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정치의 사유

푸코와 문제화의 정치

- 만세

1. 도발

“이론 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성은 어떤 경우에도 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성폭행(rape)을 처벌한다면, 그것은 물리적 폭력을 처벌하는 것이지 그것 이외의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원리적으로 말해, 주먹을 다른 사람의 얼굴에 박아 넣는 것이나, 성기를 다른 이의 성기에 박아 넣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다.”

성폭행이 물리적 폭력과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적잖이 당혹스러운 이 말은, 보수꼴통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 성(sexuality)이라는 범주에 깊은 통찰력을 가졌으며,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이 문제적 발언의 주인공이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성폭행에 관한 법안을 개정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성을 좀 더 중요한 법적 대상으로 부각시키고, 성 범죄를 여타 범죄와 다른 논리로 다루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푸코는 이런 일련의 시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이런 푸코의 반응은 그에게 호의적인 이들조차 당황하도록 만들었다. 소위 ‘좌파적 상식’에 비추어 봐도, ‘성’을 특별하게 여기고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푸코는 대체 왜 그랬을까? 푸코가 심각한 마초였다고 가정하지 않는다면, 그가 성에 대해 가졌던 독특한 입장이 이런 반응을 낳았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푸코에 따르면 성은 역사적인 범주이다. 성을 ‘특별한’ 대상으로, 법적으로 따로 취급할 만큼 ‘소중한’ 대상으로 여기는 것 자체가 근대에 일어난 일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는 특정한 권력을 작동시킨다.

주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우리들의 성'에 대한 교육 포스터. 푸코는 성을 이처럼 아름답고 소중하고 특별하게 취급하는 것 자체가 권력 효과를 불러온다고 지적한다

알다시피 근대 사회에서 성은 누군가의 본질을 드러내는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식습관을 근거로 사람의 인격이나 성격을 판단하는 일은 드물다. 하지만 누군가가 평범하지 않은 성적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그가 정상적인 주체인지 의심한다. 거꾸로 누군가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면, 그 사람의 성 생활에 심각한 왜곡이 있을 거라 추측한다.(ex. 저런 인간은 분명 밤에 변태적 행위를 일삼을 거야!) 이처럼 성은 한 사람에 대한 진실을 알려주는 은밀하면서도 궁극적인 무언가다.

푸코에게 이는 역사적인 일이다. 예를 들어 고대 그리스 시대에 성은 다른 것에 비해 특별히 중요한 대상이 아니었다. 성을 둘러싼 규약이나 제언이 존재했지만, 그것은 식사나 수면 등 삶의 전반을 관리하는 양생술의 일부일 뿐이었다. 성이 특별한 영역으로 부상한 것은 근대의 독특한 사회적 실천 덕분이었다. 기독교의 고해성사, 그러니까 성과 관련된 실천을 행위만이 아니라 의식과 욕망의 흐름까지 추적해 정기적으로 신부에게 털어놓는 ‘고백’이라는 실천의 일반화가 대표적인 예다. 이런 과정의 반복을 통해, 성은 인생에서 뭔가 중요하고 본질적인 영역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단순히 주목만 받은 것이 아니었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만큼, 성에서 바람직하고 적절하다고 여겨지는 형태와 그렇지 않은 형태가 구분되기 시작했다. 도착적 성의 종류(즉 여러 가지 변태들)를 세세하게 분류한 정신의학의 등장은 이것의 원인임과 동시에 결과다.

이런 변화는 성을 둘러싼 실천은 물론, 일상 전반에 대한 감시와 통제마저 가능하게 만들었다. 성이 중요한 영역으로 부상하면 할수록 자신의 성 생활을 돌아보고 그것을 검열하거나 고백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다. 사람들은 ‘적절한 성행위’나 ‘정상적 욕망’이라는,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답안지에 자신과 타인을 끼워 맞추려 안간힘을 쓸 것이다. 자위를 못하게 한다며 아이를 24시간 밀착 감시하는 어머니의 모습이나, 성 범죄를 억제하기 위해 온 동네에 CCTV를 설치하는 국가의 모습은, 이것이 단지 성적 실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성이라는 영역을 축으로 광범위한 영역에 대한 통제의 시도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성이라는 것이 중요하고 소중하다고 여겨지면 여겨질수록, 성을 통한 통제 역시 강화되는 셈.

