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정치의 사유

자크 데리다: 불/가능의 윤리와 정치

- 최진석

1. 해체, 망치질 하는 사유

데리다는 시종일관 경계의 문제를 자기 사유의 주제로 삼았던 철학자다. 경계란 세계에 어떤 구별을 도입하는 것, 구별짓기를 통해 질서와 위계를 설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경계의 이편과 저편, 내부와 외부를 나누고, 거기에 권리나 자격을 할당한다는 점에서 정치적이지 않을 수 없다. 랑시에르 식으로 말해 경계짓기는 대개 치안(police)으로서 정치를 정초한다. 개인적이고도 집단적인 정체성의 여러 표지들, 곧 인종과 민족, 국적, 성별 등의 차별의 분할선들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데리다의 문제 설정은 경계가 경계로서 내세우는 권위의 원천이 우연스럽고 자의적이라는 데 있다. 경계는 역사적이고 조건적으로 설정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효과 역시 제한적이다. 해체란 이렇게 신성하고 자연적이라고 생각되는 문턱들을 허물어뜨리고, 절대성을 내세우는 모든 경계의 안팎이 기실 임의적인 재단의 결과에 불과함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그런 한에서 정체성에 관한 어떤 논의도 해체의 ‘망치질’을 피해갈 수 없으며, 우리가 아는 온갖 구별의 경계선들도 영속적인 의미를 갖지 못한다.

가령, 근대의 대표적인 집단적 정체성 담론으로서 네이션-스테이트를 예로 들어보자. 통칭하여 내셔널리즘이라는 담론은, 그 담론을 규정짓는 틀(frame)에 의해 내용의 권위를 인정받는 것이지 네이션 자체가 고유하게 담지하는 본질이 있기 때문에 효력을 발휘하는 게 아니다. 단군의 자손, 아라테미스의 후예, 아리안족의 후손 등과 같은 민족의 신화는 자기 집단을 타 집단에 대조하고 특권화하기 위해 설정된 담론의 신화에 불과하다. 베네딕트 앤더슨이 보여주었듯, 민족/국민을 창출해낸 것은 18세기 낭만주의자들이 열망하던 민족/국민의 원초적인 정신이나 본질이 아니라, 민족/국민의 경계를 긋고 이민족/타국민과 구별시켜준 근대 국가의 경계짓기였다. 민족의 이름, 국가의 법, 국민의 권리/의무 저편에는 ‘본래부터 그런’ 무엇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네이션(국가/국민/민족)이라는 단어에 역사적으로 깃들인 허구적 상상력을 통해 작동하는 문턱의 이름들만이 있을 따름이다. 해체는 단순하고 일의적으로 보이는 이 신화들의 맹점과 균열, 틈새 및 불연속 지대를 조명하면서 작동한다.

‘진지한’ 철학자들에게 데리다의 해체는 말장난 같이 들리겠지만 그의 논변이 ‘장난이 아닌’ 까닭은, 해체가 우리 앞에 엄존하는 경계의 담론들(네이션의 신화, 문학 장르의 기원과 철학적 이념의 원천, 정치적 행위의 사회적·과학적 근거 등)을 읽는 데 동원되는 코드들을 오작동하게 만들고 망가뜨림으로써 당연하게만 받아들이던 그 경계선들을 의심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유’든 ‘진리’든 ‘사유’든 권위를 등에 업고 버티고 선 모든 경계들은 해체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모든 견고한 것들은 대기 속에 녹아 사라진다.”

