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레옹’이란 별칭이 붙은 <아저씨>의 구도는 익숙하다. 범죄조직에 가족을 잃은 소녀와 ‘옆집 아저씨’의 응징이 골간이다. 차이점은 아저씨의 용모가 남다르다는 것. <아저씨>의 최대 매력은 역시 원빈이다. 조각 같은 얼굴과 우수에 찬 눈빛, 거기에 복근까지 완비된 원빈이 전광석화처럼 특공무술을 펼치는 모습은 무려 <의형제>의 강동원을 평범한 직장인처럼 보이게 할 지경이다. 조연들의 캐스팅과 연기도 아주 좋다. <여행자>에서 시선을 집중시키며 오롯한 존재감을 뽐내던 김새롬은 새치름한 매력으로 원빈과 묘한 화학반응까지 이끌어낸다. 영 화는 생각보다 하드보일드 하다. 폭력의 수위나 범죄조직에 대한 세부적 묘사는 장르마니아들을 만족시킨다. 대사는 위트 있고, 카메라 워크도 신선하다. 골프연습장 그물위로 떨어지는 숏이나 주차장 차량출동장면의 앵글이 예이다. 정교하게 합이 맞는 간결한 무술이나, 예기치 않게 화면에 틈입하는 날선 폭력도 놀랍다. <아저씨>는 액션장르의 미학적 성취를 높인 작품이자, 그간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원빈의 연기력을 알아보게 한 작품으로 평가될 것이다.
한편 아동을 대상으로 한 극악한 범죄조직에 맞서는 아름다운 아저씨의 활약을 그린 <아저씨>는 아동성범죄에 대한 공분을 지렛대삼아, 국가형벌제도를 강화하려는 대한민국의 무의식을 담고 있다. 관객들이 자체발광 원빈이 펼치는 잔혹하지만 스타일리시한 액션에 환호하는 것은 ‘아동을 보호해야한다’는 명분으로 아무리 무리한 국가형벌권도 모두 ‘아름답게’ 받아들이는 작금의 ‘국민정서’와 그대로 맞닿아있다.
1. 유사국가이자 유사아버지인 ‘아저씨’가 벌이는 ‘정의의 전쟁’
외롭고 가난한 소녀(김새롬)에게 ‘옆집아저씨’(원빈)는 유일한 친구이다. 마약을 빼돌린 엄마와 함께 소녀가 납치되자 ‘아저씨’는 소녀를 구하기 위해 마약을 운반하다 경찰에 검거된다. 하지만 곧 탈출하여 일당을 쫓는데, 이들은 마약과 장기매매를 행하며, 아이들을 납치해 마약제조, 운반, 수금 등을 시키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장기를 적출하고 폐기하는 악당들이다. 한편 경찰은 ‘아저씨’가 군 특수부대에서 특공무술을 연마한 뒤 국가정보업무를 수행하다가 국제산업스파이에게 가족을 잃고 세상을 등진 은둔고수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영화는 아동대상의 범죄조직과 전직특수요원의 대결을 그린다. 경찰은 처음엔 그를 수사하지만, 그의 스펙을 알고 난 뒤 그를 쫓으면서도 연민과 존경을 느낀다. 그의 싸움은 사실 경찰을 대리한 것이다. 경찰들이 빙 둘러싼 가운데 ‘아저씨’와 소녀가 포옹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보듯이, ‘아저씨’와 경찰은 보완관계이다. 유능한 전직공무원이 무능한 현직공무원을 대리하는 구도에서, 그는 현실의 국가를 압도하는 ‘잠재적인 국가’, 혹은 ‘꿈의 국가’를 재현한다. <추격자>의 전직경찰도 현직경찰을 대리하였지만, 성매매 포주인 그에게 국가의 환영은 존재하지 않는다. (부패)경찰이었던 전력은 추적능력의 알리바이일 뿐이다. 그러나 ‘아저씨’는 도덕적 흠결이 없으며, 유사국가의 자격을 지닌다. 국가에 의해 길러져 국가 기밀을 수호하려다 가족을 잃고, 국제적인 범죄조직에 맞서 마지막엔 태국인과 합을 겨루는 ‘아름다운 아저씨’는 ‘아름다운 국가’의 다른 이름이다.