푸코의 시각에서, 법적으로 성은 특별한 영역이라고 인정하는 일은 이처럼 은밀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권력을 공인하고 확정하는 일에 다름 아니었을 것이다. 성폭행이 일반적 폭행과 무엇이 다르냐는 푸코의 질문은, 아마도 성이라는 범주자체의 역사성과 그것이 가지는 통제효과를 지적하고, 이를 보다 강화하려는 국가적 시도를 고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2. 들쑤심, 혹은 문제화의 정치

더 재미있는 것은, 그렇다고 푸코가 이런 법안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역시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푸코의 입론에 비추어 봐도, 성폭력을 일반적인 폭행과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다. 푸코의 말은 성이 환상이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역사적 실천에 근거하는 만큼 성은 분명한 실제적 효력을 가진다. 근대인에게 성은 실제로 중요하다. 성폭행은 일반적 폭행보다 분명 더 깊은 상처를 남긴다. 이런 상황에서 무조건 법을 철회하는 것은 피해를 방기하는 무책임한 처사다.

데모하는 푸코. 그는 인생 자체가 '들쑤심' 이었다

결론적으로, 문제적 상황에 답은 제시하지 않은 채 상황만 들쑤셔 놓은 꼴이다. 하지만 이런 들쑤심은 어설픈 답을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큰 효과를 낳았다. 사람들에게 사유를 강제하는 효과가 그것이다. 푸코의 이런 들쑤심 덕분에 사람들은 중립적이라 생각했던 자신들의 합리성이나 지식을 통해 권력이 작동할 수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현실정치가 제시하는 선택지, 예를 들어 방치할 것이냐 법적으로 보호할 것이냐 같은 양자택일적 답안지를 넘어 스스로 사유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성폭행과 관련한 토론회가 열렸고, 사람들이 의견을 내놓기 시작했다. 답 없는 들쑤심이 사람들을 ‘상식’에 기초한 판단에서 벗어나 보다 능동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었던 셈이다.

사실 푸코의 작업 전체가 이런 ‘들쑤심’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푸코는 말년에 자신의 작업을 요약하며, 자신의 방법이 “보편이 없다고 가정하는 것”(suppose universal do not exist)이었다고 말한 바 있다. 푸코는 사람들이 당연히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이성’, ‘비행’, ‘성’과 같은 보편적 범주들을 의심한다. 그리고 어떤 역사적 실천과 관계가 그것을 만들어내었는지 탐구한다. ‘광인의 감금’(이성 형성)이나 ‘범법자의 구금’(비행 형성) 혹은 ‘성적 실천의 고백’(성 형성)이라는 실천의 발견은 그 탐구의 결과였다.

그리고 푸코는 이렇게 형성된 범주들이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특정한 권력 현상의 핵심적 축임을 밝혀낸다. 예를 들어 푸코에게 이성이라는 범주는 사회가 그 성원들이 특정한 형태의 사고방식을 가지도록 통제하는 수단이 된다. 여기서 벗어나는 자는 이성의 능력이 없는 ‘환자’라는 이름으로 정당하게 감금된다. 비행이라는 범주는 생활습관이나 태도가 범죄성을 형성한다고 가정함으로써, 그것들을 형벌과 교정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도록 한다. 학교처럼 감옥 이외의 공간에서조차 게으름이나 나태함이 정당하게 규제될 수 있는 것은, 그것들이 범죄성과 연결된다고 여기게 하는 ‘비행자’라는 범주 덕분이다.

