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정치의 사유

랑시에르: 평등의 정치학에서 존재론적 평등성으로

- 이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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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이 정치적 사유에 기여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를 ‘치안’과 구별하여 정의한 것이다. 즉 정치는 치안과 그 본성을 달리한다는 테제가 그것이다. 사실 정치라는 말은 사용하는 사람마다 그 의미가 다를 뿐 아니라, 정반대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치에 대한 사유가 정치의 개념으로 집약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는 어쩌면 매우 자연스런 것이라고도 할 것이다. 가령 슈미트가 정치에 고유한 것을 명확히 구별하여 ‘정치적인 것’을 정의하려고 했을 때나, 아렌트가 그리스에서 오이코스와 폴리스의 구별을 통해 정치를 정의하려고 했을 때, 혹은 푸코가 일상적인 세계 속에서 작동하는 관계로서 정치를 정의하려고 했을 때, 이들은 모두 자기 나름의 고유한 정치 개념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치의 개념은 그 실천적 함축 역시 너무도 이질적임에도 하나의 동일한 단어로 지칭된다는 사실로 인해, 복수의 정치 개념을 다룰 경우 기본적인 방향조차 잃게 만들고 만다. 랑시에르는 이 자연스럽지만 동시에 곤혹스러운 정치 개념들 사이에 하나의 근본적 구획선을 긋는다. 즉 어떤 정치이론이 전제하는 정치의 개념이 정말 정치에 속하는 것인지, 아니면 치안에 속하는 것인지를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정치의 개념들을 정치적으로 사유할 것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정치학들에 대한 일종의 메타-정치학의 위상을 만들어낸다.

랑시에르에 따르면 정치와 구별되는 치안이란 우선 어떤 사회 안에서 자리나 기능의 분배, 혹은 몫이나 자격의 분할과 관련된 것이고, 그런 분배나 분할을 사회성원들의 ‘합의(consensus)’라는 관념을 통해 유지하고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사회 전체의 통일성을 유지하기 위한 통치와 결부된 것이다. 그것은 몫의 분배를 셈할 때 셈해지는 자와 셈해지지 않는 자를 분할하는 것이고, 자신의 권리나 입장을 말할 수 있는 자와 말할 수 없는 자를 분할하는 것이며, 어떤 것을 문제화할 때 보이는 자와 보이지 않는 자를 분할하는 것이다. 그것은 몫이 없는 자, 말할 자격이 없는 자, 셈해지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자를 배제하는 배제의 체계를 작동시킨다. 그런데 그것은 존재자의 일부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기에 없다고 간주되는 자를 배제하는 것이며, ‘없는 자’를 배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할과 배제는 있어도 보이지 않게 만들고 말해도 들리지 않게 만드는 차원의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랑시에르는 정치란 감성적인 것의 분할이라고, 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분할이라고 정의한다. 이는 정치의 개념이 단지 사람들이나 집단 간의 분할과 배제보다 훨씬 근본적인 층위에서 사유되어야 함을 함축한다. 감성적인 것, 혹은 그러한 것을 대상으로 포착하거나 포착하지 못하는 감성적 능력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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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는 < <광기의 역사>>는 이러한 분할과 배제가 작동하는 양상을 잘 보여준다. 그 책에서 푸코는 근대에 이르러 광기가 ‘정신상에 생긴 질병’으로 간주되게 됨에 따라 광인의 말은 자신이나 어떤 대상에 대한 표현이나 주장이 아니라 정신병적 ‘증상’이 되었고, 그 결과 광인은 아무리 외쳐도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 갇히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가령 < 터미네이터 2>에서 사라 코너는 핵전쟁에서 인간과 기계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미래에 대해, 그 미래로부터 날아올 터미네이터에 대해, 인류의 긴박한 미래에 대해 소리 높여 말하지만, 그 말은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르는 분할의 격자는 정신병원이나 정신병리학의 성립과 작동에 전제가 되는 조건이고, 병원의 질서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가장 일차적인 통치장치인 것이다.

