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최전선

여든 살 想和, 꽃 같은 그대에게

- 배우는녀자

想和
어렸을 적에는 하도 예뻐서 숭어리(꽃송이)라고 불리셨단다. 하지만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녀는 이미 손주를 셋 씩이나 둔 ‘할머니’였기에, ‘숭어리’라 불리던 그녀의 꽃 다운 시절을 상상하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하지만 문득, 그러나 계속 궁금해졌다.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왔는지…
가족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더 서로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기란 얼마나 어색한 일이던가. 마음과 달리 쭈뼛쭈뼛 날짜만 미뤄가다 드디어 추진력 하나는 둘째가면 서러워할 작은언니 덕분에 지난 주말 인터뷰를 실행에 옮길 수 있었다. 외가인 고창까지 세 시간도 더 달려가니, 그녀가 복분자를 따느라 검붉게 물든 손을 흔들어 반겨준다. “아가, 밥은 먹었냐?, 반찬이 읎어 큰일이다…”

#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할머니가 시가였던 정읍시 산외에서 친정인 이 곳 고창으로 터를 옮기신 지는 약 10년 정도 되었다. 이곳으로 이사를 하면 딸들이 잘된다 해서였다던가. 여튼 이 곳이 할머니가 유년 시절을 보낸 곳이라 가볍게 태어나신 곳에 대해 여쭈었는데, 육이오, 수복, 인공 등등 전혀 얘기치 않은 단어들이 튀어나와 당황스러웠다. 올해 팔순이시니 따져보면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님에도 글로 배웠던 역사와 말로 듣는 역사는 그 ‘충격’의 간극이 천지차이였다.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십대 시절 내 사유체계를 통째로 흔들었던 <태백산맥>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태백산맥을 읽은 후 작가 조정래를 숭앙해 마지 않았었는데, 지척에 실존인물을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니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할머니가 태어난 집은 없어졌어요?
아먼, 진~ 작 웂어젰지. 육이오 사변 나고 (서울)수복해갔고 바로.
아아??…수복이요..육이오때? 육이오 때 불 타서요?
이~육이오 지내기 전에 전에 거기서 살었어 할머니는. 그리갖고 육이오 되기 전에부텀 해방되고 얼매 안되아가꼬 막 인공되드락까지 저 거시기 사방으로 돌아 댕겼어. 광주가 있고.
왜요?
할머니네 아버지가 공산주의다고. 일본서 대학교 댕김서 독립운동을 해갔고 일본놈들한테 잽혀가서 갇혔다가 나오셌어. 그리갖고 서울가서 해방되기 전에 신문기자로 있었어. 근디 어디 행무소에 갇혀있는 것이 못 거시기헌게 몰릉게 잽혀갔다고 헌 것만 독립기념관에 가 써 있제, 어디 행무소에서 산 것은 안 밝혀진게 독립운동가가 못 되얐지.
공산주의다고 막 쬈게댕기고, 그렁게 집도 팔아버리고 논전답도 다 팔아버리고, 저 거시기 외할매네 어머니는 저 줄포가도 있고 저그 영광 가서도 살고. 그랬어. 논 전답 쪼가썩쪼가썩 팔아 갖고. 그러고 난중에 못 살게 생겼응게 걍 농사진 것 싹 다 거식 허고 할머니는 광주 방직회사 가 있었어. 그러고 인공 돌아와서 여기 왔었서.
그래 갖고 여기 와서도 또 피난댕기고 쬣게 댕기다가 인쟈 대한민국이 또 밀고 와갔고 수복해 갖고. 칠장소(출장소)가 있는 너그 할아버지, 저 거시기 사거리 점방 안 있디야 거그다가 칠장소를 지어났었어. 그러는디 거기서 또 앵게서 요~짝에 당쿠리라고 허는 디다가 있었어. 지서가. 그리서 할머니는 그래갖고 결혼했어.