성폭행 관련 법안에서 그랬듯이, 푸코는 어떤 저작에서도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문제라 여기지 않은 곳에서 문제를 찾아내는 푸코의 물음은, 사람들이 기존의 사유의 틀에서 벗어나 물음을 던지도록 만들었다. 예를 들어 개인이 18세기 감옥이나 수도원에서 효율적 통제를 위해 도입된 역사적 단위라는 푸코의 주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장이라는 전통적인 정치적 주제를 넘어, 개인을 극복하는 단위의 창출(ex. 코뮨)이나 개인의 권리를 뛰어넘는 새로운 문제(ex. 사회권, 결사권)를 고민하도록 만들었다. 푸코가 섣부른 방향 제시를 삼가고, 의도적으로 자신의 역할을 ‘문제제기’에 한정한 것은, 바로 이런 ‘능동적 사유의 촉발’을 극대화하기 위함이었다.

푸코에게 정치가 있다면, 그것을 ‘문제화의 정치’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푸코는 답이나 결론을 제시하는 대신 지금의 구도를 뒤흔드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한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거나 자명한 앎이기에 권력과 상관없다고 여긴 장소에서 반드시 대면해야 할 중요한 정치적 문제를 찾아낸다. 정치라 여기지 못한 것에서 정치를 발견하는 것. 이를 사유함으로서 지금의 정치를 뛰어넘는 정치를 작동시키는 것. 각자의 입장에서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를 길러내는 것. 아마 이것이 수많은 영역을 가로지르며 푸코가 실천하려 했던 ‘문제화의 정치’일 것이다.

3. 주권과 미시권력

이런 ‘문제화’ 혹은 ‘문제화의 정치’가 실제로 힘을 가지고 있는지 의문을 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표면적으로는, 특정한 대안 없이 문제제기를 일삼는 것에 불과해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장기적으로 푸코가 말한 효과가 나타날 가능성이, 그러니까 지금 존재하는 틀을 깨고 다른 형태의 정치가 시도될 가능성이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단기적으로는 보다 더 중요한 정치적 문제를 가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대선 정국에서 누군가가 선거가 가지는 한계나 학문이 가지는 효과를 지적하는 ‘문제화’를 실천한다면, 그는 지엽적인 문제에 치중함으로써 보다 시급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고 있다고 비판받을 것이다.

하지만 푸코는 정치가 작동하는 근본적인 영역이나 다른 곳보다 권력이 보다 더 집중된 장소를 떠올리는 것은 권력에 대한 잘못된 가정에서 기인한다고 비판한다. 이는 푸코가 전통적 권력이론인 ‘주권이론’을 비판하고 자신의 ‘미시권력’이론을 정립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 통상 우리는 주권이라는 가정에 따라 권력이 발휘되는 ‘중심’을 가정한다. 그 중심은 주체일 수도 있고, 자리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교실에서는 선생님이, 병원에서는 의사가 권력의 중심인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쉽게 이런 ‘권력자’나 ‘권력의 지위’로부터 권능이 발휘된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나 의사가 지배자로서 권한을 행사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푸코가 보기에 지배자의 권한은 지배자가 피지배자와 맺는 관계 때문에 발생한다. “권력은 네트워크다.” 예컨대 병원에서 의사가 힘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환자와의 관계 덕분이다. 즉 환자들이 스스로 의사의 말을 ‘진리’로 여기고 따르기 때문에 의사는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 이런 관계는 의사와 환자가 공유하고 있는 ‘의학담론’, 그러니까 병에는 특정한 원인이 존재하고 특정한 자격과 도구를 갖춘 이가 이를 식별할 수 있다는 특정한 앎에 의해서 만들어진다. 즉 지배자가 행사하는 권한은 그가 권력을 ‘가졌기’ 때문도, 특정한 지위가 신비하게 그것을 발동시키기 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맺는 관계가, 그것을 일정한 형태로 유도하는 앎이나 기술이 이런 권력 현상을 발생시킨다.

미시권력은 바로 이처럼 권력이 발생하는 관계를, 피지배자뿐만 아니라 지배자의 사유와 행동양식까지 규정하는 특정한 합리성이나 기술을 세밀하게 살피는 태도를 의미한다. 오해하지 말길. 이는 ‘주권자’로 불리는 이들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당장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사업이라는 자연파괴를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추진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런 권력이 대통령이 ‘가진’ 권한이라고 가정해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대통령과 시민들이 공유하고 있는 ‘개발지상주의’와 같은 특정한 형태의 합리성에 주목해야 한다. 4대강 사업이 가능한 것은, 대통령과 시민들을 관통하는 이런 합리성이 그 사업을 ‘삽질’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갈 길’로 재현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력한 권한자라 해도 이런 합리성 위에서 움직이지, 이를 거스를 수는 없다.

