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정치의 사유

슬라보예 지젝: 정신분석은 역사유물론을 구원할 수 있는가?

- 박정수(수유너머R)

정신분석학과 신학

지금까지 슬라보예 지젝은 주로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학의 개념으로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잡다한 대중문화 현상을 재기발랄하면서도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비평가로만 알려져 왔다. 하지만 그의 본령은 정신분석학의 신학적 사유를 통해 난쟁이처럼 왜소해진 맑스의 역사유물론을 구원하고자 하는 정치신학에 있다. 정치신학은 노모스(법)의 질서를 수립하는 정치학에 신학의 ‘외부’ 개념을 도입하여 법 바깥의 영역에서 정치와 혁명의 동력을 찾는 실천이론이다. 들뢰즈와 푸코가 비판적으로 지적한 것처럼 정신분석학은 근대의 세속화된 유대-기독교 신학이다. 지젝은 정신분석학의 신학적 사유구조를 한계가 아니라 현실정치의 외부를 발견하는 돌파구로 본다.

정신분석학은 세계 ‘외부의 중심’으로 기능하는 유대-기독교의 ‘신’ 개념을 부활시켰다. 우선, 정신분석학에서 신은 인간의 의식 외부에 존재하는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의식 외부의 표상영역을 믿지 않는 자아(ego)의 고장과 분열을 통해 나타난다. ‘나’의 자기반성적 사유에서 나의 존재근거를 찾는 데카르트적 주체는 무의식의 출현에 의해 세계와 역사의 주인, 사유의 주인 자리에서 밀려난다. 정신분석학에서 신은 ‘나’를 사유와 행위의 중심에서 빗겨나게 하는 비인칭적 힘의 의지(그것das Es)이다. 구조주의적으로, 무의식이란 의식되지 않지만 나에게 세계가 표상되는 규칙, 체계, 혹은 규범이다. 초월론적 표상형식으로서의 무의식은 라캉이 대문자 ‘타자’라 부른 것처럼 항상 나의 주관적 상상 외부에 남아 있다.

그 다음, 정신분석학은 무의식적 표상질서의 최종 결정자 내지 표상체계의 중심으로 기능하는 신을 부활시킨다. 프로이트의 무의식은 칸트가 말한 오성의 초월론적 형식과 유사하지만 무의식적 표상질서는 칸트가 말한 감성형식, 지성형식, 통각형식과는 전혀 다른 형식이 지배한다. 거기에는 시간도 흐르지 않고 공간적 제약도 없으며 인과율이나 배중률도 없다. 무의식적 표상들은 오직 우발적 사건과 미시물리학적 힘(충동)의 변화에 따라 결합하고 대체된다. 하지만 표상들의 이런 환유적 연쇄(전치)는 하나의 특권적 표상이 출현하여 나머지 표상들을 동일한 체계 하의 의미원소들로 통합할 때까지만 지속된다. 프로이트가 ‘아버지’의 대리표상으로 본 ‘신’이란 이렇게 우연적인 표상연쇄를 단일한 의미체계로 변환시키는 특권적인 중심 기표, 라캉이 주인기표라 불렀던 기표에 다름 아니다. 정신분석학의 신학적 특성은 바로 이 신의 자리, 예외적 중심의 자리, 주인기표의 자리를 인정하는 데 있다.

마지막으로, 정신분석학이 부활시킨 신은 표상질서 외부의 실재(사물)이다. 칸트의 물자체 개념이 지시하는 것처럼 근대적 사유에서 사물(물질, 실재)은 인식의 질서, 현상(표상)의 질서 외부에 있다. 사물, 혹은 물질을 표상의 원인이면서도 표상질서를 붕괴시키지 않고서는 결코 표상질서 안에 들어오지 않는 것으로 정의하는 것이야말로 근대 유물론의 전제이다. 물질과 표상(의식) 사이의 근원적인 간극을 전제로 삼지 않으면 물질의 운동법칙에 대한 특정한 관념을 물질의 운동 자체로 보는 관념론에 다시 흡수되고 만다. 맑스가 ‘물질적’ 생산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의식(표상)의 질서에 대한 생산(생성)의 외부성을 가리킨다.