해체의 운동은 단단히 굳은 모든 것, 결코 무너질 것같이 보이지 않는 절대적인 것들을 상대화시킨다. 이런 상대화의 운동이야말로 해체가 갖는 정치적 힘이다. 따라서 데리다의 초기 저술들, <<목소리와 현상>>, <<그라마톨로지>>, <<글쓰기와 차이>> 등은 우선 형이상학의 전통에 대한 해체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비단 철학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에 대해 보다 직접적으로 표명하고 있는 그의 후기 작업은 모양새가 사뭇 다르다. <<법의 힘>>, <<환대에 대하여>>, <<마르크스의 유령들>> 등에서는 모든 상대적인 것들에 선행하는 어떤 ‘절대적’이라 부를 만한 것, 정의, 조건없는 환대와 같은 개념들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현재적이고 현실적인, 상대적인 것들을 말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절대적인 것에 관해 우선 사유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정의로운 것, 유일한 법, 절대적인 환대만이 현실과 역사 속의 법과 정의, 환대를 정초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절대’에 대한 막연한 반복은 역사를 통해 반복되었던 우상과 도그마, 신앙과 폭력의 반복이기도 쉬울 일이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정의든 환대든 그 어떤 것이든 우리는 이 역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이 역설이 힘을 갖는 것은 그게 역설로서 운동하는 동안, 역설로서 부단히 작동하고 있는 동안이기에 더욱 역설적이다. 벤야민의 정의의 폭력에 대한 데리다의 독해로부터 이 역설을 추적해 보도록 하자.

2. 법과 정의의 불/가능성

정의는 폭력을 수반한다. 그래서 폭력에 대한 거부감과 제한의 필요성도 동시적이다. 폭력의 국가적 독점은 근대 국가 체제의 주요한 특징이다. 고삐 풀린 폭력의 위협으로부터 시민적 질서를 보호하고 정상적인 삶을 보장하는 유일한 방법은 폭력의 권리를 국가에 위임하고 폭력을 대체하는 수단으로서 법의 질서를 수립한다는 것. 이토록 간단하고 당연한 논리에는 법이 폭력의 대체물이요, 법과 폭력은 전적으로 상이한 토대에 놓여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설령 ‘국가의 폭력’이란 수사가 성립한다 해도, 이는 잘못된 법체계의 문제로 간주되고 법체계의 수정을 통해 교정 가능한 것이며, 그런 점에서 법의 보존을 위해 불가피하게 요구되는 폭력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악법도 법이다”). ‘합법적 폭력’과 ‘불법적 폭력’의 대립이 법의 보존이란 목표로 수렴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여하간 (국가 등 ‘공적’ 사용에 의해 규정되는) 폭력의 합법성은 대개 폭력으로 감지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법은 마치 ‘힘’의 공백처럼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벤야민은 (그리고 데리다는) 애초에 법의 기원에는 힘/폭력이 필연코 내장되어 있으며, 기실 폭력 없는 법이란 성립조차 할 수 없노라고 단언한다. 법(/국가)의 기원에 놓인 ‘창설적/정초적’ 폭력의 실재성. “적용 가능성 없이는 어떠한 법도 존재하지 않으며, 힘이 없이는 어떠한 법의 적용 가능성이나 ‘강제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기원에 놓인 폭력은 그 자체로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데, 왜냐면 ‘기원’에 앞서 놓여 (기원으로서) 법을 정초하는 폭력을 규제할 아무런 전제도 갖고 있지 않는 까닭이다. “법을 정초하고 창설하고 정당화하는 작용, 법을 만드는 작용은 어떤 힘의 발동, 곧 그 자체로는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폭력으로, 이전에 정초되어 있는 어떤 선행하는 정의, 어떤 법, 미리 존재하는 어떤 토대도 정의상 보증하거나 반박할 수 없는 또는 취소할 수 없는, 수행적이며 따라서 해석적인 폭력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 폭력은 오직 단 한번, 반복 불가능하고 유일무이한 폭력의 ‘사건’으로 발생한다고 봐야 옳다. 다시 말해, 기원의 폭력은 폭력이라는 사건 속에 생겨남으로써 법 자체와 법의 토대를 창출하는 ‘수행적’ 사건인 셈이다. 문제는 이러한 법정초적 폭력은 ― 정의상 오직 한번이라는 기원의 조건 속에 수행됨에도 불구하고 ― 반복되지 않으면 그 유효성을 상실할 운명이라는 점에 있다. 단지 일회적인 사건으로서 법정초적인 폭력은 정의상 아무런 전제를 깔지 않는다는 점에서 법 바깥에 있지만, 그것이 법으로서 정초되고 기능하기 위해서는 법적 체계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법이 법으로서 인지되고 적용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반복되고 보존되어야 한다. 법보존적 폭력의 기원이 바로 여기 있다.