즉 푸코의 ‘문제화’는 사소한 영역에 대한 지엽적인 문제제기가 아니다. 반대로 권력이 작동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영역을 다루며, 그렇기에 오히려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왜냐하면 푸코의 문제화가, 미시권력론에 따르면 권력현상에 아주 핵심적인 영역(ex. 역사적 합리성, 상식, 기술)을 정치의 대상으로 부각시키고 다루기 때문이다. 나아가 ‘문제화의 정치’는 정치를 우리에게 아주 가까운 것으로, 우리가 직접 참여하고 개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낸다. 정치가 특정한 권력 현상에 개입하여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그리고 다름 아닌 내가 만들어내고 공유하는 합리성과 앎이 권력을 만들어낸다면, 나는 보다 직접적으로 권력에 개입할 수 있지 않은가?

어린이 책까지 확산된 자기계발서 붐. 오늘날 세계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우리가 읽고 있는 자기계발서 덕에 작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주권이론의 관점에서 신자유주의라는 권력현상에 접근하면, 그것을 불러온 것은 월스트리트에 모여 있는 다국적 기업과 은행이다. 그들의 막강한 초국적 권한이 신자유주의를 낳았다. 하지만 이 경우 다국적 기업이라는 주권자가 내게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영향을 미치는지, 여기에 개입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그들은 막강한 힘을 가진 채 내가 닿을 수 없는 너무나 먼 곳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반면 미시권력론에 근거한 ‘문제화의 정치’라면 차라리 여기서 ‘자기계발’ 같은 신자유주의적 주체를 길러내는 기술에 주목할 것이다.

초국적 기업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작동하기 위해서는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계발’ 같은 기술과 담론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되어야 한다. 국가나 기업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을 넘어, 능동적으로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고 유휴자금을 여기 저기 투자하는 주체가 있어야만, 초국적 투자 업체가 존재할 수 있다. 이런 ‘문제화의 정치’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라는 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자기계발’처럼 바로 내 옆에서 작동하는 담론과 기술을 변형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다. 권력이 주권자의 권한이 아니라,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맺고 있는 관계에 따라 작동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런 실천은 생각보다 큰 효과를 낳을 것이다.

4. 능동적 윤리를 위하여

주권과 같은 투박한 정치적 구도를 벗어나는 것.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지만 이제껏 간과된 여러 영역을 문제화하는 것. 이것들을 통해 작동하는 미세한 권력을 파악하고, 어떻게 하면 이를 바꾸어낼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이를 위해 저 멀리 있는 권력자가 아닌, 내가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관계와 합리성에서부터 시작하는 것. 아마 이것들이 푸코가 ‘문제화의 정치’를 통해 일으키고자 한 효과일 것이다.

평생을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던 푸코가 마지막으로 ‘문제화’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윤리’였다. 그는 사람이 어떤 윤리를 가지느냐에 따라, 즉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규제하느냐에 따라 특정한 권력이 행사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근대의 성 윤리는 특정한 행위의 형태를 기준으로 정상/비정상의 도식을(정상적 체위/변태적 체위) 설정하고, 그것을 초월적 규칙으로 선포함으로써 작동한다. 이 윤리를 내면화한 주체는 알아서 사회적 기준에 따라 자신을 규율하고 통제하는 수동적 존재가 된다. 푸코는 현대사회의 권력이 사람을 억압하는 대신 특정한 방식으로 길러낸다고 지적한다. 푸코의 권력을 ‘생명권력’이라 부르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리고 근대적 ‘윤리’는 이를 달성할 수 있게 하는 핵심적 요소이다.