라캉은 무의식적 표상질서 외부에 잇는 사물을 ‘실재’로 정의한다. 정신분석에서 실재는 ‘충동’의 세계이다. 우리는 실재 충동의 운동 자체를 인식하거나 말할 수 없다. 충동은 말의 길이 끊어진 지점에서, 표상의 체계가 붕괴되어 표상의 운행이 중지되는 지점에서 솟구쳐 올라온다. 충동은 대상을 향하지만 대상 주위를 선회할 뿐 결코 대상과 만나지 않는다. 이 만남의 실패가 충동을 영원히 회귀하게 한다. 영원회귀의 힘, 항구적인 반복 속에서 표상의 질서에 차이를 일으키는 비인칭적 의지로서의 충동개념을 통해 정신분석학은 역사의 초월적 원인으로서의 신개념을 되불러온다.

믿음의 정치학과 혁명의 신학

슬라보예 지젝은 이와 같은 프로이트-라캉 정신분석학의 신학적 사유를 통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정치적 비판과 메시아주의적 전망(혁명)을 제시한다. 첫째, 자아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표상작용이 있다는 전제는 이데올로기 없는 사회는 없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지젝에게 이데올로기란 의식적 신념과 인식체계가 아니라 무의식적 표상작용에 대한 앎과 믿음의 체계이다. 지젝은 탈-이데올로기의 시대를 외치는 자들을 비판하면서 냉소주의와 실용주의적 태도 속에서도 유지되는 물신주의(fetishism)를 분석해낸다. 프로이트가 말한 것처럼 물신주의는 견딜 수 없는 사실(어머니의 거세 사실)에 대한 지각을 부인하기 위해 실제 지각과 배리되는 믿음을 외부 사물에 구현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물신주의자는 믿음과 실제 지각의 충돌에서 오는 심적 부담을 지지 않고 믿음을 유지할 수 있다. ‘나를 대신해서 사물이 믿는다’가 물신주의의 공식이다.

이것이 맑스가 <자본> 1장 4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에서 말하고자 한 것이다. 상품은 얼핏 보면 자명하고 평범한 물건처럼 보인다. 그러나 상품을 분석해 보면 그것이 형이상학적 궤변과 종교적 믿음으로 차 있는 신비한 물건이라는 것이 판명된다. 인간들 간의 사회적 관계를 물건들 간의 자연적 관계로 전도시킴으로써 물건(상품) 안에 독자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물신주의적 믿음은 의식적(주관적)인 믿음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믿음으로, 자본주의는 그 무의식적 믿음이 (인격적 지배나 법적 예속이 아니라) 가장 물화된 형태로, 즉 자기 바깥의 사물에 구현된 형태로 지탱되는 이데올로기 질서이다. 따라서 <자본>을 읽고 상품가치의 계급적 비밀을 안다고 해서 상품 물신주의가 사라지는 게 아니다. 그걸 알아도 그 앎과 배리되는 물신주의적 믿음이 상품을 매매하는 행위 속에 물화된 형태로 지속되기 때문이다.

흔히 물신주의를 물질주의로 이해한다. 물질적 부, 실제적 권력, 육체적 쾌락만이 진실이고 이념적 대의나 종교적 신앙 대위는 이 가혹한 진실을 은폐하는 고귀한 거짓이라는 식으로. 그러나 물질은 유령같은 관념(환영)과 대립된 견고한 감각적 사물이 아니다. 물질(상품, 화폐, 자본)은 만질 수 있거나 딱딱하고 분리 불가능한 입자가 아니라 의식 외부에 있는 믿음의 구현체로 정의되어야 한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을 통해 자본주의에서 “모든 딱딱한 것들은 대기 속으로 녹아들어간다”고 했다. 상품물신주의는 모든 딱딱한 것들, 모든 견고한 것들이 대기 속으로 녹아들어 아무 형체도 남기지 않는 유령적 국면에서 정점에 도달한다. 화폐가 물질성을 벗어버릴 때, 즉 금의 금속성도, 지폐의 가시성도 없이 순수한 추상적 숫자(전자-신용화폐)로 전화될 대, 만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시공간적 위치도 없는 권리(증권), 지식(정보), 정서(감정)가 최상의 상품(자본)으로 전화할 때, 이런 가상 자본주의의 국면에서 상품물신주의는 가장 순수하게 나타난다. 물질적인 부, 권력, 쾌락 말고는 어떤 진리도 없다는 냉소주의가 판치는 자본주의는 역설적으로 가장 순연한 신앙의 네트워크에 의존하고 있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화폐를 믿고, 그것으로 진지한 게임을 할 때, 다른 사람들 역시 그 게임에 참여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때만 작동한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그 믿음을 내려놓을 때 붕괴되는 종교이다.