이는 랑시에르가 말하는 치안의 개념이 푸코가 말하는 권력과 통치 개념에 잇닿아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푸코의 그 개념들이 그린 것과는 다른 궤적을 그리면서 정치의 개념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은 굳이 대비하여 표현하자면 푸코의 ‘미시정치’ 개념과 대비되는 ‘거시정치’를 다른 방식으로 주목하게 하며, 통상적인 정치적 영역과 구별되는 다른 영역을 만들기보다는 그 장에서 문제를 포착하고 다루는 다른 방식을 창안한다. 가령 이주노동자, 특히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체류할 자격이 없는 자고, 따라서 어떤 권리도 말할 수 없는 위치에 있으며, 노동문제를 다룰 때조차 보이지 않는 자다. 이는 단지 인간에 대해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이 4대강 개발의 기획이나 진행에서 강이나 습지에 사는 수많은 종류의 생물들에 대해 정확하게 적용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랑시에르는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만드는 것이 정치라고 정의한다. 가령 380일 이상의 농성투쟁을 통해 1997년 만들어진 이주노동자 노동조합(MTU)은, ‘산업연수생’이란 이름에 가려 노동자로 보이지 않던 이주노동자를 보이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말할 자격이 없는 자들이 말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노동조합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정치’라는 말에 값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가령 임금인상 요구투쟁을 할 때조차, 그것은 없는 몫을 요구하는 것이란 점에서 정치적인 것이다. 이는 통상적인 맑스주의적 정치의 개념과 랑시에르의 정치 개념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 잘 보여준다. 정치적인 문제, 국가권력과 관련된 문제를 다루는 경우에도, 그것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자격 있는 자와 없는 자의 분할을 넘어서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리 정치적인 외양을 취한다고 해도 정치 아닌 치안에 속한 것이다. 반면 70~80년대처럼 노동조합이 금지된 조건에서라면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시도 자체만으로도 정치라고 말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혹은 ‘도롱뇽 소송’처럼 개발에 관한 문제에 대해 말할 자격이 없고, 소송을 제기할 주체로 보이지 않는 존재를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소송을 제기하는 것 자체만으로 정치라고 하기에 충분하다. 이는 정치와 아무리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랑시에르가 민주주의의 개념을 ‘통치할 자격 없는 자의 통치’로 정의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란 수적인 다수의 지배가 아니라, 그런 다수성 아래 가려 보이지 않는 자들의 지배인 것이고, 지배하지 않는 자들의 지배며, 자격 없음이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는 자격을 부여하는 ‘체제’다. 민주주의는 흔히 말하듯 하나의 ‘政體’가 아니라, 모든 정체 속에 존재하는 체제다. 왜냐하면 어떤 정체든 간에 그 안에 자격 없는 자들은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런 자들의 저항과 투쟁 또한 존재하게 마련인 한, 민주주의는 존재한다고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떤 정체와도 동일시될 수 없는, 모든 정체들의 외부기도 하다. 