하지만 푸코는 이런 방식으로 기능하지 않는 윤리의 가능성 역시 모색한다. 그가 말년에 고대 그리스/로마의 성 윤리에 주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들의 윤리는 정상/비정상 도식 대신 절제/과다의 도식을 기준으로 작동했다. 고대인들 역시 성행위를 삼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부부간 정조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것은 성행위가 악이라거나, 혼외정사가 비정상이라는 인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무분별한 성행위를 삼갔던 것은 쾌락에 휩싸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 부부가 정조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상대를 서로의 자제력을 훈련하는 훈련 파트너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꾸로 쾌락에 휩쓸리지 않고 그것을 활용하여 삶의 기쁨을 늘릴 수 있다면, 통상적 금지를 넘어 성행위를 하는 것도, 혼외 성 관계를 하는 것도 원칙적으로는 허용되었다. 즉 이들의 윤리는 주체가 초월적 법칙에 복종할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대신 주체에게 상황에 따라 능동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푸코는 이를 ‘자기배려의 윤리’라고 부른다. 사회에서 주어지는 법칙에서 벗어나 자신을 능동적으로 배려하고 사랑하는 윤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윤리를 함양한 주체는 오늘날 작동하고 있는 자기계발하는 주체와 질적으로 다르다. 자기계발하는 주체 역시 명령을 수동적으로 듣는 존재가 아니다. 대신 능동적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자신을 관리한다. 하지만 그는 무엇을 돌보고 배려해야 할지에 대해서, 즉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할지에 대해서는 고찰하지 않는다.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자기계발서와 지인들의 닦달에(목표를 가져라! 꿈을 가져라!) 적당히 남들이 가지는 목표(ex. 10억 벌기)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경주한다. 하지만 고대의 자기배려는 그 목표를 철저히 성찰하면서 시작된다. 자기배려에서 배려의 대상은 재산도 권력도 명예도 아닌 ‘영혼’이라는 당대의 가르침은 이런 성찰을 잘 보여준다. 자기배려를 앞장서 실천했던 디오게네스가 종종 광장에 나가 자위를 했던 것은, 자기배려를 위해 불필요한 명예나 허례허식을 버려야 한다는 점을 말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푸코는 어떻게 해야 이런 윤리를 사회에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지 말하지 않는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런 사회는 지도자의 좋은 프로그램에 의해 달성되지 않는다. 이런 윤리는 지도자의 프로그램에 따르는 ‘신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거꾸로 모든 성원들이 자신의 삶의 지도자가 될 때, 그럼으로써 능동적 주체로 변할 때에 비로소 이런 윤리가 가능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변혁 프로그램을 통해서가 아니라, 모든 성원이 자신의 상황을 능동적으로 사유하여 나름의 계획을 제출함으로써 이루어진다. 푸코가 제시하는 그리스/로마의 사례는, 이를 위해 참조할 수 있는 사례일 뿐이다.

‘문제화’ 혹은 ‘문제화의 정치’는 아마도 푸코가 평생에 걸쳐 실천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끌어들이려한 ‘능동적 윤리’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르겠다. 기존의 정치의 구도에서 벗어나 간과된 삶의 영역을 ‘문제화’하는 ‘문제화의 정치’는, 결국 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능동적 자세이자 이를 위한 훈련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던져준 답안지로 서로를 채점하지 않는 것. 주어진 문제를 풀기보다 스스로 문제를 제시하는 것. 내 사유의 틀은 물론이고 친구의 사유의 전제마저 들쑤시는 것. 이를 통해 내 삶을 좌우하는 권력을 파악하고 이를 변형시키는 것. 좋은 삶을 살아가는 것. 이제 푸코의 눈을 빌어, 푸코보다 멀리 나아갈 때다.