둘째, 보편적 질서를 형성하는 예외적 중심으로서의 신 관념(주인기표)은 지젝에게 보편적 해방을 향한 투쟁의 신학적 전제가 된다. 지젝에게 주인기표 없는 질서는 없다. 주인기표는 파괴되고 분산되고 흩어져야 할 보편 질서의 강요를 의미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이 주류 이데올로기로 대두된 오늘날 주인기표의 약화 속에서 사람들은 그보다 끔찍한 초자아의 이중구속에 사로잡혀 있다. 서구 자본주의 사회는 “즐겨라”라는 정언명령과 그 명령에 따라붙는 “타인의 향락을 침해하지 말라”는 관용의 윤리로 이뤄진 초자아적 이중구속에 사로잡혀 있으며, 근대화의 외상적 충격 속에서 주인기표의 질서가 붕괴된 무슬림 사회는 초자아적 신을 통해 자기 사회의 전면적 해체를 막고자 한다. 그래서 신에 대한 믿음 대신 실재적(과학적) 지식을 열망하고 상징적 제도를 매개로 하지 않고 신과 직접 소통하여 삶의 지혜와 명령을 전달받는 근본주의적 종교가 확산된다.

보편적 질서는 항상 배제의 논리를 함축한다. 보편질서가 형성된다는 것은 그 안에 포함될 요소와 배제될 요소가 구분된다는 뜻이다. 이런 배제는 두 가지 차원에서 일어난다. 하나는 보편적 동일성의 척도로 기능하는 일자의 배제이다. 동일한 특질을 공유하는 보편집합이 구성되려면 그 특질을 체현한 하나의 요소가 나머지 요소에 대해 예외적인 지위를 점해야 한다. 그래야 그 예외적 일자를 척도로 삼아 모든 원소들이 동일성을 분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세계의 화폐, 법질서의 주권자, 성차질서의 남근적 아버지가 척도로 기능하는 예외적 일자이다.

이 주권적 일자의 보편질서는 또 다른 배제를 함축한다. 주권자의 법(척도)에 포함되지 않는 요소들의 배제 말이다. 이 배제는 실질적인 배제가 아니라 표상적인 배제이다. 배제된 요소들은 법적으로, 젠더적으로, 가치론적으로 표상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주권적 질서 안에서 핵심적으로 기능하고 있다. 지젝이 추구하는 보편성은 이 배제된 자들에 의해 입증되는 보편성이다. 이들은 (남근이든, 화폐든, 주권이든) 가진 자들의 보편성에 대해 그것이 전부가 아님(non-All)을 입증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들의 보편성은 초월적 일자의 예외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 예외의 배제, 즉 예외 없음, 척도 없음의 보편성이다.

이 예외(척도) 없음의 보편성은 평등의 논리를 새롭게 정의하게 한다. 평등이란 특정한 상징질서에 속한 자들의 몫을 균등하게 분배하는 논리가 아니라 그 질서 안에 표상되지 못한 자들, 그 질서 안에 자기 자리(자격)가 없기에 정당한 몫을 주장할 수 없는 자들의 동등한 몫을 통해 입증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이렇게 사회-상징적 질서 안에서 배제된, 몫 없는 자들의 평등한(보편적) 몫을 입증함으로써 현존하는 포함과 배제의 규칙 자체를 붕괴시키는 근본적(radical) 정치이다. 그래서 민주주의적 보편성은 주권적 보편성과 근본적으로 적대한다. 지젝의 정치학은 적대의 정치학이다. 그에게 적대란 단지 동일한 질서 내의 서로 다른 두 입장 사이의 협상 가능한 대립이 아니라 화해 불가능한 두 보편세계 사이의 적대, 현존하는 주권적 보편성과 그로부터 배제된 자들의 보편성 간의 화해불가능성이다.