왜냐하면 어떤 정체에 대해서도 그것을 통치하는 자들에 반하여, 혹은 그 통치 자체에 반하여 저항하며 그와 다른 체제를 향해 밀고 가는 그런 역량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란 어떤 체제에서도 해방의 정치의 동력이며, 그것이 추구해야 해야할 방향이다. 아니, 해방의 정치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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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한편 랑시에르는 정치 개념을 감성적인 것의 분할과 관련하여 정의하기에, 역으로 감성적인 것은 항상 정치와 치안이 대결하며 작동하는 정치적인 것의 영역을 뜻하게 된다. 이는 예술이나 미학에서 정치적인 것을 사유하는데 또 하나의 중요한 혁신을 야기한다. 예를 들어 마르셀 뒤샹이 자전거 바퀴나 소변기 같은 ‘레디메이드’를 미술관 안에 끌어들였을 때, 그럼으로써 예술작품의 자격이 없었던 것에 예술작품의 자격을 부여하고, 예술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를 와해시키며 새로운 종류의 ‘예술’을 가시화했을 때, 그것은 예술에서의 정치를 실행했던 것이다. 1916년 카바레 볼테르에서 후고 발이 아무런 의미 없는 단어들로 시를 써서 낭송했을 때, 단지 어조나 악센트, 인토네이션을 비롯한 음성적인 특성만으로 청중들을 웃고 환호하게 만들었을 때, 그것은 ‘시’나 문학에서 보이지 않던 어떤 예술적인 것을 보이게 만든 것이다. 이처럼 예술에서 정치란 정치를 표명하는 태도나, 정치적인 주제를 다루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만들고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하는 창조를 뜻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람들의 감성을 바꾸는 것이고, 새로운 세계를 감지하고 미리 만들어나갈 수 있는 감성적 바탕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감성의 혁명, 그것은 새로운 세계를 창안하는 정치적 혁명의 조건일 뿐 아니라, 정치적 혁명이 창출한 것을 받아들이고 더욱 밀고나가 완성하는 조건이기도 할 것이다. 타니가와 간(谷川雁)이라면 이를 혁명 이전에 만들어내야 할 ‘감성의 혁명정부’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는 가령 예술에서의 아방가르드가 정치적 아방가르드와 상통하는 지점을, 동시에 그것과 달라지는 지점을 보여준다. 이전에 맑스주의 예술이론에서, 예술에서의 정치란 ‘정치적인 예술’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약간 단순화해서 말하면, 권력을 비판하거나 혁명을 찬양하는 예술을 뜻한다. 정치적인 것을 표명하지 않는 예술, 즉 비-정치적 예술은 정치적이길 포기하는 방식으로 정치적인 예술, 즉 지배계급에 저항하지 않고 그에 암묵적으로 동조하는 예술로 간주되었다. 이는 예술에서 정치를 정치적 예술로 단순화할 뿐 아니라, 정치적 문제의식을 명확히 갖고 있으면서도 정치적 예술과는 다른 길을 추구했던 수많은 진보적 예술가들을 곤혹스럽게 했고 그들이 창조한 것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들었다. 가령 다다의 예술가들은 명백히 전쟁과 민족주의, 부르주아적 미학 등에 대해 명시적으로 반대했고, 많은 경우 진보적인 태도를 뚜렷이 했음에도, 정치적 예술 말고는 예술의 정치를 보지 못했던 맑스주의자들에게는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으로서의 정치는 이처럼 거시적인 의미에서, 동시에 미시적이고 감성적인 차원에서의 정치의 개념을 근본에서 다시 사유하게 한다. 물론 이 양자는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동일한 정의를 공유하는 것 이상으로 동일한 방향을 지향한다. 랑시에르라면 그것을 ‘평등의 정치학’이라고 말할 것이다.