할머니는 할머니네 아버지 기억은 많이 나세요?
우리 아버지는 겁나게 이쁘고 잘생기고 키도 컸시야. 글고 또 어찌나 상냥시란지. 또 나를 겁나게 이뻐힜어. 나만 딸이라고 그랬시야. 방학때 집에 오시먼 나만 방에 디리고 나허고 너허고 둘이만 서울가서 의사어매랑 항꾼에 살자고… 서울서 마누래를 얻었는가.

그럼 할머니네 어머니가 되게 외로우셨겠네요.
외로와도 헐 수 없제. 긍게 새끼들만 키웠제. 글고 아버지 땜시 타격을 어찌 입었는지 아냐. 우리는 안 맞었어도 어매는 총 개머리판으로 많이 뚜들어 맞었시야. 남편 어딨는지 데라고. 나도 제국시대 때 핵교 댕길 적에도 “느그 아버지가 누구냐” 그라믄 이천우요 소리를 못했서. 독립운동가 새끼다고 순사들이 조사를 헝게 나도 활발히 우리 아버지 이름을 못 댔지. 그때부터 일본놈들이 책 같은거 뒤느라고 맨 가택수사를 허고, 해방되니 공산주의라고 민주주의 테로단들이 막 조사허고 뚜들고 댕기고.. 아이고.. 아버지는 맨 도망댕기고 행방을 알겄냐.

인공때도 이남에 내려오덜 안허셨어. 어디 가 계신가도 모리고… 그렁게 인공때도 우리는 그냥 팬팬허니 살었지 활약을 안혔어. 간부도 나고 여청이고 뭣도 허라 허는디 할매도 어매도 아무것도 안혔어. 그렁게 경찰헌티로 결혼을 안 허니 거시기도 혔어. 큰동상하고 나허고 잽혀갔어. 수복허고 나서. 인공 때 활약헌 사람들 잡어다가 투들어 패고. 그런 큰애기덜 붙잡어다가 훈련도 시기고 막 허는디 거기 훈련 주임인가가 중신을 혔는디 그걸 안 헌다 헌게 “맥없이 중신헐 때 가덜 안헌게 그리 훈련을 허는 것이여. 인공때 활약을 안했드라도 속으로는 저런 개새끼들허고 어찌 같이 산디야 허고 결혼을 마다헌게 저리 잽혀 댕기는 것이지” 그런 소리도 들었어. 열 야닯에.

그렇게 불려다니고 막 그러면 경찰이신 할아버지랑 결혼하는거 싫지 않으셨어요?
우리 어머이가 그냥 사람이 착실허다 헝게 시켜서 헌 것이지 나는 결혼 같은 것도 벨로 안허고 잡헜어. 집안은 폭삭 망허고 늘 쬈개 댕기는 사람이 사랑이 다 무시고, 결혼이 다 무시다냐. 할아버지네 어매를 내가 봤으먼 결혼 안해. 근디 못 봤어. 눈이 까풀어져갖고 어지간히 싸납게 생겼는디. 그걸 못봐서 결혼헌 것이제.

시집살이도 매운데 할아버지는 계속 아프고 돈도 못 벌어다 주시고.. 그럼 안 미우셨어요?
아픈 것은 맘대로 허는 것이냐. 내 맘대로 못허는 것이제. 세상사람들이 다 이. 느그 할아버지 여그서 저그 모종에라도 가서 앉었다가 일어날 땍에 비척비척 자빠질라헌 게 가 손 잡고 모시고 와야제. 그러먼 넘들은 잉꼬 부부다고 영감님 돌아가시먼 성은 못 살꺼시다고 했다만 내 집 식군디 내가 아픈 사람을 안 보살피먼 되겄냐. 내 집 식군게 미웁다고 안허고 항꾼에 보살피고 살어야지 않겄냐.

할아버지랑 싸우고 그런 적은 없으세요?
우리는 처음부터 양존을 혔어. 그러니 서로 욕은 안허지. 우리는 되게 싸운 것이 서로 말을 안허는 것이지. 근디 느그 할아버지가 삐지기를 잘 삐져. 한 번 삐지먼 말을 절대 먼첨 안해. 그랴서 에라 먼첨 말허는 놈이 먼저 죽는단다 허고 항시 내가 먼저 말을 걸지. 그래도 느그 할아버지가 먼첨 가버렀다.