배제된 자들의 예외 없는 보편성에도 중심은 있다. 배제된 자들의 지위와 이름, 욕망과 역량은 각기 다르다. 이 각기 다른 자들의 욕망과 힘은 하나의 중심에 응축되어 보편적 열망과 힘으로 표현될 때만 현존하는 주권적 질서를 무너뜨릴 수 있다. 지젝은 그 보편적 열망의 중심(주체)을 ‘프롤레타리아’로 호명한다. 맑스는 자기 시대의 프롤레타리아를 산업노동자 계급에서 찾았지만 자본주의의 전지구적 발전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자리는 다른 집단이 차지할 수 있다. 지젝은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이 응집된 거대도시의 슬럼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출현을 예견한다. 지난 십여년 간 슬럼의 폭발적 증가, 특히 멕시코시티와 라틴아메리카 수도들로부터 아프리카(라고스, 차드), 그리고 인도, 중국, 필리핀, 인도네시아의 제 3세계 거대도시에서 슬럼의 폭발적 증가는 아마 우리시대의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사건일 것이다. 거대도시의 한가운데 있지만 국가 통제 외부에서, 법의 경계에서 최소한의 자치형식의 절박한 필요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야말로 문자 그대로 몫 없는 자들, 시민권의 혜택으로부터 배제된 자들, 구속의 사슬 말고는 아무것도 잃을 게 없는 자들로 이뤄진 집단이다.

지젝의 보편주의에는 이처럼 중심(주체)의 자리가 있다. 지젝은 세계를 두 개의 적대적 보편성으로 양분하는 주체의 자리를 상정하지 않는 순수차이를 비판한다. 차이는 무한하지 않다. 차이는 이전과 이후, 현존하는 보편성과 배제된 보편성 간의 미세하지만 근본적인 차이(적대)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 적대의 정치는 항상 배제된 자들의 중심인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체 개념을 함축한다. 또한 권력의 중심인 국가기구를 둘러싼 투쟁 역시 포기할 수 없다. 지젝은 근대권력이 특정한 중심(주권)을 갖지 않고 미세한 권력장치들의 횡적 네트워크를 형성한다는 푸코의 이론이나 다중의 혁명적 권력(욕망)은 탈코드화되고 탈영토적이라는 들뢰즈의 이론에 기대어 국가권력(주권-사법기구)의 장악을 방기하고 개인들의 자율적 저항과 대안생활운동만 고집하는 자율주의에 반대한다. 이런 자율적 코뮨운동은 계급투쟁의 전선으로 배치될 수밖에 없으며, 미시권력의 수직적 정점에 있는 국가권력에 대한 투쟁으로 모아질 수밖에 없다. 또 그래야 한다.

지젝에게 국가권력의 장악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주권-사법적 권력을 통해 계급 자체를 철폐할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하기 위함이다. 지젝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승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독재 속에서 프롤레타리아의 자율정치가 확산되고 그 과정에서 국가 자체가 소멸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젝은 베네주엘라의 우고 차베스와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이 국가권력을 통해 프롤레타리아의 조직화를 꾀하는 것을 민주주의 형식 하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평가한다. “우리는 차베스와 모랄레스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현대적 형식에 근접해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비록 그들 정부는 수많은 운동 세력이나 정치 행위자들과 상호작용하면서 그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내고 있지만 명확히 빈민촌의 가난한 자들과의 특권적인 연관관계를 갖고 있다. 차베스는 궁극적으로 그들의 대통령이며, 그들은 그의 지배 뒤에 있는 지배적 힘이다. 또한 차베스는 여전히 민주적인 선거 절차를 존중하기는 하지만, 그의 기본 공약과 정당성의 원천은 선거가 아니라, 가난한 자들과의 특권적 관계에 있다. 이것이 민주주의 형식 안에 있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세 번째, 실재(충동)의 침입이라는 형태로 회귀하는 신의 개념은 지젝을 통해 메시아적 혁명의 시간론과 폭력론으로 발전한다. 자크 라캉과 슬라보예 지젝이 프로이트의 충동이론에서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죽음충동에 대한 논의다. [쾌락원칙을 넘어서](1920)에서 프로이트는 쾌락원칙을 넘어서 반복되는 죽음충동의 존재를 설정한다. 인간의 충동 근저에서 작동하는 죽음충동은 유기적 통합체를 파괴하면서 분출하고 욕망의 표상화를 중지시키면서 반복된다. 라캉은 모든 충동은 죽음충동이라고 하면서 프로이트의 논의를 확장시킨다. 라캉에 따르면 무의식의 실재(원인)인 충동이 분출할(열릴) 때 그것의 ‘효과’인 무의식적 표상의 질서는 중지된다.(닫힌다.) 그리고 (대상과의 실패한 만남에 의한) 충동의 반복을 통해 무의식의 구조는 시간 속에서 반복된다.