법을 정초하는 폭력과 보존하는 폭력은 엄밀히 다르다. 전자는 아무런 전제없이 수행적이고 사건적으로 나타났다는 점에서 정의(Justice)의 문제에 깊이 연관된다. 여기서 정의는 ‘사회적’ 정의, ‘사법적’ 정의 등으로 언표되는 조건성을 전혀 띠지 않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무한으로서의 윤리적 함의를 지닌다. 모든 사회적 상징들, 표현들, 담론 및 재현물들이 갖는 경계선들에 대해 딴지를 걸어왔던 데리다에게 여하한의 정의의 담론도 기실 조건의 산물임은, 그래서 보편적일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데리다가 불쑥 들고 나온 ‘정의’(혹은 다시 이야기할 ‘환대’)란 기묘한 울림을 지니기까지 한다. 그에게 정의는 명명 불가능한 것으로서 다른 것들이 명명될 수 있도록 하고, 지금 여기 현전하지 않음에도 동시에 이미 와 있거나 오게 될 절대성의 윤리를 뜻한다는 걸 잠시 지적하도록 하자. 실상 지적될 수 없고, 현시될 수 없는 보편적 정의는, 데리다 본래의 스타일을 따른다면 다만 ‘(빗금친) 정의’라고 쓰여질 수만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의의 다른 글쓰기로서 법. 문제는 정초적 폭력(원리로서의 정의)과 결부된 법과 보존적 폭력에 결부된 법(체계로서의 법적 규칙들)은 서로를 밀어낸다는 사실이다.

혹자는 여기서 “양자를 조화롭게 절충하는 것”으로 모범 답안을 삼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념으로서의 정의, 곧 단수인 법은 절대적이고 무한한 만큼 맥락에 따라 변형되거나 수적으로 증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현실을 제어하는 법의 체계, 현실의 정의는 무조건적 포용에 의해서는 근본적으로 기능할 수 없다. 불가능성과 가능성이 양립할 수 있겠는가? 사건에 논리를 붙여 이해하는 것은 오직 그 사건이 사후적인 의미를 부여받고 난 다음의 일이다. 무한으로서의 정의는 계산 가능한 기대의 범위를 훌쩍 넘어선 사건이며, ‘선물처럼’ 혹은 ‘도둑처럼’ 갑자기 도래할 운명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초의 기원으로서 법정초적 폭력(/정의)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사건’으로서 일어나며 당연히 우리에게 이해되지 않은 채 남겨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식별할 수 있는 법적 체계들, 그에 수반하는 법보존적 폭력은 애초의 기원을 무시하며, 자체 내에 보존된 폭력의 기원을 망각하는 가운데 현존하지만, ‘정의’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는 불가능하단 말인가? 그렇다. 정의는 정의상 현존하는 법의 바깥에 있기에 지금 여기로 불러낼 수 없다. 그런 정의란 없다. 하지만 정의는 정의상 사건적으로 장래에 도래할 것이기에 이미-항상 잠재적인 것으로서 주어져 있다. 그렇다면 ‘정의’는 가능한가? 아니다. 정의를 바로 여기에 불러세우는 순간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다만 정의의 무한성이 헐벗은 채 드러나는 정의의 잔여들, 조건화되고 제약된 정의의 거죽일 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정의는 그러한 불충분한 현시, 잔여들로 구축되는 대체보충을 통해서만 예기될 수 있을 따름이다. 문제는 (무한한) 정의, 곧 (유일한) 법과 법들을 식별할 수 있는 것. 나아가 결단의 순간을 통해 지금 주어진 (보존적 폭력을 통해 지지되는) 법들의 시간을 폐절하고 정의의 순간-사건을 도래하게 하는 것(수행적 폭력을 통한 법의 정초). 그러나 정의의 도래라는 사건은 결코 나/우리 앞에 주어지지[現前] 않는다는 것. 우리는 늘 ‘법’ 앞에 있으면서도 언제나 법의 ‘앞’에 멈추어 있다.

