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정치의 사유

알튀세와 우발성의 정치

- 만세

1. 정치와 혁명

정치란 교과서적으로 말하면 희소한 자원을 배분하는 과정이다. 오늘날 현실 정치가 궁극적으로 어느 곳에 돈과 영향력이 배분되어야 할지 결정하는 투쟁 혹은 교섭인 것은 그 때문이다. 맑스주의는 이런 정치를 늘 혁명과 연계한다. 혁명이야 말로 희소한 자원을 가장 극단적으로 재배분하는, 나아가 무엇이 희소하고 귀중한지에 대한 관념을 바꾸어버리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맑스주의자가 정치를 실천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혁명의 전망과 닿아 있어야 한다. 누군가가 실천하는 정치가 장기적으로나마 혁명과 닿아 있지 않다면, 그는 정치를 하지 않고 있거나 맑스주의자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루이 알튀세는 대표적인 맑스주의자이다. 『맑스를 위하여』라는 주저의 제목이 보여주듯, 평생을 맑스주의자로서 사유하고 맑스주의를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그가 생각한 혁명과 정치는 기존의 맑스주의자들의 그것과 아주 달랐다. 기존의 통상적 맑스주의에서 혁명은 모순의 폭발을 통해 일어난다. 양립할 수 없는 계급 간의 대립이 커다란 사회적 변혁을 낳는다는 말이다. 이런 모순은 경제의 영역에서 형성된다. 물론 이데올로기나 법 혹은 제도 정치의 영역에서도 대립이 일어나지만, 그것들은 이런 경제 영역에서 형성된 핵심 모순의 반영이며 표현이다.(상-하부 구조론) 그렇기에 혁명을 위해서는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나는 대립의 근원인 경제 영역의 모순을 간파하고, 이를 둘러싼 싸움에 참여해야 한다. 요컨대 경제주의와 단일모순론이 통상적 맑스주의 혁명 정치의 핵심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은 이런 도식과 거리가 멀었다. 이에 따르면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경제 영역의 모순이 팽배해져 혁명의 가능성이 높아져야 하는데,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혁명의 가능성은 없어져갔다. 거꾸로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했던 러시아는 당시 전형적 농업 국가였다. 경제적 모순을 둘러싼 싸움은 간헐적으로 일어났지만, 그것이 전 사회의 변혁으로 이어지는 일은 드물었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적당한 수준의 임금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에 만족하고 안주하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레닌이 멘셰비키를 비판한 주된 이유는, 멘셰비키가 자생적 경제투쟁에만 집중함으로써 경제투쟁에서 나타나는 이런 보수적 경향을 용인했기 때문이었다.

알튀세는 이런 기존의 맑스주의를 통렬히 비판한다. 단순히 그것이 현실과 다르기 때문만이 아니다. 알튀세가 보기에 단일모순론과 경제주의에 입각한 맑스주의는 맑스의 논의를 헤겔의 아류로 취급한다. 알튀세의 설명에 따르면 헤겔은 세상 모든 것을 절대정신의 외화나 반영으로 이해한다. 세계에 일어나는 변화는 절대정신이 자신을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다. 이런 논의는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다양한 사건을 하나의 논리와 방향으로 환원한다. 언뜻 보면 발전에 역행하는 사건들도 알고 보면 절대정신의 완성에 기여하는 일들이라 여긴다. 그 결과 각각의 요소나 사건들은 그것들이 갖는 특이성이나 차이를 잃어버리고 동일자로 환원된다.

경제주의와 단일모순론에 입각한 맑스주의는 이런 헤겔의 난점을 그대로 반복한다. 절대정신 대신 경제나 경제적 모순이 들어섰을 뿐, 이런 맑스주의 역시 세계의 모든 것을 하나의 논리로 환원한다. 어떤 영역에서 대립이나 문제가 생기든 그것은 경제적 영역에 존재하는 모순의 반영이다. 가장 시급한 것은 이런 경제적 모순을 급진화 하는 것이기 때문에 경제 이외의 문제는 부차적으로 여겨진다. 이런 태도는 헤겔의 논리를 그대로 보여준다. 물론 이는 정신 대신 물질을 근본적 동인으로 여긴다는 점에서 헤겔과 다르다다. 맑스주의가 “헤겔을 거꾸로 세운다”고 자부하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선다고 헤겔이 헤겔이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알튀세는 헤겔을 거꾸로 세우는 것만으로는 맑스의 고유한 세계관을 표현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헤겔을 뒤집어도 맑스가 되지는 않는다


2. 항상-이미-구조화 된 복합체

알튀세는 맑스를 헤겔에게서, 혹은 헤겔적 사유방식에서 구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경제주의와 단일 모순론을 폐기한다. 그리고 경제주의 대신 각 영역의 상대적 자율성을, 단일 모순론 대신 복수의 모순들이 과잉결정되는 모델을 주장한다. 알튀세가 보기에 경제라는 영역 혹은 심급은 결코 모든 영역을 아우르는 결정적인 힘을 가지지 못한다. 법이나 이데올로기 혹은 문화의 영역들은 각자 나름의 상대적 자율성을 갖는다. 이를 억지로 경제에 끼워 맞추면 우스꽝스러워질 뿐이다. 예를 들어 언어가 경제 변화에 따라 좌우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한다.