-만세(수유너머N)

응답 7개

  1. 다시민지말하길

    문득 생각난게 있어서 다시 들러 씁니다. 위 글과 큰 관련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자기계발’의 치열한 현장(?)과 거리가 좀 있는 삶을 살고 있는지,
    옛날 생각을 못했는데 말이지요. 올챙이 적 생각 못하는 거죠.-.-

    최근 뉴스를 흝다가, 뭐라도 스펙 하나 더 쌓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대학생들의 삶이 생각이 났습니다.
    자신이 시장가치가 있는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삶이 곧 스펙쌓기화 되어가는 것에 대해 참…
    그때 절박하다는 이유로, 낯설고 싫으면서도
    그 불편함을 꾸역꾸역 소화하려고 애쓴적도 있더랬지요.
    몇 번 써보았던 자기소개서의 단어들이 어찌나 쓸쓸하던지.
    이럴 수도 없던 저럴 수도 없던, 치기와 울분으로 가득차있으면서도 어른인척 해야 했던, 한편으론 데카당했던 시절을 돌이켜보면,

    네. “자기계발서를 꼭 그렇게 봐야 할까”라는 식으로 쉽게 이야기할 게 아니었어요.
    정말 숨이 막혔었거든요.

    그런데,
    예를 들어 중고등학교를 졸업하지 않아 소위 늦은 나이에 새로 공부를 시작하고 뭔가 자신의 삶에 애착을 가져보려는 친구들이
    제 주변에 있습니다. 저는 이들을 응원하는 축에 속해 있습니다.
    이들과 위에서 말하는, 사람들의 ‘자기계발’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큰 차이가 있을까요? 있다면 어떤 차이가?
    권리로서의 교육,이나 사회구조가 만들어내는 욕망의 차원에서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라…
    (갑자기 이규보의 ‘슬견설’이 생각나는군요 끙)
    뭔가 감각적으로 다르게 느껴지긴 하는데, 딱 구분해서 설명하기가 참 그래서
    혼자 곰곰 생각해보고 있는 저녁입니다.

  2. 승욱말하길

    트위터에서 현민 얘기 보고 들어왔다가 얼떨결에 여기까지~ 잘 읽었어요. 얼마전에 ‘아동성폭력 범죄와 강화되는 처벌?’ 이었나, 아무튼 인권활동가들과 관심있는 학자들 토론회가 있었는데. 그 날 뒷풀이 때 활동가들과 왜 ‘성’폭력은 특별히 더 아프고, 특별히 더 처벌되어야할까 이런 얘기를 했었어요. 반성폭력 운동이라는 것은, 성폭력이 없어지라고 하는 운동이 아니라,(사실 폭력/권력관계가 없어질 수는 없고) 그것이 일반적인 폭력(혹은 교통사고)과 별로 다르지 않게 느껴지고 취급되도록 하는 운동이 아닐까, 등의 얘기

    “버라이어티 생존 토크쇼”라는 생폭력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다큐로 만든 감독님도 비슷한 얘기를 했더래요. 그래서 이 영화 좀 보고 싶었는데, 만세도 관심이 있을 듯. 수유에서 상영회하고 감독과의 대화를 해도 재미있겠군요. (응?)

    한편, 민지님이 말씀하신 것이 저도 늘 고민인 것 같아요. 푸코가 들쑤시고 보여주는 것을 잘 보면서 이해하고, 내가 맺고 있는 관계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것에 신나서 뭐라도 해보고. 하지만 뭔가 그 사이에 하나의 선분이 더 필요한 것 같은 느낌이 있기도 해요. 뭐 역시 살면서 계속 고민하고 행동해야 하는 문제이겠지만.

  3. 민지말하길

    글 잘 읽었어요. 호올~ 그래서 그리 자기계발서를 열심히 읽었구나!
    근데 푸코를 제대로 공부해 본적은 없지만, 예전에 대충 흝어봤을 때는 너무 막막해서 짜증이 났었어. 그래서 뭐 어쩌라구? 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음. 예를 들어 MB정부의 4대강사업, 혹은 도시재개발을 비판하는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합리성’을 성찰한다 –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도사리고 있는 좀더 ‘넓고 좋은’ 집, 공간에서 살고자 하는 욕망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인식한다 -쳐, 그래서 좀더 가까이에 있는 권력을 인지하고 미시적 영역에서 실천한다 쳐, 그런데 여전히 4대강사업, 도시재개발은 계속되거든요…ㅠㅠ 권력에 개입한다는 말이 좀 거창, 혹은 왜소하게 느껴진다고나 할까… 위 글에 따르면 그건 ‘권력에 대한 잘못된 가정’ 때문이겠지만, 그 가정이 현실을 지배하고 인식하는 틀거리가 되어있는 상황에서 단지 그렇게만 치부할 수 있을까?
    그런 권력의 흐름이 미시, 거시를 넘나들며 삶을 통제하는 것은 사실이겠지. 그래도 푸코 차원에 얄팍하게만 머물러있으면, 권력 역학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뻘소리 날리기 쉽상이라고 생각함. (나의 경험엔 그렇단 건데 -.,-;; 음 좀더 고민해볼게요.)