3. 환대, 불가능한 사건을 위하여

정의의 문제는 타자의 문제에 열려있다. 불가능성으로서 정의는 모든 낯설음, 이질적인 것으로서 ‘타자’라 표상되기 때문이다(적극적인 유용함에도 불구하고, 타자를 인격적 실체인 ‘타인’과 동일시할 필요는 없다). 타자의 절대적 외부성이라는 레비나스의 테제가 데리다에게서 “모든 타자는 모든 타자다(tout autre est tout autre)”라는 말과 맞물리는 지점도 여기다. 모든 초월적인 것의 내재적 공속성. 정의는 예측할 수 없이 급작스레 도래하는 사건으로서 타자적이며, 그런 정의를 맞이하기 위해 우리는 타자에 대해 전적으로 개방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렇게 타자에 대한 환대의 문제는 정의의 도래 가능성에 대한 문제로서 우리 앞에 적극적으로 던져져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환대인가? 레비나스식으로 타자에 대해 마치 신을 맞이하듯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환대로 나설 것인가? 혹은 그가 누구인지 묻고 알아보는 절차를 통해(identification), 권리와 의무라는 조건을 통해 맞이할 것인가? 얼핏 ‘모범 답안’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타자에게 무조건 개방되어야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데리다는 근본적으로 무한한 환대가 내포하는 위험을, 그 두려움을 환기시키며 우리들에게 다시 생각해보고 대답하도록 종용한다. “무조건적인 환대는 당신이 타자, 새로 온 사람, 손님에게 무엇인가 답례해 줄 것을 요구하지 않는 것, 심지어는 그 또는 그녀의 신원조차 확인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설혹, 그 타자가 당신에게서 당신의 지배력이나 당신의 가정을 빼앗는다 할지라도,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지만, 그것이 무조건적 환대의 조건이다 ― 당신은 당신의 공간, 가정, 나라에 대한 지배력을 포기한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순수한 환대가 되려면, 그것은 이러한 극한으로까지 고양되어야 한다.”

절대적 환대의 이념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무엇보다도 레비나스의 얼굴의 윤리학에 따른다면) 환대의 진정성은 ‘준다[증여 혹은 선물]’는 행위의 무한함에 있다. 왜냐하면 환대가 진정 윤리의 차원으로 초월한다는 것은 나의 자기성(自己性) 일반을 탈각하는 것, 곧 소유물과 혈연, 명예와 생명, 의식과 무의식까지도 모두 전적으로 타자에게 내어줄 때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절대적인 헌신, 무조건적 관계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환대의 이념이 정의의 무한함과 만나는 지점을 목도한다.

당연히, (정의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환대에는 아무런 조건도 규범도 없다. 그것은 타자를 향한 순수한 개방이며 복종이기에 보편적이며 유일한 법이다. 그리고 이 법과 나란히 우리의 현실을 제어하는 조건적이고 규범화된 환대의 규약‘들’[현실의 법적 체계들, 법들]이 있다. 우리가 타자와 나 사이에 가능한 권리와 의무의 조건들을 규정하고, 상호 관계 속에 서로의 위상을 자리매김하는 것은 후자의 경우지만, 문제는 절대적 환대라는 이념적 지향과 현실의 규약들은 원칙적으로 상호 배반적이라는 점에 있다. 여기엔 단순히 이상과 현실 사이의 ‘수위 조절’이 아니라, 원리적인 이율배반이 걸려있다는 말이다. 만일 환대의 절대성을 믿는다면 어떤 형태로든 환대의 ‘현실적 고려’는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반면, 현실주의적 입장에서 본다면 환대의 절대적 이념이란 다만 동화 속 이상에 불과할 것이다. 환대의 무조건성인가 또는 조건적인 환대인가? 바로 여기에 이념의 법과 현실의 법들 사이의 양립할 수 없는 아포리아가 있다.

