “재밌게 지냈지. 친구들하고 주로 어울리 다니고. 수박서리, 닭서리도 하고. 여자들 쫓가다니고. 아빠 친구들이랑 그러고 놀았다. 촌이니까 멋지지. 오솔길 같은 곳. 동네밖에 넓은 데도 있고. 바위나 잔디밭이나. 말 그대로 촌에는 동네만 벗어나면 데이트 코슨기라. 달이 있을 때는 달빛이 좋고. 달이 없을 때는 컴컴한데서 서로 얼굴 표정도 안 보이는데 이야기 하고. 연애를 한 거는 아닌데 우리 동네, 이웃동네 처녀들이랑 어불리 다니는 거지. 내는 또 동급생이랑은 말이 잘 안통하대. 한 두 살 많은 처녀들 만나고 그랬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일제시절 먹고 살기 위해서 오사카까지 갔다가 해방후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빚이 있어 다시 떠나야했다. 1968년 아버지가 스무살이 되던 해 부산으로 올라와 ‘적기(현재는 우암동)’라는 동네에 자리를 잡았다. 제2차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된 이듬해였다. 대대로 섬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농꾼은 일제시대 국제적으로 날품을 팔러 다니다가 부산까지 흘러들었고 그의 장성한 아들도 공장노동자로 산업도시에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적기’는 아직 항구가 아닌 작은 바닷가 마을이었다. 할아버지는 조개를 잡고 할머니는 잡은 조개를 내다팔거나 칼국수를 끓여 팔았다. 아버지도 공장에 다니거나 조개잡이를 했다.

2.
군대를 다녀온 후 다시 공장에 들어갔다. 합판 공장인 ‘동명목재’에서 일을 하다가 ‘광명목재’로 옮겼다. 아버지가 일한 부서는 수지실이었다. 합판을 만들 때 낱장의 판재를 접합하는 접착제를 배합하는 부서였다. 하루 두 번 기계배합을 해야 했기 때문에 12시간 씩 맞교대로 일을 했다. 공장 안의 다른 부서보다는 일이 수월했다. 그곳에서 3년 일하면서 어머니를 만났다. 절단 사고로 왼쪽 손 중지와 약지가 한 마디씩 짧았지만 처녀시절 어머니는 공장 안 뭇 사내들의 로망이었다. 그만큼 이뻤다. 실없는 농지꺼리를 던지며 집적대던 사내들과 달리 아버지는 한 번에 승부를 보았다. 집 앞 학다방에서 기다릴테니 나오라고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두 시간 동안 기다리게 했다. 야간 교대 근무가 끝나고 깜빡 잠이 들어서였다. 어머니는 긴가민가하며 나간 학다방에서 자리를 지키고 앉은 사내를 발견했다.