    그리고 자기계발서 히트와 동시에 자기성찰을 부추기고 ‘영혼’의 성장과 평화를 목표로 하는 자기성찰서, 혹은 치유 주제의 책들이 비슷한 시점에 뜨는 것을 보면, 좀 다른 생각이 들기도 함. 질적 차원에서 봤을 때 완전 성질이 다른 것으로 구분할 수 있겠지만, 꼭 그래야 할까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자기배려의 윤리를 가진 능동적 주체되기, 난 자기계발서에서도 많이 참고한 것 같은데… ㅋ

    – 이상 개념없는 녀자 지나가다 한마디…..ㅎ;;;

    • 만세말하길

      반갑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쎄요…푸코라면, 합리성을 전환하는 실천이 있어도 4대강 사업은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되묻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건 해도 안될거야’ 라는 주장에는 ‘충분히 해봤다’가 가정되어야 하는데, 정말 그런가요?^^;; 푸코까지 갈 것도 없이 아주 ‘현실정치’적으로 생각해봐도, 사람들이 현실을 인식하는 틀이 전환된다면, 그러니까 사람들이 강에 공사판을 벌이는 것이 우리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지방선거에다가 총선 대선까지 염두에 둬야 하는 정권이 쉽게 삽질을 할까요?

      거꾸로,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권력역학이 주권이라면, 주권이라는 권력에 대한 가정이 “현실을 지배하고 인식하는 틀거리”며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전략을, 얼마나 ‘현실적’인 전략을 짤 수 있을까요?

      아마 가장 쉽게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은 주권자를 교체시키거나 그 정당성을 무너뜨리는 것일 겁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요원해 보이지 않는가요?^^;; 예를 들어 선거를 통해 정권을 교체해야 한다고 쳐보죠. 주권이론에 따르면 대한민국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를 교체해야 권력의 작동 양상이 달라질 테니까요. 안타깝게도 그러는 중에 4대강 사업 등은 다 진행될 공산이 크겠지요.ㅡ.ㅜ

      그리고 설사 결국 정권교체를 이루어 낸다고 해도, 그게 엄청나게 획기적 변화를 가져오기란 쉽지 않을겁니다. 정권 교체를 이루어낼 정도로 사람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우리 나라는 국민에게 주권이 있는 민주공화국이니까요.–;;), 그 사람들의 ‘상식’과 ‘합리성’에 부합하는 정책과 공약을 내세워야 하니까요. 그 상식과 합리성이 바뀌지 않는다면, 정권교체에 도전하는 세력은 보수화되겠지요. 그게 아마 의회 내 전략을 시도한 수많은 전 세계의 수많은 좌파 정당이 보수화된 이유일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가 가진 통상적인 거시적 권력 모델로 바라보면, 보통 권력이 작동한다고 여겨진 장소에 주목하고 그것을 바꾸기 위해 활용되는 방법을 떠올리면, 오히려 더 답답한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해하기로는, 푸코는 주권이론이 말하는 ‘권력의 자리’를 사실상 만들어주고 있는, 하지만 이제껏 주목되지 못한 여러 관계(지식, 기술, 합리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개입하는 전략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한계를 확인한 접근 대신 이걸 써보자!’라는 식일까요? 그래서 푸코는 자신의 미시권력이 방법의 문제이지 영역의 문제가 아니라고 언급합니다. 즉 작은 것에 주목하고 소소한 실천을 하자는게 미시권력이 아니라는 말이지요.^^;;(물론 그것도 중요합니다만)