만일, 환대의 법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환대를 요구한다면, 여기엔 어떤 규칙이나 약속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선포와 동시에 준행되어야 하는 신의 명령이며, 법을 넘어서는 법이고 또한 법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환대의 법은 환대의 법‘들’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법의 실행이란 언제나 조건적으로 즉, “역사와 지리의 분배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우리는 타자를 환대할 때 늘 특정한 관습과 도덕 감각, 규칙에 의존하지 않는가? 이렇게 환대의 법들은 특정한 현실적 조건들을 통해 나름의 규칙을 세우고 그에 따라 집행된다. 하지만 데리다에 따른다면, 어떻게든 환대가 현실화될 수 있는 까닭은 (무한한 정의가 제약된 정의의 법들을 근거짓듯) 이념으로서 환대의 ‘법(Law)’이 현실로서 환대의 ‘법들(laws)’을 초월적으로 근거짓고 있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우리는 일반의 상식과 통념에 배치되는 기이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절대의 법은 상대의 법들을 요청하고, 상대의 법들은 절대의 법을 위반한다는!

다소 거칠게 논의를 정리한다면, 환대의 윤리는 초월적인 절대의 법과 내재적인 현실의 법들이 서로가 서로를 지탱하는 지렛대 역할을 함으로써 실현된다는 것이다. 물론, 초월의 심급을 인정하지 않는 해체의 기수 데리다가 보기에 진정 초월적인 절대의 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있는 것은 ‘유사(quasi)’ 초월적인 심급이며, 그것이 마치 초월적인 것처럼 작동한다는 사실뿐이다(그러나 이러한 유사 초월적 작동 없이는 현실의 그 무엇도 가능하지 않다는 게 데리다의 해체론의 요지이다). 그래서 환대의 이념은 환대의 법들을 환히 비추고 실현되게 하지만, 또한 그것은 환대의 이념이 하나의 권리로서 현실 가운데 기입된 연후에야 가능한 일이 된다. “한편으로 환대의 무조건적인 법 또는 절대적 욕구와 다른 한편 조건부적 권리·정치·윤리, 이 둘 사이에는 차이가, 근본적인 이질성이 있는데, 그러나 또한 서로 불가분한 성질도 역시 있다. 한쪽은 다른 한쪽을 부르고 내포하고 또는 처방한다.” 그리하여,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두 전제의 동시성을, ‘동시에’의 이율배반으로. […] 그러한 ‘동시에’의 불가능성이야말로 바로 동시에 발생하는 일이다.”

우리는 이념과 현실을 동시에 살고 있다. 길고 지루한 인용과 예를 통해 데리다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환대의 법이 현실의 법들을 조건 짓고, 다시 그 법들이 초월적 법을 실현하는 (유사) 형이상학적 관계가 실재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다만 있는 것은 법/들의 실체성이 아니라, 관계의 실재성 혹은 실재적 관계이다. 절대적인 이념만도 아니요 비루한 현실의 묶음도 아닌, 무조건성과 조건성, 무한성과 유한성의 교차와 상호 기입, 혼성으로서의 관계가 있고, 그 관계는 실제적 작동을 통해서 자신의 실재성을 입증한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역시 묻지 않을 수 없다. 환대는 어떻게?

사실 데리다는 이토록 ‘극악한’ 질문에 어떻게 해야 한다는 실천적인 처방을 내놓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처방이 되고 규칙이 되어 규범화되는 순간, 그렇게 규정된 환대와 정의는 ‘그저 가능한 것’으로서 (조건적인) 현실의 일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해체’와 마찬가지로 환대와 정의는 모델없는 실천으로 정의될 따름이다… 혹은 그게 전부일 뿐인! 하지만 이렇게 뜬구름 잡듯 내미는 환대의 윤리, 정의의 정치가 우리를 만족시켜줄 성싶지는 않다. 데리다의 의도를 십분 존중하여, 그 궁극적 함의를 추구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는 환대와 정의라는 무한한 불가능성, 그러나 실재하는 ‘힘’의 가능성에 관해 좀더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4. 도래할 정치의 시간, 혹은 아포리아를 넘어서