먼저, 말할 자격 없는 자가 말하고 몫이 없는 자가 몫을 주장하는 앞서의 정치 개념은,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격 있는 자와 없는 자, 몫이 있는 자와 없는 자 간의 평등을 주장하는 것이란 점에서 ‘평등의 정치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랑시에르가 생각하는 평등은 이보다 좀더 근본적인 차원의 것이다. 가령 그는 < <무지한 스승>>에서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의 평등에 머물지 않고, 지능의 평등을 주장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 자격의 유무나 몫의 유무가 ‘인위적인 것’이고 따라서 그 분할을 넘어야 한다는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지 않지만, 지능의 평등, 능력의 평등을 받아들이기는 그리 쉽지 않다. 그것은 현행적인 지능의 차이를 넘어, 잠재성이 차원에서 지능이나 능력의 평등을 말하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다. 잠재성의 차원에서 지능은 평등하지만, 주의와 집중을 야기하는 의지의 작동양상의 차이가 지능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이는 지능만이 아니라 다른 능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평등의 정치학은 시작 이전의 시작이라는 ‘시원적’ 위상을 갖는다. 동시에 그것은 지능의 차이를 야기하고 능력의 차이를 고정하는 관계, 분할의 체계를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정치의 개념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다른 한편 감성적인 것/미적인 것의 분할과 결부된 정치의 개념 역시 강한 의미에서 평등의 정치학을 함축한다. 가령 뒤샹이 레디메이드를 미술관에 끌어들였을 때, 그는 예술이라고 간주되는 것 만큼이나 그렇지 않은 것이 예술일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는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평등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후고 발의 음성시는 유의미한 단어들로 된 시와 음성적인 재미를 유발하는 말 간의 평등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를 좀더 명시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은 현대음악의 경우일 것이다. 미래주의자 루이지 루솔로는 소음을 음악에 끌어들임으로써, 음악으로 들리지 않던 소리를 들리게 했다. 이는 음악적 소리와 소음 간의 평등을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레즈나 셰페르가 사이렌 소리나 회전문 소리, 냄비 소리를 음악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그것 역시 이전에 음악으로 들리지 않던 소리를 음악에서 들리게 만든 것이며, 음악적 소리와 비음악적 소리의 평등을 보여준 것이다. 존 케이지는 <4분 33초>에서 침묵 또한 음악적 소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음악에서 소리와 비소리의 평등성.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것은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던 것과 평등한 위치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던 것과 평등한 위상을 갖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이는 것/보이지 않는 것 등의 감성적인 분할을 가로지르는 ‘감성의 정치학’은 정확하게 평등의 정치학을 뜻한다고 할 것이다. 이는 역으로 평등성의 이념을 갖는 해방의 정치가, 단지 사회적 관계에서의 평등, 인간들 사이에서의 평등에 머물러선 안됨을, 훨씬 더 근본적인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뜻한다. 이런 감성의 변혁을 수반하지 못할 때, 평등의 이념은 수적인 다수성의 지배를 뜻할 뿐인 대중의 감성적 평균을 넘어서지 못하게 된다. 예컨대 모든 예술적 아방가르드를 선도했던 혁명전후 소련의 예술적 실험이,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19세기적 감성에 갇혀 소진되고 매장되었던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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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시에르가 말하는 평등의 정치학이 이런 것이었을까? 그건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그의 정치 개념에 함축된 평등의 관념을 이러한 근본적인 차원으로까지 밀고 가지 않는다면, 그의 정치철학이 갖는 혁명적 잠재성은 충분히 펼쳐지지 못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즉 평등의 정치학은 모든 영역에서 존재론적 평등을 사유하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그가 제기한 입론을 좀더 밀어붙이는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먼저, 지능의 평등에 대한 그의 흥미로운 주장은 단지 지능뿐만 아니라 모든 능력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모든 능력의 존재론적 평등성. 다음으로, 음악과 비음악, 예술과 비예술의 존재론적 평등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존재론적 평등성을 사유하는 지점으로까지 나아갈 것을 촉구하는 것 같다. 가령 백남준은 택시의 움직임이 머스 커닝엄의 무용과 다르지 않은 무용임을 보여줌으로써, 춤과 춤이라고 간주되지 않는 모든 동작의 평등성을 보여준 바 있다(< 백남준에 의한 머스에 의한 머스>). 음악과 미술, 춤만으로 이런 사유를 중지할 이유가 없지 않을까? 모든 존재자의 존재론적 평등성. 존재와 능력 모두에서 존재하는 그러한 평등성이 모든 활동의 질료적 바탕을 이루고 있기에, 존재론적 차원으로 확장된 평등의 정치학은 단지 공상 아닌 현실성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평등의 정치학이 지향하는 근본적인 차원의 ‘혁명’이 되풀이되는 실패 속에서도 단지 하나를 그저 다른 하나로 바꿀 뿐인, 니힐한 시지푸스의 노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이런 존재론적 평등성을 향한 전진의 벡터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그런 벡터를 포함하고 있는 한에서일 것이다.