아저씨는 유사아버지의 성격을 지닌다. 영화는 소녀와 ‘아저씨’가 어떤 관계인지를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알려준다. 첫째, 아동성애자로 보는 엄마의 시선. 둘째, 무관한 존재로 보는 동네사람의 시선. 셋째, (유사)아버지로 보는 문구점 노인의 시선이 있다. 영화는 엄마를 도덕성을 낮추고, 노인의 도덕성을 높인다. 엄마는 관능적이고 문란한 존재로 그려지다 변사체로 발견된다. 영화는 엄마를 소녀의 ‘나쁜 환경’으로 묘사할 뿐 그녀의 삶과 죽음을 동정하지 않는다. 소녀를 거지니 도둑이니 욕하던 동네사람들은 소녀가 그를 아버지라 지목해도 믿지 않았던 것과 달리, 절도를 눈감아 준 노인은 그를 아버지로 오인하며 아버지의 도리를 말한다. 영화는 그를 소아성애자로 보는 것은 저열한 오해이고, 둘의 관계를 의아해하는 것이 평균적인 통념이며, 그를 아버지로 보고 아버지의 책무를 일깨우는 것이 도덕적이라는 입장을 보인다.
유사국가이자 유사아버지인 ‘아저씨’와 레옹은 완전히 다르다. 이태리계 살인청부업자로, 공무수행은커녕 글을 몰라 은행거래도 한적 없는 레옹은 국가의 외부에 존재하며, 마지막엔 경찰(국가)과 맞선다. 레옹은 마틸다의 연인이다. 조숙한 마틸다는 레옹을 리드하며, 총기를 배우고, 유혹하며, 한 침대에서 잠든다. 이들은 성기접촉만 없을 뿐 동거커플이다. <레옹>은 죽음으로 사랑을 완성하는 남자의 순애보로, ‘정의를 위해 사회악을 응징하는 아버지-국가’의 이야기가 아니다. 반면 ‘아저씨’를 움직이는 것은 소녀에 대한 애정이 아니라, 연민과 정의감이다. 애정이 아님을 알리기 위해 국화꽃과 납골당으로 아내에 대한 애도가 강조된다. 그의 행동은 가족을 지키지 못한 상처와 분노에 기인한다. 가족에게 했던 ‘한번 안아보자’가 소녀에게 반복됨으로써, 그가 소녀에게 가족을 투사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의 특공무술이 작렬할 때, 관객들은 소녀에 대한 연민, 아동대상범죄에 대한 분노, 이웃에게 혈육의 정을 투사하는 정의롭고 ‘아름다운 아저씨’의 매력에 도취된다.
2. <맨 온 파이어>의 막가파식 포스트 911 정서
“중남미에선 1시간에 1명씩 아동납치가 일어나며, 그중 70%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자막으로 시작되는 <맨 온 파이어>도 소녀를 위해 불을 뿜는 아저씨의 활약을 그린 영화이다. 16년간 미군의 대테러임무를 맡아 제3세계에서 폭동진압작전을 펴던 크리시(덴젤 워싱턴)는 황폐한 삶을 살다가 멕시코로 흘러들어 백인소녀(다코다 패닝)의 경호원이 된다. 그는 막연한 죄의식을 느끼며 “우리가 한 짓을 신이 용서할 수 있을까” 읊조린다. 백인소녀는 그가 미국인이라는 것에 엄청난 안도감을 느끼며, 불가사의한 친근감을 표하며, 심지어 사랑을 심하게 갈구한다. 크리시와 그의 친구가 “세계를 하나로 만들 거래를 성사 시키려는 순간….”을 자랑삼아 늘어놓는 자리에서 소녀는 “신념을 잃은 수호자, 성 유다”의 목걸이를 선사한다. ‘세계자본의 파수병으로서의 미군의 신념을 잃은 수호자, 성 유다 크리시’가 소녀로 인해 ‘신념’을 되찾으려는 순간 소녀는 납치된다. 소녀가 죽었다는 말을 들은 그는 중화기로 무장한 채 소녀의 납치에 연루된 멕시코 토착세력(폭력조직+부패경찰+고위정부기관)에게 불을 뿜는다. 그의 폭력은 소녀를 구하기 위함도 아니고, 순전한 복수이다. 그는 세계자본의 일부인 멕시코 자본가의 딸을 수호하는 용병으로서의 신념을 되찾고, 이를 위해 죽고자 한다.
