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최전선

동네 미술전 여는 화가아저씨

- 희정

붓, 그것은 운명의 데스티니!

“첫돌 돌잡이할 때 붓을 잡았어요. 당시엔 펜을 잡으면 회사원이 돼서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거라고 어른들이 생각했대요. 그런데 웬걸 나중엔 보니 그 펜이 그림 그리는 붓이었던 거라.”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거란 어른들의 기대와는 달리 가난한 화가가 된 그에게 그림을 그리게 된 계기를 물으니 첫돌 때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어요. 만화를 따라 그렸죠. 학급 게시판 뒤에 만화를 연재했어요. 미화부장도 했고.” 만화를 그렸다는 것은 처음 듣는다. “중학교 1학년 때 만화주인공 까치를 그려서 코팅했어요. 그걸 책받침으로 썼죠” 만화캐릭터를 즐겨 그리던 소년은 중학교 2학년 때 겨울방학 미술숙제로 할아버지 흑백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려냈다. 그림을 본 미술 선생님이 미술에 소질에 있다고 칭찬해줘서 중3부터 미술부 활동을 시작한다. 예고를 가면 좋겠다는 미술선생님의 얘기에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봄, 가을에 열리는 전국대회에 참가한다. 단순히 그림 그리는 것을 즐겨했을 뿐인데 칭찬을 해주니 자신의 재능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미술부 활동이 즐거웠다. 그림에 대한 열정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나서도 드러난다. 사생대회에 나가기 위해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신호를 무시한 차에 치이게 되었다. 공중을 날아 떨어진 후 피가 흐르는데도 괜찮다며 그림대회에 나간다. 상장은 병실에서 받았다. 가을에 입원해 겨울에 퇴원하니 예고준비에 차질이 생겨 버렸다. 결국 재수를 하게 되었다. 서라벌고에 입학하고 나서 이듬해 사생대회에서 상을 받게 된다. 관례적으로 3학년이 받아왔는데 2학년이 상을 탄 건 개교 이래 처음이라고 했다.

18세 소년, 거리화가가 되다.

고등학교 1학년 가을, 사생을 가다가 혜화동 대학로 거리에서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들을 보게 된다. 인상이 깊었던 소년은 그곳 거리 한쪽에서 자신만의 인물화를 그린다. 구석에서 그리던 소년은 나중에 화가들과 어울리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거리화가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거리화가의 이점은 첫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거에요. 직접 대면하면서 그림을 그리게 되니까. 둘째는 생계유지가 된다. 세 번째는 인물화와 연관되서 전환이 생기는 거에요. 방송일도 하고 방송국 소품도 제작하고, 행사나, 시, 이벤트에도 가고 비엔날레에 초청돼서 가고.”

1987~1993년 당시 88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후 외신에서 “한국이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고‘ 할 정도로 경제가 호황이었다. 살림살이에 여유가 생기자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 외에 문화와 여가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 사회분위기 속에 거리에서 인물화를 그리는 화가의 모습은 호기심의 대상이자 좋은 볼거리였다. 방송국과 잡지에서 인터뷰도 번번이 들어왔다. 지금도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1997년 MBC에서 ’비법천하‘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허수경씨도 나오고 개그맨도 나오고. 그 중에 키 크고 머리 긴 무뚝뚝한 표정의 인물도 나왔는데 보면서 ”왜 저렇게 재미없고 어색한 사람이 방송에 나오는지 모르겠네“ 투덜댔었다. 그 어색한 사람이 지금의 남자친구다.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몇 번 방송에 나오지 않았는데 유독 뇌리에 깊게 박혔다. 그때 이야기를 자주 하곤 하는데 ’엉뚱하고 말없는 화가‘ 가 컨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배낭을 메고 전국 곳곳 마음 가는 곳에 며칠, 몇 달 씩 머물며 그림 그리던 20대 시절.

“도망치듯 떠났어요. 동료, 사람의 관계, 주변 환경이 답답했어요. 다른 곳에 갔지만 좋은 것은 잠시 뿐 일주일이 지나면 똑같더라구여. 결국 문제는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내는 것, 마음먹기 달렸음을 몸으로 체험한 20대. 이제야 ‘마음이 만들어 내는 드라마’에 주의를 쏟는 나로서는 젊을 때 깨달은 그가 멋져보이고 조금은 부럽다. 얻은 것도 있지만 부작용도 있다. 세상 구경을 원없이 한 탓에 걷기 여행이라도 가자하면 고개를 흔든다. 자기는 많이 가봤다면서 힘들게 다닐 필요가 없단다. 속으로 언젠간 꼭 같이 가야지 벼르고 있는 내 맘을 알까.