– 이진경(수유너머N)

응답 6개

  1. 바람말하길

    제가 이해한 바로는 랑시에르에 따르면 프락시스님이 얘기한 장애와 비장애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그런 구분 자체가 비장애인의 우월적 시각이 낳은 개념화 아닐까요?! 잠재적 차원에서 존재론적 평등성은 현재의 뒤집힌 인식과 결별하고 세계를 발본적으로 뒤집어 새롭게 인식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봅니다.

  2. 프락시스말하길

    – 랑시에르라면 지적장애인의 지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야기할까?

    : 랑시에르가 이야기하는 (존재론적인) ‘지능의 평등’과 발리바르가 이야기하는 (인간학적 차이로서의) ‘지적 차이’ 사이에서 어떤 생산적인 토론이 가능할 수 있는가?

    – 음악에서 음악적 소리와 비음악적 소리의 평등성, 혹은 소리와 비소리의 평등성

    : 그렇다면 노동에서 노동적 활동과 비노동적 활동의 평등성도 이야기 할 수 있지 않을까? 비음악적 소리와 비소리를 음악으로서 드러내고 구성하는 것이 정치라면, 비노동적 활동(으로 간주되는 것)을 노동으로서 구성하는 것이 정치일 수 있지 않을까?

  3. 살구씨말하길

    랑시에르는 수유너머 왔다갔다 하다 얼핏 이름을 들었고
    잘은 모릅니다. 공부가 미천하여 글을 읽고도 어리버리 하네요.
    하지만 ‘존재론적 평등성’이라는 말을 들으니 문득 옛날 생각이 납니다. 위 글에 맞는 이야기 인줄은 모르겠습니다만….

    ‘장’ 자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조직에서,
    선거에 나가라는 몇몇의 부추김을 거부하고 출마하지 않았던 적이 있습니다. 저의 ‘라이벌’로 여겨졌던 누군가가 자동으로 ‘장’이 됐지요. 글쎄, 그리 했던 나름의 진지한 고민이
    있었는데… 나중에 한 선배가 “넌 ‘장’ 해본 적 없잖아!”
    하는데 뭔가 울컥하면서 마음이 닫히더군요.
    ‘장’해본 것이 ‘있음’으로 여겨진다면, 하지 않은 것이 ‘없음’으로 취급되는 상황….. 저는 ‘장’이 아닌 채로 있었던 시간이 ‘있’는 것이었는데도요. 그 조직에서 있었던 나의 시간들은 순식간에 무화되고 말았습니다.

    뭐,살다보니 내용만 바꿔서 반복되는 것들이 많습니다.
    지적 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적 능력이 ‘없다’라고 말하게 되는 상황에 종종 처하기도 하고요…
    자식이 없는 사람은 교육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식의 개드립들도 가끔 들리는데, 평등의 정치학도 여전히 필요한 슬픈 현실. =.=

    위계는 존재들을 있음과 없음의 단계로 구별하면서
    드러나는 것 같아요.
    뭐, 랑시에르는 잘 모르니 제쳐두고, 그냥 체험에서 나오는 잔상 한토막이었습니다. -.-;;;

  4. 달타냥말하길

    참 멋진 글입니다.
    살아 숨쉬는 사유의 박진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멋진 글 감사드립니다.

    잠재성의 차원에서 평등, 존재론적 평등성 :

    “잠재성의 차원에서 지능은 평등하지만, 주의와 집중을 야기하는 의지의 작동양상의 차이가 지능의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의지의 작동양상, 공동체를 구성하는 양식이 어떠한가에 따라 위계가 발생될 수있다.

    민주주의 : 통치 자체에 반하여 저항하며 그와 다른 체제를 향해 밀고 가는 그런 역량의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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