      그래서 제 입장에서는 푸코의 말이 뻘소리로 들리지는 않습니다. 주권이론은 이론적 함정 뿐만 아니라, 실천적 함정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푸코의 논의는 이를 벗어날 이론적/실천적 자원을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권력의 가정과 이미지에 근거해야만 ‘현실적 전략’이 가능하다고 고집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많은 ‘현실적 전략’을 도출해낼 수 있는 자원을 주니까요. 잘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뻘소리라며 재끼기전에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겠지요. ㅎㅎ

      ‘뭐 어쩌란 말야!’ 라는 생각이 드는 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 저 역시 수없이 그 비슷한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푸코는 어떤 문제를 마주쳤을 때, 외부에서 쉽게 ‘답’을 찾으려 하는 태도와 심성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어째야 하는지는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해서 도출해야하지, 누군가가 가르쳐줄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문제화’의 정치는 바로 이런 수동적 태도를 깨려는 것이었겠지요. 물론 민지님이 그렇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다만 제가 그런 생각이 들 때 떠올리는 푸코의 말은 그런 것이라는 말입니다. 쉽게 우리가 느끼는 막막함은, 푸코를 포함한 저자들의 탓이 아니라, 우리의 무뎌진 사유와 감성 탓일 수도 있으니까요.

      저 역시 자기계발서를 보며 많이 참고를 했습니다. 세상에 뭐 절대적으로 좋거나 나쁜게 있겠습니까?^^;; 부처님 말씀도 똥 같이 들으면 똥이 되고, 똥을 보고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그저 위에 잠깐 언급된 것은, 똥 같이 활용된 자기계발 담론의 효과라고 여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시길…^^

    • 민지말하길

      만세/ 그러니까 (어쩌면 이해할지도 모르겠지만) 그 답답함의
      이유가 그런 것 같아요.
      첫문단에 만세가 썼듯이 – ‘충분히 해봤다’가 가정되어야 하는데-
      라고 한다면, 도대체 ‘충분히 해보는’ 것이 어느 수준, 어느 차원인지, 그러한 깨달음과 실천이 누군가에게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 속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게 참 막연한 것처럼 느껴지고, 또 누군가의 머릿속에서
      일종의 전략처럼 도출될 수 없는 것이기에 막막한 것이지요.
      내 삶도 잘 모르겠는데, 남의 삶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회의가 들때도 많은데 말이죠. -.- 문제화하는 짓들도
      들쑤시는 것들도 분명 매력적인 구석이 있지만, 그게 나같은 범인으로서는 평생 할짓은 못되더라고요. 재미없는 관성도 생기고…
      “우리의 무뎌진 사유와 감성이 문제”라면, 네.. 근데 그게 인(人)력만의 문제라기보다는 뭔가 되게 총체적인 문제인 것 같네요.
      뭐, 만세에게 답을 요구하는 건 아니고….

      아무튼 답글 잘 읽었어! 고민을 더 해볼 수 있게 됐음.
      이제까지 위클리에 올려진 필자들의
      댓글 중에 제일 성의있구나. ^^ 다시 봤어.
      ‘문자 보낸 사람’에 대한 배려의 윤리가 부족한 것에 대해
      아주 초큼 용서가 되는군. 호호호

  4. 요가총각말하길

    잘읽었어요~ ‘들쑤심을 통한 문제제기’ 가 공감이 되네요. 푸코의 ‘정치’ 를 더 알고 싶은데 어떤 책을 보는게 좋을까요? 가능하면 원서 제목도 함께 부탁드릴께염ㅋ

    • 만세말하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온갖 것이 다 권력이고 정치라고 들쑤시던 사람이라, 뭐 하나를 딱 말씀드리기가 어렵네요. 다만 전통적 정치의 관념과 푸코의 논의가 어떻게 다른지 잘 설명한 책으로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박정자 역, 동문선)가 적당할 것 같습니다. 푸코가 콜레주 드 프랑스에서 강의했던 내용을 묶어서 낸 책이라, 비교적 쉽게 읽히는 편입니다. 원서 제목은 IL faut défendre la société 입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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