환대/정의는 예측 불가능한 것, 계산할 수 없기에 기대할 수 없는 무망한 것이며 다만 도래의 순간을 결단해야 하는 사건임을 강조했다. 유대 신학적 표현을 빌어 ‘메시아 없는 메시아주의’가 그것이다. 그런데 왜 이러한 무망함 가운데 환대/정의는 있어야만 하는가? 데리다 자신의 해명은 이렇다: “‘정의의 이념’은 그 긍정적 성격 때문에, 교환 없고 유통 없고 재인지/인정 없고 경제적 순환 없고 계산 없고 이성이 없는, 또는 조절적인 제어라는 의미에서 경제적 합리성이 없는 선물의 요구라는 점 때문에 파괴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서 어떤 광기를 재/인지할 수 있으며, 심지어 이를 비난할 수 있다. 그리고 아마도 또 다른 종류의 신비술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해체는 이러한 정의에, 정의에 대한 이러한 욕망에 미쳐 있다. 법이 아닌 이러한 정의는, 학문 제도 안에서 또는 우리 시대의 문화 안에서 사람들이 ‘해체주의’라 부르는 담론으로 제시되기 이전에, 법 안에서, 법의 역사 안에서, 정치적 역사와 역사 일반 안에서 작동 중인 해체의 운동 자체다.”

삶의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우리가 더욱 빈번히, 혹은 전적으로 마주치는 현실은 법들의 역사, 조건화된 환대의 사례들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당혹스런 악몽처럼, 일상의 평온한 감각을 들쑤시고 피흘리게 하는 ‘폭력’으로서 정의와 환대의 이념은 이 계산할 수 없고 따라서 기대할 수 없는 것을 계산하고 기대하도록 추동한다.

데리다는 정치화가 학문과 생활, 정치, 이념 등 도처에 세워진 기존의 경계선들을 의문에 붙이고 되묻는 작업, 곧 해체하는 과정임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의 습관과 안온함을 위해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던, 달리 보거나 생각해 보길 귀찮아마지 않아하던 모든 코드들, 경계들에 대한 의문의 급진화가 바로 데리다의 해체이며 ‘정치화’인 것이다. 인접하지만 경계지어진 것들을 끝까지 캐묻는 것, 끊임없이 되생겨나는 경계(코드, 규칙, 법)들을 확장해 나가는 것, 그리하여 “어떤 법 제도 안에 잠재적으로 현전하고 있는 폭력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면, 그 제도는 타락하고 만다”는 것을 염두에 두며 모든 존재하는 것을 정지시키는 혁명적 폭력의 순수 상태에 이르게 하는 것. 그러나 또한 동시에 “순수한 폭력이 어떤 특정한 경우에 실현될 지 결정하는 것은 인간에게는 가능하지도 절박하지도 않음”을 직시하는 것. 무엇보다도 정의이자 환대로서 도래하는 폭력은 ‘주권적’이라 불릴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정의 앞에’(이미 정의 ‘안’에 있으되, 그러나 오직 ‘밖’에서만 말할 수 있는) 서 있는 것은 아닌가?

데리다의 논의는 흔히 ‘아포리아’로 규정됨으로써 봉합되는 경향이 있다. 현실 속에 온전히 정위시킬 수도 없고 이념의 차원에 돌려놓을 수도 없는, 불가능한 가능성 혹은 가능한 불가능성이란 역설이 데리다를 아포리아에 가두어놓는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해석이 더 자주, 그리고 본질적으로 놓치고 있는 것은, 아포리아는 아포리아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아포리아의 봉합은 말 그대로 현실이라는 경계 속에 정의와 환대, 정초적 법의 폭력이라는 일체의 불가능성을 봉인해 버리는데 지나지 않는다. 아포리아가 현실을 돌파하고 불/가능한 역설을 역설 그 자체로 작동시키는 것은 그것이 낯선 사건으로서 지금-여기서 발생하고 있을 때다. 법을 정초하고, 이방인을 맞아들이며, 폭력이 피를 부르고 있는 순간이다. 아포리아라는 레토릭을 뚫고나와 예기치 않았고 때론 감당할 수 없는 낯섦으로서 현재화하는 순간이다. 어떠한 경계의 지표에 의해서도 규정되지 않는 순수한 날것의 시간, 그것이야말로 도래할 정치의 시간, 바로 혁명이라는 사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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