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정치의 사유

아감벤: 비국가적 정치의 가능성

- 고병권(수유너머R)

1. 정치 -권력과 삶의 마주침

정치란 지오르지오 아감벤(G. Agamben)에게 있어 기본적으로 삶 내지 생명과 관계된 것이다. 미셸 푸코 이래로 근대정치를 생명의 정치로 부르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아감벤의 시각에서 보자면 우리는 고대로부터 서구 정치 일반이 생명의 정치 내지 삶의 정치였다고 말할 수도 있다. 서구에서 정치란 기본적으로 권력과 삶이 마주치는 장소에서 정의되어왔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정치를 ‘좋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살기 위해 태어났지만 본질적으로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고대인들의 정치관에는 ‘좋은 삶’과 ‘태어난 삶’, 정치적 삶〔비오스, bios〕과 생물학적 삶〔조에, zoē〕의 구분이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 존재로 산다는 것은 단순한 ‘살아있음’을 넘어서는 일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정치적 존재로서 자신을 드러냈던 공간인 폴리스(polis)와, 단순 생명체로서 생물학적 삶을 영위하는 공간인 오이코스(oikos)를 철저히 나누었다.

정치에서 ‘삶’이 문제가 된다는 점에서 고대 정치는 근대 정치와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푸코가 ‘생명의 정치(biopolitics)’, ‘생물학의 국유화’라고 부른 사태의 출현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아감벤에 따르면 고대와 근대의 정치는 ‘생명’을 다룬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떻게’ 다루었느냐에서 완전히 달라진다. 고대 정치도 ‘살아있음’, 아무런 덧붙임도 없는 ‘날 생명’의 존재를 전제한 점에서는 근대 정치만큼이나 생명의 정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고대 정치에서 그것은 감춰져야 할 것, 부정되어야 할 것, 배제되어야 할 것이었다. 그런데 근대 정치에서 그것은 적극 관리 육성해야 할 것이 되었다.

푸코는 “19세기의 기본 현상 중 하나가 생명에 대한 권력의 관심”이며 “권력이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장악했다”고 말했다. 푸코가 말하는 이때의 생명은 출생과 사망, 질병과 노화 등으로 구성된 생물학적 생명이다. 아감벤은 푸코가 묘사한 권력의 생명에 대한 관심을 “조에(zoē)의 권리요구이자 해방”라고 불렀다. 그에 따르면 ‘단지 살아있음’으로 파악되는, 발가벗은 삶으로서의 ‘생명’은 권력의 관심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근대 권력의 기초이기도 하다. 근대의 다양한 정치 이념이나 정치체들이 그것을 바로 보여준다.

가령 근대 국민국가(nation state)는 무엇보다 출생(natio), 다시 말해 ‘태어난 삶’에 기초하고 있다. 인간의 천부적 권리이자 모든 권리의 기초로 간주되는 ‘인권’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이 제거된 자연 생명체로서 인간을 가정하고 있다. 즉 인권은 인간이 완벽하게 헐벗었을 때 가정된 권리라는 점에서 ‘그저’, ‘단지’ 생명체일 뿐인 존재를 가정한다. ‘복지국가’가 그 후생과 복리를 챙기겠다고 다짐하는 ‘삶’도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근대 정치는 다양한 삶의 형식에서 ‘발가벗은 생명’을 추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삶의 이러한 추출을 전제하는 권력 구조를 문제 삼지 않는 한 근대 정치를 넘어서려는 시도는 무망한 것이다.