“어리둥땅 살지 마라. 지금부터라도. 니 인생을 진짜 열심히 살아라. 하루하루 세월에 맡기지 말고. 연애를 해도 목숨을 걸만큼 열렬히 하고. 아빠는 너거 엄마한테 목숨까지 걸었다이가.” 글자 그대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목숨을 건 사랑을 했다. 서른이 다 되어가도록 공장에서 일하는 사내, 그 본가는 더 가진 것이 없는 궁상맞은 혼처였다. 아버지의 사람 서글서글하고 친근한 성격도, 한일자로 굳게 닫혀있는 외할아버지의 입과 마음을 열 수는 없었다. 포항에는 외할아버지의 동생 내외가 살고 있었고 어머니는 그 집에 보내졌다. 연인에게서 한 마디도 듣지 못했던 아버지는 외할머니를 몰래 찾아와 닦달했다. 포항 어느 마을 우물가 몇 번째 집이다, 외할머니는 아주 소상하게 알려줬다. 아버지는 그 길로 택시를 잡아타고 우물이 있다는 그 마을로 향했다. 어머니는 마침 우물에 물을 길으러 나왔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바로 택시에 태우고 부산으로 출발했다. 어머니가 없어져 포항과 부산 두 곳은 발칵 뒤집혔다. 애가 물에 뛰어들었다, 흉흉한 말들이 오고갔지만 외할머니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부산에 온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인숙에서 약을 털어먹었다. 다음날 이상하게 여긴 여인숙 주인이 문을 땄고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남녀를 발견했다.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은 건졌다. 어머니는 외가에 없는 딸이 되었고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3.
아버지는 결혼을 하고 ‘삼화고무’에서 3년을 일했다. 공장 노동자가 대접은 고사하고 착취를 당하는 게 당연한 시절이었다. 삼화고무에서 처음 받은 월급은 턱없이 적어서 야근을 하고 특근을 했다. 꼬박 이틀, 48시간 연속으로 공장에서 일하는 날도 있었다. 몇 천원을 더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공장 생활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일도 너무 힘들었다. 직업소개소로 일을 옮겼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여자들을 상대로 다방의 일자리를 알선해주었다. 고향의 산과 들을 닮은 처녀, 총각들이 도시로 쏟아져 들어와서 공장과 다방으로 흘러가던 때였다.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버지는 일자리 알선을 받기 위해 소개소를 드나들던 한 여자를 만나기 시작했다. “나도 그랬지만 그쪽이 되게 좋아했지. 소개소에서 자주 만나다보니까 그리 된 거고 그렇다고 해서 너거 엄마가 싫고 그런 거는 전혀 없었거든. 좀 이기적이제? 만약 너거 엄마가 이만큼이라도(손가락 한마디를 짚으며) 싫은 감정이 있었으면 헤어졌을 거라. 몇 년 만나다가 그 여자랑 헤어졌지. 너거 엄마를…지키기 위해서. 더 이상 그거 되면…(안 될 거 같았거든)그게 가장 주된 이유였지.”

그 여자와 헤어지면서 직업소개소를 그만두었다. 한참을 일 없이 지내자 어머니는 집을 나가서 병원 원장집의 식모살이를 했다. 다른 여자를 만나는 것보다 돈을 벌어다 주지 않는 것이 더 힘겨웠다. 어머니의 가출 후 아버지는 정신을 차렸다. 세 딸을 굶길 수는 없었다. ‘대한화재’에 들어가 영업을 하러 돌아다녔다. 돈이 없어 하루 종일 걸어 다니고 점심도 굶었다. 6개월 영업을 하자 아이들 배는 안 곯리게 되었다. 그때서야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놔줘야 할 것 같았다. 인연이 여기까지인가 보다는 생각으로 이모에게 전화를 했다. 어머니와 서면 대한극장 지하 다방에서 만났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모두가 자신의 잘못이니 당신 뜻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요즘에 너거 엄마가 아무리 좋아도 화가 날 때가 있거든. 그래도 될 수 있는 한 화를 안낸다. 옛날에 내가 잘못했으니까. 내를 안 만내고 다른 사람을 만났으면 더 빛이 났을 사람인데 그런 생각 때문에.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웃길라고 농담도 하고. 내가 원래 유머가 있는 사람은 아니야. 무뚝뚝했지. 요즘 노력을 많이 한다. 너거 엄마 즐겁게 해줄라고.”

4.
집나간 어머니가 돌아오고 새로 시작한 보험회사 영업도 손에 익어갔다. 할아버지가 손꼽아 기다리던 손자도 태어났다. 여전히 셋방을 전전했지만 4남매와 아내와 노부모를 굶기지 않는 시절이 근 10년 넘게 이어졌다. 가끔 부부싸움을 거하게 하고 밥상이 엎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백원짜리 동전 하나를 주고 딸래미 아들래미에게 뽀뽀를 받던 시절도, 꼬맹이 넷을 달고 제과점에서 팥빙수를 먹던 시절도, 월급날 서점에서 4남매에게 책을 사주던 시절도, 사직야구장에서 롯데 응원가 ‘부산갈매기’를 온 식구가 열창하던 시절도 이 때였다.