거리화가, 출판미술을 하다

사람과의 소통을 중시하던 화가는 사람을 수입으로 생각하는 자신을 알아차리며 거리화가를 그만두었다.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던 인연의 장이 바뀌었다. 누구나 스쳐가는 거리에서 자기만의 공간으로 작업실이 바뀌었다. 일년간의 일러스트 공부를 하고 난후 본격적으로 출판미술을 하게 된다. 지인의 소개로 여러권의 그림책 작업을 하게 되지만 공장처럼 운영되는 시스템과 제대로 원고료를 못 받는 동료들을 보며 일을 그만두게 된다. 한번 계약을 맺게 되면 출판사에서 재계약을 할 정도로 꼼꼼한 실력을 인정받는 화가. 그러나 일러스트 작업이 수월하지 않다. 왜 일까.

“저작권 때문이에요. 출판미술은 음악과 달리 양도 계약이 관례에요. 그림에 대한 권리를 출판사에 모두 넘기는 거에요. 원고료는 적게 줘도 좋다.아니 안줘도 좋다. 내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인정해 달라. 이거죠”

요즘 인기있는 ‘엄마는 열두살’ 만화를 예로 들어보자. 만화가 인기 있으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다. 일반 만화책 외에 애니메이션용 만화책이 또 출간된다. 그 외에 퍼즐,스티커,색칠놀이등 캐릭터 제품은 확대 재생산된다. 저작권이 인정되지 않으면 이 모든 수입은 출판사에게 넘어간다. 작가에게는 처음 작업할 때 원고료가 전부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그림을 출판사 맘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원형 그대로가 아닌 출판사 입맛에 맞게 변형할 수도 있다.

담당자와 얘기를 하면 ‘선생님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를 한다. 하지만 회사 방침이 이렇다. 혹은 사장님께 한번 여쭤볼께요’ 하면서 연락이 오지 않는단다. 대형 출판사에서 오는 제의도 자신의 원칙(저작권)을 고수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러기를 수차례. 출판사 블랙리스트에 올랐는지 요새는 연락이 거의 오지 않는다. 출판사로써는 깐깐한 작가보다는 매년 새로이 나오는 신규 일러스트레이터들이 작업하기 편할 것이다. 요즘 들어 그도 흔들린다고 한다.

여자친구 윤여사에게 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걱정하는 부모님의 근심을 덜어주고 싶기 때문이다. 여전히 부모님은 안정된 직장을 갖기를 바라고 계신다. 화가로 밥벌이 하기엔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원칙을 버리지 않는다. 원칙을 지키면서 일러스트 하는 꿈을 꾸고 있다.

동네 미술전 여는 화가 아저씨

작년 여름 이사 오고 난 후 11월 쯤, 그는 그동안 그려왔던 소품과 출판미술 그림 원본을 가지고 집 앞 마당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이름하야 <제 1회 동네 미술전>.

옆집, 윗집 이웃들이 신기해하며 말을 건넨다. 4층에 사는 꼬마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그만 보면 눈에 하트를 뿅뿅 그리며 “화가아저씨~~~” 하며 정답게 부른다.

“동네 미술전은 함께 하는 놀이에요. 나를 드러내는 거죠. 일종의 작가로써 퍼포먼스를 하는 겁니다.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도 하나의 퍼포먼스죠. 마당놀이, 난장처럼 함께 어울리는 거에요. 보통 사람들이 화가가 그림 그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을까요? 퍼포먼스가 아니라 수입으로 생각하면서 거리화가를 그만두었습니다.”

시간을 돌아 화가가 다시 거리에 섰다. 갤러리에 그림을 전시하는 것도 좋지만 동네에 그림을 걸어놓고 주민들이 지나가다 잠시 쉬어가며 얘기하길 바란다. 다시 소통을 꿈꾼다.

“저번엔 못했지만 예전부터 생각했던 건데 앞 마당에 분필 같은 걸로 사방치기 같은 그림을 그릴 거에요. 아이들이 와서 놀 수 있게끔. 고무줄이나 오징어게임 같은 놀이를 아이들이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 어릴때는 다 그렇게 놀면서 자랐는데.”

지난 오후에 함께 외출해 들어오니 집 앞 길에서 아이들이 사방치기 같은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 앞에 엄마들이 한가로이 앉아서 수다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정겨워 보였다. 그 광경을 보며 <동네미술전>도 능히 저런 모습이 그려질 수 있겠구나 싶었다.

다음 <동네미술전>은 여름 안에 열릴 예정이다.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꾸준히..

그는 달팽이 그림을 연작으로 구상하고 있다. 전에는 달팽이 한 마리가 저 멀리 소용돌이를 향해 기어가는 그림을 그렸다.

“달팽이는 제 삶의 방식입니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가죠. 잠시 딴 곳을 보다가 ‘어, 어디있지’하고 찾아보면 어느새 저만치 가 있는 달팽이. 지금은 아무 작업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매일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사유하고 사색하고. 아직도 그 끈을 놓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예술가입니다.”

덧칠한 그림위로 아래의 물감이 드러나듯 그림에 내재된 시간의 층위를 표현하고 싶다는 화가. 붓을 들고 허공에 점 하나 찍을 때까지 느리지만 누가 뭐래도 자신의 길을 가는 예술가. 하늘가는 배. 배정민. 당신이 초대한 그 놀이에 기꺼이 함께 즐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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