# 예순 살의 그녀, 여든 살의 그녀
할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장면들 중 하나는 관광버스 안에서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차차차’하면서 노래 한가락 멋지게 뽑아내고 춤도 흔들흔들 재미나게 추시던 모습이다. 이모나 삼촌 결혼식 다녀오던 버스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가무가 꼭 필요한 상황에서도 어찌 꽁무니 뺄 틈만 찾는 소심한 나를 볼 때마다 이십 년도 더 지난 그때의 할머니 모습이 생각난다. 이제는 자식들 혼인시키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어서인지 도통 노래 부르고, 춤추는 모습을 볼 수 없다.

할머니 일하고, 막 혼자 주무시고 그러면 안 외로우세요?
어. 그런 것은 읎어야~. 그래도 괜찬해.

서울서 이모들이랑 같이 안살고 싶으세요?
그래안해. 안있고 싶어. 여기 와갔고 쉬이 돌아댕기고, 내 손 움직거리고, 딸싹딸싹 돌아댕기고 대화허고 이얘기해야지. 나 서울서는 아이고~.
암만 그래야도 헷갈리덩만. 아파트는. 한 번 해보먼 허겄지만은… 여서 오고 고리고리는 뱅원에랑은 돌아댕기겄는디…그 아파트 번호 누리는 것은 내가 대강 이모들 누리는 것 봐서 알겄는디… 그것은 쪼까 알겄는디. 아이고 나 혼자 조심시럽고 헷갈려서 못 나가겄어.

그럼 여기서도 문화회관 그런데 가서 그냥 놀러 다니고 그러시면 안되요?
아이고. 그것도 여기서 대산까지 가먼 고창서 실러온다고 허등만. 그러먼 노래부르고 잡은 사람은 노래허고 장구치고 잡은 사람은 장구치고 그런다등만. 근디 아이고 그것도 우리 동네서 한나라도 가야지. 넘으 동네 사람들허고만 있으먼 그것도 그리야. 그리고 내가 산외처럼 오래 있었으먼 면소재지 사람이라도 대강 안 아냐. 근디 내가 인자 왔는디. 그런디 사람들을 몰르고.
그래도 할머니 옛날에 산외 사실 적에는 되게 활동적이고 그러셨는데..
그때는 내가 잘 돌아댕기고 거시기 했는디, 여기와서는 아이고 그런것이고 저런것이고 아~무 재미도 없어

그럼 산외에서 사실 때가 좋으세요, 여기서 다른 친척분들하고 사시는게 좋으세요?
활발 허고 재밌는 것은 산외서 살 때가 재밌었지. 여기는 와서 낯 아는 딩게 거시기만 했제 하나또 재미시런 것은 읎제. 거기서는 노상 웃고 히드득거리고 살었는디 여기는 웃을 얘기도 없고 뭐 거시기도 읎어야. 속에 있는 말도 못해. 거 산외 윗동네 아지매 있잖냐 그 아지매랑 우리가 크립(클럽?)아니냐. 그렁게 뭔 얘기를 해도 밖으로 새덜 안해. 근디 여기도 다 동생들이고, 아제들이다만 넘으 식구들이 안 들어왔냐. 일가들이라도 여자들이 타관에서 와서.. 그런기가 있어. 그러니 한나도 재미는 읎어. 여그와서는 웃을 일이 읎어. 거그서는 노상 히드득거리고 동네가 뜰썩뜰썩 했는디.

할머니 그러면 다시 산외가서는 안 살고 싶으세요?
아이고 나 그거는 싫어야. 그 깔끄막 뭐더러 올라댕기고. 나 그 깔끄막 올라댕기기 싫응게 욜로 왔시야.

#가지 많은 나무…
아들 둘에 딸 아홉. 많아도 보통 많은 숫자가 아니다. 이제는 그들의 2세까지 다 합해 45인승 버스가 모자랄 정도다. 이리 자식이 많으니 일일이 신경쓰기도 어렵고, 또 게 중 더 이쁜 놈, 덜 이쁜 놈도 있는 것은 당연지사일 터.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일 뿐이고, 여전히 덜 이쁨 받은 놈은 오십이 넘어서도 어렸을 적 고픈 모정에 아쉬움이 남기도 하는 모양이다.