단일 모순이 폐기되는 것도 이와 비슷한 맥락이다. 영역별 자율성이 있다면, 대립이나 투쟁 역시 다양한 영역에서 존재할 수 있다. 젠더의 대립이나 민족의 대립이 존재할 수 있다. 위계나 권위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과 자율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들 사이의 알력이 존재할 수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투쟁이 존재할 수 있다. 물론 이런 것들이 경제적 모순과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결코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경제적으로는 억압받는 남성 노동자들이 가정에서는 가부장적 지배를 실천하는 사례는, 세계에 서로 환원 불가능한 무수한 대립이 존재함을 잘 보여준다.

알튀세가 보기에 혁명은 이런 여러 모순들이 응축되어 과잉 결정(over-determination) 될 때, 즉 겹쳐서 상승효과를 일으키며 작동할 때 일어난다.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혁명이었던 68혁명을 보라. 전 세계를 휩쓴 이 혁명은 결코 하나의 모순으로 설명될 수 없다. 거꾸로 그 소용돌이 안에는 서로 환원 불가능한 무수한 대립과 모순이 존재했다. 그것에는 물질적으로는 오히려 풍요롭게 자란 대학생들의 ‘반 권위’라는 전선도 있었고, 노동자들의 ‘자율성’ 이라는 문제도 있었으며, 여성 해방의 주제도, 성 소수자에 대한 문제의식도 존재했다. 그것들이 서로 겹치고 응축되었을 때, 서로 공감하고 증폭되었을 때, 전 세계를 뒤흔드는 혁명이 발생했다.

물론 각각의 모순이 늘 완전히 동일한 무게감을 가지고 작동한다는 말은 아니다. 국면 마다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모순이나 대립이 분명 존재한다. 경제 영역의 대립이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주요 모순으로 기능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주요 모순 혹은 결정적 영역이라 해도, 다른 모순 혹은 부차적 영역 없이 작동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나의 모순이나 영역은 다른 모순이나 영역을 존재조건으로 삼고 있다. 예를 들어 경제적 영역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라는 영역이 필수적이다. 학교나 감옥 같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가 주체의 정체성을 설정하고 적합한 역할을 교육시키지 않는다면, 경제는 운영 불가능하다.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누군가는 노동자로서의 인식과 능력을 가지고 누군가는 자본가로서의 심성과 태도를 지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경제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대립은 이런 이데올로기적 차원에서의 불화나 대립을 조건으로 갖는다.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가 균열을 일으키고 실패하지 않는다면, 노동자가 체계에 저항하려는 생각을 품기란 쉽지 않다. 거꾸로도 마찬가지이다.

알튀세는 『맑스를 위하여』라는 책에서 세상은 항상-이미-구조화 된 복합체라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영역별 자율성은 각 영역이나 모순이 서로 독립적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각 영역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상호 존재 조건으로 기능한다. 어떤 영역이나 모순이 해당 국면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한다 해도, 그것들은 언제나 다른 영역/모순과 연계된 상태에서 작동한다. 순수한 경제, 순수한 법, 순수한 문화, 순수한 이데올로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서로는 서로를 조건으로 삼으면서 복잡하게 착종되어 있다. 그렇기에 어느 한 영역이나 모순을 단일한 기원으로 삼아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항상 실패할 수밖에 없다. 대신 기원에서부터 복잡하게 얽혀 있는 복합체를 고려해야 한다.


3. 우발성의 정치

만약 세계가 역동하는 방식이 알튀세가 말한 바와 같다면, 우리는 어떤 형태로 정치를 실천할 수 있을까? 쉽게 대답하기 힘들다. 답을 알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 많은 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알튀세가 주장한 것처럼 세계의 영역들이 서로 독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착종되어 있다면, 우리는 수많은 출발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어떤 영역에서 시작하든, 그것을 넘어서 다른 영역의 문제와 대립에까지 개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물론 국면 마다 주요 모순이나 대립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에 무수한 다른 영역이 착종되어 있다면, 주요 모순에 접근하는 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2008년 촛불 시위의 주요한 모순은 건강권을 둘러싸고 형성되었지만, 거기에 접근하고 개입하는 방식은 모두 달랐다. 누군가는 정치적 주권의 관점에서, 누군가는 자본의 폐해라는 관점에서, 누군가는 귄위적 의사소통이라는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했다. 그리고 각각의 문제제기는 모두 나름의 효과를 가졌다.

말년의 알튀세는 자신의 철학을 ‘우발성의 유물론’ 혹은 ‘마주침의 유물론’이라 불렀다. 유물론은 정신에 대한 물질의 우월성을 주장한 철학이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단일한 기원이나 목적을 거부하는 태도라는 주장이었다. 이런 철학적 주장이 경제라는 단일하고 궁극적 기원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이나, 사회주의라는 필연적 유토피아를 가정했을 때 생기는 문제점에 대한 지적과 긴밀히 연동되어 있음을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를 따라 알튀세의 정치를 필연적 과정 바깥에서 작동하는 ‘우발성의 정치’라고 이름 붙여보는 것은 어떨까? 알튀세는 필연적이며 궁극적이라 여겨진 영역 바깥에서도 정치가 가능함을 주장한다.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 이라는 알튀세의 말은, 순수한 이론의 영역에서도 정치가 가능함을 보여준다. 정확히 말해 이는 가능할 뿐만 아니라 필요한 일이다. 만약 정치나 혁명이 더 나은 삶을 위해서라면, 그 더 나은 삶이 세계의 여러 문제와 대립을 세심하게 파악하고 이를 변화시킴으로써 가능하다면, 이미 알려진 모순과 대립 바깥에서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분명 이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진 혁명의 길과는 다른 낯선 길을 걷게 할 것이다. 거기서 무엇과 우연히 마주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두려울 수도 있고 혼란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만큼 설레고 신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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