남미에서 아동납치가 빈발하여 부유층 아이들이 경호원 없이 학교를 갈 수 없는 이유는 극심한 빈부격차 때문이다. 10:90의 사회에서 안정적인 삶이나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얻지 못한 대다수의 빈민들에게 천문학적인 재산을 지닌 부유층 아이를 납치하여 몸값을 받아내는 것은 유일하게 목돈을 쥐어볼 기회로 여겨진다. 부유층은 위험에 대비하여 개인보안을 강화하고 사설폭력(용병)을 사들인다. 그러나 위협이 계속되고 비용이 높아지면 이를 유지할 수 없으며, 싼값에 노동력을 부리는 이점에도 불구하고 떠날 수밖에 없다. 즉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양극화가 극단적으로 진행되는 제3세계 국가에서 범죄는 일종의 산업인 동시에, 체제를 위협하는 테러나 폭동의 다른 형태이다. 크리시는 ‘성스러운 (세계자본의) 수호자라는 신념’으로, 그들을 잔혹하게 응징하며, 마지막엔 (사실은 살아있었던) 소녀의 목숨과 맞바꿔진다. 영화는 자본에 의해 고용된 용병이면서도, 자신이 수호하는 것이 성스러운 가치라고 믿는 미국 하층민 흑인남자의 죽음을 순교자처럼 그린다. 그는 살육의 와중에도 끊임없이 소녀의 환영을 떠올린다. 소녀는 피 묻은 자본주의의 대지위에 핀 한 떨기 이데올로기의 꽃이다. 자유, 순수함, 우정, 성스러움 등등. 미군출신 경호원이 백인소녀를 잃은 슬픔에 제3세계 정부와 민간인들을 상대로 성전(聖戰)을 펼치는 <맨 온 파이어>가 2004년 전미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영화는 911이후 ‘테러와의 전쟁’에 돌입한 미국의 정서를 정확히 대변한다. 이 영화미국은 실제로 탈레반 소탕이나 대량살상무기 반대를 명분으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와 같은 엄연한 독립국가의 정권을 범죄 집단으로 격하시켜 괴멸시키지 않았던가?
<맨 온 파이어>의 막가파식 포스트 911 정서의 대극에 <그랜토리노>가 있다. 주인공(클린트 이스트우드)은 미국 보수우파 백인 노동자로, 한국전쟁 때 살육을 벌인 일로 죄의식을 느끼지만, (크리시와 달리) 신을 찾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죄를 또렷이 응시하면서, 그것은 신에게 섣부른 용서를 구할 수도, 거대집단을 탓하며 희생자를 자처할 수도 없이 오롯이 자신에게 귀속된 업보임을 분명히 인식한다. 그에게 이웃 남매가 찾아온다. 그들은 베트남전을 계기로 미국에 이주한 몽족이다. 노인은 의기소침한 소년에게 자신감과 일을 가르치지만, 불량배들이 누나에게 참혹한 폭행을 가하자 노인은 복수심에 불타는 소년을 따돌리고 최후의 일전에 나선다. 그의 해결방식은 무자비한 복수의 불을 뿜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상대에게 폭력의 불을 뿜게 하는 것이다. 그의 유산 그랜토리노는 친손녀가 아니라 몽족 소년에게 남겨진다. 미국의 가치를 상징하는 그가, (백인소녀를 위해 유색인종에게 불을 뿜는 것이 아니라) 유색인종소년을 위해 무분별한 총구에 자기 몸을 내어줌으로써 진정한 속죄를 이루고 폭력을 종식시키는 <그랜 토리노>의 철학은 <맨 온 파이어>의 허위의식을 정면에서 반박하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맨 온 파이어>의 포스트 911 ‘정치신학’에 마취되어 있는 미국인들에게, 미국의 죄과를 똑똑히 보고 ‘건국의 아버지들’이 지향하였던 본원적인 미국의 가치를 회복하자는 제안을 <그랜토리노>를 통해 말하는 것이다.