할머니 때도 자식 열하나는 되게 많은 거였지요?
그렇제. 근디 나는 병원가기도 싫고 그랴서 그냥 낳어. 피임약을 먹으니 속도 씨리고 루픈가도 잘못허먼 속병이 든다등만.

그래도 어떻게 하나도 안 잃고 다 잘 키우셨어요?
그렁게. 애기 어매들이 애를 키울라먼 반 점쟁이 반 의사가 되야되. 나 애기들 홍진헐 때 다섯이 항꾼에 홍진허고 그랬는디. 너그 수경이 이모가 얼매나 거시기 했는지. 내 그때 얼매나 놀래부렀는지. 그짝에 곤궁허고 가시내들 끈뜬허먼 아프고 그렁게 “아이고 가시내 하나나 디져라 디져” 그랬는디, 어매~ 애기가 홍진에 풍까지 걸려서는 그냥 아랫목에 가로 누워서 엑엑허고 피를 토허는디, 나는 점쟁이헌테 가고 느그 어매는 밥허고 하나씨는 약방가고 그래갖고 애기를 게우게우 살려냈다. 그러고 다씨는 “에이 써근놈에 아새끼들 호랭이나 물어가라” 그런 소리는 해도 디져라 소리는 입 밖으로 내덜 안혔어. 야튼에 부모 놀라게 헐라먼 풍나서 곧 죽을라고 허는 것이 젤로 거시거더라. 글고 그 풍난디 그 자리로는 다시는 아~들 암도 눕도 못허게 혔어. 얼매나 놀랬는지.

근데 할머니 진짜로 아들이 좋아요 딸보다?
나는 아들은 든든허기만 허제 좋은 것은 없고만. 쪼까 든든해갔고 뭐 시기고 말허는 것은 아들인디, 딸들이 생각이 짚이 들지. 허물도 없고. 근디 아들이 좀 든든헌 것이 있지. 근디 멋덩거리 웂어 우리 큰아들.
근데 그게 안 서운하세요? 그렇게 애지중지 키웠는데
근디 나는 어쩐 놈에 성질인가 딸이고 아들이고 간에 내가 저그들을 어쩌코롬 키웠는디 그런 생각이 들어야 헌단 말인디. 암만 서운허게 해도 그냥 그런게비다 허고 이해해져 버리가꼬. 그런 생각이 안들어야. 그런게 좌우당간 설쇠갖고 메느리가 전화인사 한번을 안허고 당직이다 뭣이다 안 내려와도 그냥 바쁜게비다 그러고 이해해버리고 욕도 안헌다.

열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는데, 그래도 쪼끔 더 아픈 손가락은 있잖아요.
못~사는 사람이 쪼깐 거식허제. 안씨랍제. 그런디 다른 사람은 괜찮헌디 아프다 헌게 느그 어매가 걸리고 부안이모도 걸리고. 닛째. 우게 사람들이 쪼깨 걸려. 근디 밑이 사람들은 갠찮허잖냐. 안직까지는. 긍게 내한테 뭇 있으면 다른 놈들보다 그 놈을 쪼깨 더 주고 싶으제. 하나라도.

자식들한테 뭐 바라는 건 없으세요?
나는 암껏도 바래는 것이 읎다. 넘들은 새끼가 이것도 사줬으먼 좋겄다, 돈도 줬으먼 좋겄다, 잘살었으먼 좋겄다 허는디 뭣 보담 몸 건강이 첫찌야. 내 앞에서 몸만 건강하니 새끼들이 잘 살았으먼 좋겄다 그것만 생각허제 할매는 딴 것은 없어야.