IMF 구제 금융시대가 도래하면서 아버지로서 좋던 시절은 끝났다. 고객에게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났다. 오십줄에 들어 서서야 부산 교외에 마련했던 작은 아파트 한 채, 땅 몇 마지기는 이 때 다 팔아치웠다. 어머니는 암으로 투병생활을 했다. 아버지는 점점 꺾여갔다. 보험영업도 예전처럼 잘 되지 않았다. 건강을 회복한 어머니가 장사를 시작했다. 어머니는 의욕이 넘치고 적극적이었지만 수지타산을 맞추는 감이 없었다. 빚으로 시작한 장사는 빚으로 끝났다. 빚잔치를 할 만한 재산도 없어 십수년된 텔레비전에까지 붉은 딱지가 붙었다. 어머니의 암은 재발했고 암세포와 싸우는 동시에 빚 갚으라는 위협적인 목소리의 전화를 견뎌야 했다. 그 사이 몽글몽글 조약돌 같던 아이들은 수세미 속 같은 마음을 가진 어른이 되었다.
“아빠는 사실 목표 없이 살았던 거 같애. 순간순간 즐기면서 살아왔는 기라. 현실에 그냥. 순간에. 그 순간에 즐거우면 즐겁고, 화날 때는 화내고. 그러다보니까 지금 와가지고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후회가 돼. 돈을 모은다고 생각했으면 기회도 있었는데. 항상 내가 젊을 줄 알았는데. 미래에 대해 전혀 계획이 없었다, 이 뜻이라. 아무래도 최소한도 자기 의식주는 해결이 돼야 첫째 가장 가까운 가족끼리 행복하잖아. 너거도 신용불량자 되고…니는 아직도 그거(대출금) 갚고 있제? 하…(한숨)아버지는 그게 가슴 아프다. 그래서 너거도 우짜든지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안정적인 생활기반을 마련해라 이거라. 나중에 자신이 비참하다고 느끼기 싫으면. 아무리 좋아도 니 지금하는 일이 너무 열악하다이가.”

부산역 구내에 있는 전통떡집에서 수정과와 오미자차 한잔씩을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인터뷰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하루 대여섯잔의 블랙커피를 마셨지만 얼마 전 위염과 십이지장궤염 진단을 받으신 후로 커피를 끊으셨다. 도착하고 떠나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아버지와 딸은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였다. 나지막하게 오가는 지난 이야기 속에서 나는 늙은 아버지 안에 있는 젊은 사내를 보았다. 공장의 기계와 완전체를 이루지 못한 사내. 작업복으로 갈아입어도, 고향의 오솔길과 달빛이 스며든 몸과 마음은 쉬이 버리지 못했던 사내. 목숨을 건 사랑끝에 결혼했지만 또 다른 사랑에도 솔직했던 사내. 아내와 자식에게 능력있는 가장이지 못했던 사내. 그래서 스스로를 손가락질 하는 사내.
갈치살에 양념간장을 얹어 주듯 딸 걱정에 잔소리로 마무리하시는 늙은 아버지. 젊은 딸은 대답한다. “밥은 굶지 않고 살길이 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하지만 지금의 나와 똑 닮은 젊은 사내에겐 아무 말도 해주지 못했다. 다음에 만나면 한마디 전할 수 있을까? 당신의 젊은 딸은 당신이 고맙다고. 잘나지 않은 인생에, 사랑에 솔직해줘서 고맙다고.

응답 3개

  1. 이경말하길

    잘 읽었어요. 대부분은 가장 가까운 사람의 이야기에, 그 사람의 역사에 더 무관심하게 살아가는데.. 귀한 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해요. 우리 부모님, 어르신들이 살아온 시간이 역사책이라고 생각해요. 저도 얼마전에 과제 때문에 울 할머니 인터뷰 한 적이 있는데 그동안 왜 할머니가 살아온 날들에는 한마디 질문도 안 했는지.. 반성했어요. 숨님이 쓸 다음 글도 기대하고 있을게요!

  2. 미리퐁말하길

    글 읽고 맘도 따뜻해 지고 허심탄회해 지기도하고
    .왠지 고맙다는…잘 읽었습니다

  3. 말하길

    솔직해줘서 고마워요, 숨님.

    글 잘 읽었습니다.

    아침부터 가슴 한 켠이 데워져 오는 게, 그렇게 훈훈한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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