(죽음)충동의 이론에는 유대 기독교의 메시아주의가 함축되어 있다. 메시아가 도래하면 역사는 중지된다는 관념 말이다. 구조(충동)의 반복이라는 라캉의 개념은 이런 연속적인(목적론적인) 시간관을 넘어서 메시아주의(종말론)를 이해하게 해준다. 역사의 종말은 연대기적 시간의 끝에서 목적의 달성으로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메시아주의는 목적을 향한 역사의 연속이라는 주권적 역사관과 단절한다. 메시아 신학에 따르면 역사는 매 순간 반복되는 메시아의 (실패한) 도래에 의해 단절적으로 발전한다. 하나의 역사(사회)가 중지되고 나서 어떤 역사가 시작될지는 목적론적 관념 속에서 미리 그려질 수 없다. 그것은 오직 특정한 역사를 중지시키는 메시아-주체(subject)의 역사적(역사적 배치 속에서 결정되는) 의지에 달려있다. 메시아주의적 (반)역사관만큼 목적론적 역사주의와 대척되는 것은 없다.

지젝은 레닌에게서 이런 메시아주의적 역사관을 찾는다. 1917년 4월 레닌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라는 테제를 제시하고 소비에트 권력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의 실행을 주장했을 때 멘세비키를 비롯한 대다수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레닌이 미쳤다고 했다. 왜냐하면 이제 막 봉건 짜르를 무너뜨린 러시아의 역사적 발전 단계는 부르주아 혁명이기 때문이다. 역사 발전의 필연적 발전 단계를 무시한 레닌의 테제는 광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에 대해 레닌은 “혁명을 기다리는 자는 영원히 기다리기만 할 것이다”라고, 그것을 의지하는 주체가 있고 역량이 있는 바로 지금이 공산주의가 도래할 작은 문이라고 생각했다. 혁명의 권위는 역사발전의 필연적 법칙이라는 이념적 대타자에 의해서도, 대중들의 여론이라는 현실적 대타자에 의해서도 부여받지 않는다. 혁명은 오직 자기 자신에게서만 권위를 부여받는다.

여기에 메시아의 폭력성이 있다. 지젝에게 혁명은 역사적 실재(충동)의 침입으로, 프로이트가 외상(trauma)에 대해 말한 것처럼 그것은 현실원칙과 쾌락원칙의 법들을 무너뜨리는 폭력성을 내포한다. 메시아적 혁명은 폭력적이다. 그것은 피를 봐서가 아니라 법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폭력적이다. 오늘날 지배자들이 불법과 폭력을 등가로 놓는 것처럼 현존하는 법을 무너뜨리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서만 권위를 부여받는 혁명은 당연히 폭력이다. 메시아적 혁명의 폭력은 법을 세우기 위한 폭력이나 법을 지키기 위한 폭력처럼 법에 내포된 폭력이 아니라 법 바깥의 폭력이다. 벤야민이 “신적 폭력”이라 불렀던 그것은 ‘피’와 ‘죄’로 정의되는 게 아니라 “피를 흘리지 않고 내리치며 면죄해 주는 수행의 요인들을 통해 정의된다.” 메시아적 폭력은 존재론적 폭력이다. 그것은 혁명적인 존재 자체가 법에 가하는 외상적 폭력이며, 사라져야 할 자들의 존재 근거(계급) 자체를 무화시키는 폭력이다. 지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바로 신적 폭력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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