2. 주권의 구조로서 예외상태

근대 정치 이념이 ‘발가벗은 삶’의 ‘추출’을 전제한다고 했지만, 사실 삶의 ‘추출’이란 삶의 ‘추방’과 다른 말이 아니다. 다양한 형식 속의 ‘삶’을 ‘비-관계’ 속으로 ‘추방’한 것이다. 아감벤은 그런 추방된 삶의 형상을 로마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발견한다. ‘신성한 삶’이란 뜻을 가진 ‘호모 사케르’는 겉 뜻과는 달리, 신에게 봉헌할 수 없는 어떤 오염된 존재였다. 신성한 것에서 배척된 그 존재는 인간의 사법 질서에서도 배제된다. 누군가 그를 살해해도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의 법이든, 인간의 법이든 그 바깥에서 아무런 보호도 없이 그저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철저히 무력하게 내던져진 삶은 그것을 다루는 절대적 권력과 상응한다. 엄밀히 말해서 호모 사케르는 단순한 ‘조에’가 아니다. 그것은 이 절대적 권력 앞에 적나라하게 노출된 생명, 그 앞에 ‘생사여탈’을 완전히 내맡기고 있는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법 바깥에서, 삶을 구성하는 모든 관계 바깥에서, 이 예외적 공간에서, 발가벗은 생명과 대면하고 있는 절대적 권력. 그것이 주권이다. 주권이란 이 점에서 ‘발가벗은 생명’의 이면이자, 그것을 전제하고 있는 하나의 ‘구조’인 셈이다. ‘호모 사케르’나 ‘주권’은 동일한 구조를 어떤 측면에서 명명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법 바깥에 서 있는 절대적 권력이 사실은 법을 가능케 하고 법을 실효적으로 만드는 힘이기도 하다. 법 안에서 작동하는 그 힘은 유일하게 법 바깥에 있는 힘이고, 뒤집어 말하면 법 바깥에 있으면서 법질서에 속하는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칼 슈미트가 <<정치신학>>에서 주권을 그렇게 정의했다. “주권자는 법질서의 외부에 서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속한다.” 주권자는 항상 “나 이외에 아무도 법 바깥에 설 수 없다”고 선포한다. 주권자란 ‘합법적으로 법을 중단시킬 수 있는 자’, ‘예외상태를 선포할 수 있는 자’라고 할 수도 있다. 아감벤은 슈미트의 논지를 빌어, 주권이란 ‘외부를 차지하는(Aus-nahm)’ 결정, 말 그대로 ‘예외상태(Anusnahm)’에 대한 결정권이라고 주장한다. 여담이지만 주권자는 마치 영화 베트맨시리즈의 최신편인 <다크나이트>에서, 법질서를 유지시키기 위해 법 바깥에 서 있는 ‘배트맨’을 닮았다.

이 점에서 ‘수용소(concentration camp)’는 아주 의미있는 공간이다. 가령 현재 미국이 운영하고 있는 ‘관타나모’ 수용소를 생각해보자. 거기에 잡혀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의 포로들은 제네바 협약 같은 국제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종전이 선언되는 순간 포로들은 자국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미국 국내법의 규정도 받지 않는다. 미국의 애국자법에 따르면 테러용의자들은 7일 이내에 기소되거나 추방되어야 한다. 미국이 관타나모기지에서 벌이고 있는 일, 테러리스트 혐의가 있다는 이유로 정식 재판도 없이 몇 년째 감금하고 있는 행동은 국제법에도 국내법에도 해당사항이 없는 일이다.

모든 행동이 ‘위법성 없이’ 가능한 곳이 수용소다. 모든 것이 가능한 절대적 권력의 존재는 동시에 모든 보호가 해제된 채 적나라하게 노출된 생명의 존재를 함축한다. 아렌트는 온갖 잔악한 일이 가능한 수용소에서 ‘전체주의의 불가능한 꿈’을 읽었지만, 아감벤은 이 ‘예외적 공간’이 사실은 “근대성의 정치적 공간 자체를 결정하는 방식”을 보여주는 모델이라고 본다. 이곳에서야말로 근대 생명의 정치를 떠받치는 주권 구조, 벌거벗은 삶에 근거한 권리의 구성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감벤은 수용소를 ‘근대 생명의 정치의 패러다임’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장기간의 구금과 잔인한 고문으로 악명 높은 관타나모 예를 들긴 했지만, 아감벤은 “수용소에서 저질러진 범죄의 성격과 무관하게, 그리고 그 범죄가 어떻게 지칭되고 어떤 지형에 속하는가와 무관하게, 이런 구조가 창출될 때마다 우리는 매번 잠재적으로 수용소와 대면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령 미등록이주노동자들이 본국 송환되기 전에 머무르는 ‘외국인 보호소’ 같은 공간, 난민 지위를 신청한 외국인을 유치하는 국제공황의 ‘대기지대’ 같은 곳도 그런 곳이다. 겉보기에는 대수롭지 않은 공간이지만 이 공간에서는 정상적인 법질서가 적용되지 않는다. 지리적으로는 특정한 영토에 속하지만 사법적으로는 영토 바깥, 즉 ‘치외법권지대(extra-territory)’에 있다고 할 수 있다(사실 ‘영토’ 개념 자체가 사법적인 것이지만). 여기서 어떤 잔인한 행위가 이루어지는지 여부는 법에 달려 있지 않고, 거기서 주권자 노릇을 하는 경찰이나 공무원의 윤리적 감각과 예의에 달려있다.