3. 현실의 아저씨가 아름답지 않듯이 현실의 국가도….
<맨 온 파이어>가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미국의 제국적 무의식을 담고 있다면 <아저씨>는 ‘범죄와의 전쟁’을 벌이는 한국의 국민국가적 무의식을 담고 있다. 크리시에게 소녀가 성 유다의 목걸이를 주었듯이, ‘아저씨’에게 소녀는 ‘다 이기는, 암흑의 전사’ 카드를 준다. 이는 공권력에 대한 위임장이다. 최근 아동성범죄에 대한 공분으로 형량강화, 전자발찌, 보호감호, 신상공개, 화학적 거세 등의 조치가 쏟아지고 있으며, 전자발찌는 살인죄로, 신상공개는 일반성범죄자로 적용이 확대되었다. 영화 속 잔혹한 폭력이 소녀를 지켜야한다는 명분과 원빈의 용모로 모두 용서되듯이, 아무리 무리한 공권력도 아동보호의 명분과 과학적 이미지로 모두 용서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현실의 아저씨가 원빈처럼 아름답지 않듯이, 현실의 국가도 우리의 열망처럼 아름답지 않다. 과거 사회보호법이 치료의 의미는 사라지고 격리만을 강화시켰고, ‘범죄와의 전쟁’이 시국사범의 탄압으로 이어졌던 역사는 몰라도 좋다. 최근의 민간인 사찰만 보더라도 국가사법권 강화가 개인과 시민사회에게 어떻게 되돌아올지 짐작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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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내용을 모르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예고편을 보고 한국판 ‘맨 온 파이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두 영화 이름을 나란히 써넣어 검색을 했습니다. 검색결과를 보니 꽤 많은 분들이 이미 두 영화를 비슷하다고 생각하신 것 같더라구요.
이 글을 읽고 나서야 ‘맨 온 파이어’의 배경을 새삼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배우는 멋있었지만 사건은 그렇지 못한 이야기였구나 싶네요. ‘아저씨’는 아직 보지 않았지만 구도에 이미 혐의가 보이는지라(처음 이 영화에 대한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막연하게 품어왔던 그것을 글로 확인까지 하고 나니) 한번 챙겨 볼까 했던 마음이 사그라드는군요. ‘그랜토리노’나 찾아봐야겠어요.
비약적이라는 느낌도 들지만. 잘 보구 갑니다. ^^
솔직히, 글을 보면서 너무 비약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영화를 봤는데, ‘아저씨’ 는 아이 대상 범죄를 대상으로 한다기 보다는,주인공은 ‘걔 어딨어?’ 하면서 소녀를 ‘찾는’ 데 목적이 있지, 그 대상이 저지르는 범죄에는 사실 처음부터는 큰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너무 비약적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웠습니다. ^^; 또, 주인공 ‘아저씨’ 자체가, 범죄나 국가의 일을 하다가 자신의 가정을 상실한 사람이라는 점을 잊으신 걸 보면.. 약간 남성이나 국가 등에 대한… 편견이 강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전 여성입니다.. ^^;)
또, 성범죄를 대상으로 하는 내용은 별로 없었는데… 지나치게 보고 싶어하는 부분으로 보신다는 느낌이 듭니다.
쓰신 분이, 강제로 성범죄, 국가에 대한 폭력성에 너무 집중하신다는 느낌이 들었답니다. 저도 폭력성에는 민감한 사람이지만, 편향이 짙어 아쉬웠습니다..ㅠ 잘 보구 갑니다.
아름다운 아저씨의 폭풍간지 수트발과 촉촉한 눈망울에 빠져 넋을 잃고 봤는데 ‘유사국가’였군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그나저나 ‘원빈을 보호해야한다’고 외치고 싶을 뿐입니다. ㅎㅎ (다시는 ‘마더’의 도준이 같은 역으로 만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