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정치의 사유

혁명적 정치, 또는 평등을 선언하는 주체의 정치학

- 정정훈(수유너머N)

국가적 정치와 혁명적 정치

바디우에게 정치란 근본적으로 국가와 무관한 것이다. 국가가 지배를 위해 권력을 운용하는 활동을 그는 정치가 아니라 ‘관리’라고 부른다. 바디우에게 정치란 이 국가 권력에 의해 계산되지 않는 존재들의 보편적 가치를 드러내고 그것을 선언하는 활동, 다시 말해 혁명적 실천에 걸맞는 이름이다. 이러한 그의 정치관은 사실상 그의 존재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국가란 상황을 지배하기 위해 상황에 속한 요소들을 재현하는 것이라면, 혁명적 정치란 그 재현의 질서에서 배재된 자들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그러나 바디우에게 이 사건이란 그 자체가 발생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일소하는 신의 현현(데우스 엑스 마키나)과 같은 것이 절대로 아니다. 사건은 섬광과 같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중요한 것은 이 사건을 만난 이후 사건에 충실해지는 ‘주체’이다. 혁명적 정치란 정치의 장에서 사건을 경험한 자가 주체로서 그 사건의 진리에 충실한 과정에서 실행되는 것이다. 바디우에게 그러한 주체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이는 바로 사도 바울이다.

바디우의 존재론과 정치

국가라는 상황 상태의 지배 아래 있는 재현의 질서에 반하는 사건의 발생과 그로부터 출현하는 주체의 정치적 실천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바디우의 존재론을 거칠게나마 요약할 필요가 있다. 우선 상황 상태(état de la situation)라는 용어로부터 시작해 보자. 바디우는 ‘존재’를 일자로 이해하는 철학적 전통을 거부한다. 그에게 존재란 그 어떤 통일성(즉 일자)도 거부하는 순수 다수(le multiple pur)이다. 그런데 이 순수 다수를 그는 공백(vide)으로서 사유한다. 순수 다수 혹은 불안정한 다수에게는 그 어떤 원자적 실재성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다수는 그 근본적 불안정성으로 인해 어떤 질서로 완전히 통합해낼 수 없는 것이고, 그것에 임의적 질서가 부여된다고 하더라도 그 질서 내에서 완전히 나타내지지 않는 채로 존속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상황 내의 공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동시에 불안정한 순수 다수는 그 자체로는 실재성을 가질 수 없다. 실재성은 이 불안정한 순수 다수에 어떤 안정성이 부여되어야 나타날 수 있다. 바디우는 안정성이 부여된 다수를 상황(situation)이라고 명명한다. 다시 말해 상황이란 불안정한 다수가 셈을 가능케 하는 어떤 구조를 받아들여 성립한 것이다. 상황이 성립하면 다수는 이제 셀 수 있는 것이 되는데, 그 다수를 세는 것을 현시(présentation)라고 한다. 현시되어진 안정된 다수성이 바로 상황이다.

바디우는 이를 칸토어의 집합이론에 기초하여 설명한다. 집합이론이란 잘 알려져 있다시피 많은 존재자들을 셈하기 위해 칸토어가 발명한 수학의 분야이다. 어떤 조건에 의하여 그 대상들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들의 모임이 집합이다. 집합이 주어지면 그 집합의 원소들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원소들을 식별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현시이다.

그러나 모든 집합에는 현시되지 않는 요소가 있다. 바로 공집합(vide)이다. 즉 상황 내에서도 현시 불가능한 것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공집합, 즉 공백은 현시의 구조를 완결 짓지 못하게 만드는 불안정의 요소로 남는다. 집합이론에서 공집합을 셈하기 위해서 부분집합을 구한다. 부분집합을 구하여 보면 공집합이 포착하여 셀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셈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조화된 상황 내에서 현시되지 않는 공백을 세기 위한 두 번째 셈을 바디우는 상황 상태라고 부른다. 두 번째 셈이 행해지면 상황을 이루는 요소들은 재현(re-présentation)되고 상황의 구조 역시 재구조화된다. 상황 상태란 공백을 재현하고 고정할 목적으로 상황을 특정화하여 관리하는 권력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상태’(état)곧 ‘국가’(E’tat)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집합이론이 보여주듯이 부분집합을 세어 공집합을 원소로 하는 새로운 집합을 구하여도 그 집합 역시 또 다른 공집합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공집합은 모든 집합에서 재현 불가능한 것, 그리고 고정 불가능한 것, 제거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사건 이후의 주체

이 공집합이 드러나는 것과 사건으로서 정치는 밀접한 관련을 가지게 된다. 여기서 ‘사건’이라는 용어가 바디우의 바울 해석을 꿰뚫고 있는 관건적인 개념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실제로 바디우 역시 ‘사건의 철학자’이다. 그렇다면 바디우에게 사건이란 무엇인가?