이와 같은 수용소는 우리 시대 정치의 패러다임이기도 하지만 또한 근대성이 정치적 공간을 규정하는 방식 때문에 생겨나고 있기도 하다. 확실히 수용소는 근대 정치의 모델이자 그것의 산물이다. 생명체로서의 인간을 등록하는 방식이 ‘국민=시민=인간’의 등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즉 ‘국가와 국민, 영토’로 이루어진 삼위일체 속에서 뭔가를 자리를 잡을 수 없는 존재가 ‘난민(refugee)’으로서 수용소에 수용된다. 그런데 이것이 ‘난민’을 근대 정치의 궁지를 만들어내는 주체로 재발견하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이런 이유로 아감벤은 ‘난민’ 개념을 근대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에서 탄생한 ‘인권’ 개념과 결별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법과 주권을 넘어서

근대 생명의 정치, 무엇보다 주권의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엑소더스’가 가능할까.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에 대한 아감벤의 독특한 해석은 이 점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던진다. 이 소설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자신에게 열려 있는 ‘법의 문’에 들어가고 싶었으나 평생 들어가지 못한 채 죽은 시골사람의 이야기다. 들어가고 싶은 곳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사실을 두고 많은 해석자들이 시골사람의 실패를 말했는데, 아감벤은 그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주장한다. 시골사람은 비록 죽음을 맞았지만 결국 ‘열려있던’ 법의 문을 닫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다소 억지스러워 보이는 이 주장은 나름의 근거를 갖고 있다. 아감벤은 15세기 유대교의 필사본에 있는 작은 그림을 제시한다. 그 그림은 카프카의 소설과 매우 흡사한 장면을 담고 있다. 메시아로 보이는 인물이 선지자로 보이는 청년의 안내를 받으며 도시에 들어오려 한다. 성문은 열려 있고 위에는 문지기도 보인다. 그런데 이미 열려있는 성문 쪽으로 청년은 메시아의 진입을 준비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미 열려 있는 문에 무엇을 하려고 그는 다가서는 것일까. 그것은 성의 문, 법의 문을 닫아버리는 것 아닐까. “왜냐하면 메시아는 문이 닫힌 다음에야 들어갈 수 있기에.” 실제로 카프카는 이와 비슷한 수수께끼 문장을 남겼다. “메시아는 그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때 도래할 것이다. … 그는 최후의 날에 오지 않고, 그가 오는 날이 최후의 날일 것이다.” 법이 중단되는 곳, 법의 효력이 멈추는 곳, 법이 불능화된 곳, 거기에 메시아가 온다.

“법이 하나의 순수 형식으로 유지되는 곳에서 법은 법 앞에 헐벗은 삶을 존속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이 작동을 멈추는 것이다. 법을 불활성화하고 불능화하는 힘은 ‘삶의 역량’에서 나온다. ‘삶이 그 형식에서 분리될 수 없는 삶’, 헐벗은 삶처럼 고립되지 않는, 공통의 집합적인 삶에서 그런 힘이 나온다. 법 앞에서 적나라하게 서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단지 한 생명체’로 고립되지 않고, ‘단지 드러난 바 그대로의 현실태’에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의 능력, 공동체가 필연적으로 갖는 잠재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감벤은 “이 삶-의-형식〔다양한 형식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삶〕이 벌거벗은 생명같은 것일랑 ‘인간’과 ‘시민’에 내버려두고, 도래하는 정치의 길잡이 개념이자 단일한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권의 너머, 벌거벗은 생명의 저편, 바로 공동의 삶, 코뮨의 삶이 정의되는 곳에서 그는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을 발견한 게 아닐까 싶다.

응답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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