그럼 손자들 보면 무슨 생각드세요? 내 자식이 또 자식을 낳고..
어쨌든지 느그들 잘 되야서 느그 어매 아배 고상 안시기고 살었으먼 쓰겄다 그러제 별 것 읎어야. 그러고 나이먹은 놈들은 얼렁 결혼해서 살아야 헌다 난 그것만 생각허제. 그려서 난 느그들 보고 어서 연애나 해서 짝을 맞차야 헐턴디 그 생각만 헌다. 아 깐딱허다 등넘으먼 못 써야. 난 그거시 젤로 걱정이지. 머시매들이고 기지배들이고 얼렁얼렁 가야제. 공그고 게래밨자 아무것도 웂어야. 근디 서로 내가 쪼깨 양보허고 이 사람이 양보허고.. 내가 잘허먼 저 사람도 잘헐수 있어. 근디 내가 잘허는디 저 사람이 못 허먼 그것은 사람새끼가 아니제만은, 넘넘찌리 만내갖고 어찌 맘이 탁 거시기 헐 것이냐. 내가 존중허먼 저 사람도 나를 존중허게 서로 좋게 질을 딜이야해. 긍게 나만 잘난칙히 해도 안되고 상대방이 잘해주먼 나도 잘해주고 그만큼 대우를 해주야 해.

할머니는 그러면 젊었을 때로 다시 돌아가도 결혼해서 사실 꺼에요?
안해. 나는 누가 줄을 안 놔줘서 그러제 큰 애기때부텀 수녀로 가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 결혼해 사는 것 싫어. 그냥 독신생활로 사는 것이 좋제. 결혼 안해. 몰라 연애허는 사람들은 어쩐고 몰라도 나는 그랴.

에이~할머니 그럼 저희도 이해해주셔야지요~ 저희도 그렇게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그려. 그렁게 연애를 안허겄지. 덤벙덤벙 속절 없을 때 연애도 허는갑더라. 미리 속들어버리먼 연애도 못허지. 이것저것 따져야 헐 것이 많은게. 그려서 신간 편케 혼자 사는 것이 좋다만… 뭐 나도 부모들이 그리 여워서 가기는 갔다만 그리 재미시런지 그런 것은 모르고 살았다.

할머니 우리 어렸을 때는 할머니가 강아지라고 그러셨잖아요, 그런데 경국이랑 윤아한테랑은 왜 안그러세요?
아 그러게 옛날에 할매들은 다 손자들 이쁜게 내 강아지 내 강아지 했다만, 아 이놈들은 내가 강아지라고 했더만, 나 강아지 아니요~ 그러드랑만. 너그들은 집에 할매도 계시고 또 다른 할매들 속에서 안 자랐냐. 긍게 내가 강아지 강아지해도 지들 이뻐서 그런다 허는걸 아는디 이놈들은 안그려. 언젠가 경국이란 놈이 그러덩만, 아 윤아란 것도 나는 강아지 아닌디요 그러데.

그 강아지들이 이리 커서, 할머니가 다 궁금하단다. 얼렁뚱땅 인터뷰를 마치고 바로 서울로 올라간다 말씀 드리니 찬 없는 밥 한 그릇 먹고 세 시간 운전해 올라갈 것이 걱정이시란다. 배웅하는 내내 “좌우간 고맙다, 고맙다”를 연발하시는데 차마 무엇이 그리도 고마운 것이냐 물을 수 없었다.
엄마를 대동하지 않고 우리끼리 할머니를 찾은 것도 이십 년만이오, 이제 속이 좀 들었다고 이것저것 할머니 마음도 물어봐 주고 또 한참이나 들어도 주니 그리 말씀하시는구나 짐작만 할 뿐이다. 서울로 오는 내내 마음이 먹먹하다. 우리는 서로를 너무도 모르는구나.

응답 1개

  1. 콩콩말하길

    인터뷰를 보니 할머니 생각이 나네요.
    아빠 결혼 사진속 할머니는 사슴같았더랬죠. 눈매가 꼭 사슴눈^^
    우리네 할머니들은 한분 한분 삶이 역사가 아닌 분이 없나봐요
    저도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 인터뷰라도 해놓을 걸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한 집에 같이 살아서 그냥 식구였지 중간에 몇가지 주워들은 것 빼곤
    할머니의 인생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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