바디우의 사건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에서 언급했던 공백에 대한 논의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사건이란 어떤 상황 내에서 공백의 드러남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상황 속에서 현시되지 않았던 것이 섬광처럼 돌발하는 것이 사건인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존의 시스템 안에서 자리 없는 것, 비-존재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의 출현, 그것이 사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건은 기존 시스템, 즉 상황의 질서나 법칙과는 무관할 뿐만 아니라 상황을 규정하는 법칙과 질서에 어떤 단절, 중단을 가져오게 된다. 하지만 사건은 결코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상황의 법칙과 질서를 중단시키며 돌발하지만 곧 사라지는 불안정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건이란 단지 어떤 해프닝에 불과한 것인가? 바디우에 따르면 사건은 단지 돌발했다 사라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건은 그것을 경험한 ‘어떤 자’를 주체로 부른다. 사건의 돌발이 가져오는 상황의 중단은 사건과의 만남을 통해 성립한 주체에 의해 계속될 가능성이 열린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란 사건의 효과이며, 주체는 사건의 효과를 지속시키는 자이다. 그래서 바디우는 사건 이후 등장하여 사건에 계속해서 충실한 주체를 투사라고 부른다.

바디우는 이러한 사건 이후적인 주체, 즉 투사-주체를 사도 바울에게서 발견한다. 사실 모든 상황은 자신의 법칙을 따르는 주체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이 주체의 형상은 언제나 어떤 담론과 결부된다. 바울이 비판하는 그리스 담론은 현자=철학자를 자신의 주체적 형상으로 제시하며 유대 담론은 예언자를 그것의 주체적 형상으로 내세운다. 반면 바울은 이 두 주체 형상에 대립하여 사도라는 주체의 형상을 제시한다. 사도란 그리스도라는 사건이 진정으로 일어났음을 그 사건과의 만남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선언하는 자, 그리고 그 사건이 모든 이를 평등한 아들로 만드는 사건임을 선언하는 자이다. 바디우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란 사건의 보편적 효과를 선언하고 모든 이에게 그것을 전달하는 자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사도라고 주장하는 바울의 모습에서 사건 이후적 주체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다.

보편적 평등과 주체의 선언

바디우는 이상과 같이 해석된 바울의 사유를 은총의 유물론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유물론이란 물질을 ‘존재’, 혹은 실재로 이해하는 범박한 철학이 아니다. 바디우에게 유물론이란 “주관적인 것은 객관적인 것에 의해 결정된다”(129)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즉 구원받은 주체란 사건이라는 객관적 실재에 의해 구축되는 것이고, 구원은 주체의 충실성에 의해 계속되는 과정 것이 유물론의 중핵이며, 사건은 그 어떠한 자격(정체성, 특수성, 차이)과 상관없이 어떤 자에게 도래하는 것이라는 차원에서 은총이라는 것이다. 은총으로 주어지는 사건과의 만남이 어떤 자를 진리의 주체가 되게 하는 것이다.

바디우가 바울을 통해 읽어내는 은총의 유물론이 또한 보편주의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디우에게 보편주의란 총체성의 위계적 자리 할당을 분쇄하며, 그 어떤 특수한 정체성의 특권적 예외도 폐지하는 평등의 보편주의이다. 사건은 그것이 보편적 평등, 즉 아버지의 지배를 폐기하고 아들들의 동등성을 구축하는 것으로 나아갈 때만이 진리가 될 수 있다. “사건은 그것이 보편적인 아들-되기를 발생시키지 않는다면 왜곡된 것이다. 그러한 사건을 통해 우리는 자녀로서의 동등성을 갖게 된다.”(<사도바울>,새물결,97) 바울에게 예수의 부활이라는 사건이 의미하는 바는 모든 인류를 평등한 형제로 만드는 것이며, “지배자를 축출하고 아들들의 평등을 정초”(<사도바울>,새물결,117)하는 것이다.

특수성과 정체성에 입각한 지배에 대항하여 모든 인류의 평등을 보편화하는 투쟁이 바울의 투쟁이었고, 이런 의미에서 바울의 보편주의란 평등의 정치철학이기도 하다. 평등의 보편성이라는 바울의 정치철학은 「고린도전서」3장 9절의 ‘데우 수네르고이’, 즉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표현에 집약되어 있다. 이제 지배자의 형상은 폐기되었으며 그 대신 진리의 공정 속에서 함께 노동하는 평등한 노동자들이 존재한다. “모든 평등은 하나의 노동에 함께 속해 있는 평등이다. 진리의 공정에 참여하는 자들은 논란의 여지없이 그러한 도정의 동역자들이다.”(<사도바울>,새물결,117) 유대인이건 헬라인이건, 그 어떤 종족적이고 공동체적인 특수한 정체성과 관계없이, 진리에 의한 모든 이의 보편적 평등을 구축하는 것. 그것이 바울이 제시하는 정치학의 핵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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