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칼럼을 이렇게 써도 되는지 모르겠다. 오늘 글의 성격은 강호 제현들에게 드리는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러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앞으로 어떻게 공부하면 되겠느냐고 여쭙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요즘 북한의 세습을 계기로 다시 떠올랐다.
세습(世襲), 대대로 잇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세습이라고 말하면 무엇이 연상되는지. 아마 음울한 과거 어떤 시대가 떠오르거나, 낙후된 이미지가 겹쳐질 것이다. 이번에 20대 젊은 김정은이라는 사람이 북한(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차기 후계자로 떠오르면서, 다시 세습이란 말을 적지 않게 접하고 있다. 북한 정치체제의 왕조적 성격을 비판하던 사람들은 3대 세습이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 한층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21세기 휴전선 너머 저쪽에서 그런 일이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사실 때문에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기도 한 모양이다. 남북의 평화 정착을 목표로 일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런 당혹감은 별로 다르지 않는 듯하다. ‘한겨레21’에서는 아예 ‘이상한 나라 북한’이라고 표지 타이틀을 뽑았다. 거기 나온 인터뷰에는 들을 얘기도 있지만, 하나마나한 말도 많았다. 아무튼 이 일에 대한 느낌의 폭이나 색깔이 무척 다양하게 보인다.
지금 세습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북한의 세습 체제를 논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북한의 정권 세습이라는 사건이 우리의 주목을 끌고 있는 현실을 계기로 그동안 별로 제대로 다루어진 것같지 않은 ‘사람들이 권력을 부여 또는 위임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다. 다시 강조하지만 오늘은 질문이다. 역사학도로서 가지고 있는 의문 중의 하나는, 도대체 왜 어떤 시기에는 추장제(酋長制)이, 어떤 시기에는 왕정이, 어떤 시기에는 민주정이 유력한 정치제도로 등장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또한 이 질문에는 경계해야 할 획일성이 있다. 뒤에 말하겠지만, 이런 제도는 단계적으로 발달해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금 우리의 삶에도 중층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다소 아둔한 생각인지 모르지만, 나는 이들 정치제도 사이에 과연 어떤 우열이 있을 수 있는지 의심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은 이런 질문, 의문에 대해 도움을 받고 싶은 것이다.
민주주의 제도의 역사성
대개 근대 민주주의는 우월한 정치제도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태생이 아닌 능력이나 선거를 통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어떤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 합리화 과정, 즉 근대화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데 이런 합리화 과정이라고 보는 시각의 중심에는 ‘개인’이 있다. 나는 이 개인의 발견, 아니 재해석이 근대주의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개인은 무엇보다 소유권의 주체로서, 즉 노동력이든 상품이든 사고 팔 수 있는 주체 설정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의 자식이나 부모’가 아닌, ‘나’가 곧 근대 법치주의의 중심에 서는 것이다.
세습이 아닌 선거를 통해 한 나라의 정치를 맡기는 데는 이런 경제적, 철학적 배경이 있다. 아울러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은 고시(考試)를 통해 충원한다. 그래서 선거와 능력이 근대의 인재(人材)를 확보하는 주요 방법이 되었고, 거칠게 말하자면 이를 민주주의라고 한다. 당연히 여기에는 평등 이념이 결합한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대립적 성격을 말하지만, 이렇게 역사적으로는 매우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관찰이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어떤 경제적 토대, 사상, 사회생활이 결합하면서 만들어진, 즉 흔히 하는 말로 역사적 산물이다. ‘역사적 산물’이란 말은 그 사태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듯하지만, 한편으로는 상대화해서 볼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 시대의 조건에 눈을 돌리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에서 평등한 기회를 갖는 능동적 주체인 개인에 대한 착상이 폄하될 이유는 없다. 그런데 이 이상(理想)은 매우 오래된 인류의 희망이었다.
맹자와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찰
중국 산동성과 지중해 근처 아테네에 살았던 두 사람은 우리에게 재미있는 관찰의 결과를 들려준다. 이 둘은 살았던 시기도 비슷하다. 중국 고대 정치사에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요(堯)임금은 순(舜)임금에게 선위(禪位)했고, 순임금은 우(禹)임금에게 선위했다가, 우임금부터 왕조가 시작되었다. 하(夏)나라다. 이 사건을 맹자의 말로 요약해보자.
왕이라고 해서 맘대로 천하를 누구에게 줄 수 없다. 하늘만이 준다. 요임금이 죽자 백성들이 요임금의 아들 단주(丹朱)에게 가지 않고 순임금에게 모였고, 순임금이 죽자 순임금의 아들에게 가지 않고 우임금에게 모였다. 우임금이 죽었을 때 백성들이 익(益. 우임금을 도왔던 신하)에게 가지 않고, 계(啓. 우임금의 아들)에게 모였다. 백성들에게 끼친 덕(德)과 아들의 현불초(賢不肖)에 따라 그렇게 된 것이다. 이 말은 《맹자 만장상(萬章上)》에 나온다.
흔히 말하는 요순시절이란, 농사지으면서 정치를 맡아볼 수 있는 시대, 즉 요즘으로 치면 동네 이장 정도의 정치가 필요했던 시대로 나는 생각한다. 맹자는 선위와 세습 사이에 우열을 매기지 않는다. 또 그것이 결정되는 것은 인물과 사회적 조건이라는 점을 명시했다. 이를 맹자는 ‘천(天)’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맹자와 생각이 같았다. 그는 《정치학》에서 정치제도로는 왕정, 귀족정, 혼합정이 있는데, 그것은 인구(人口)나 지형 같은 자연적 조건이나 사회 구성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그리고 왕정이 왜곡되면 참주정(독재)가, 귀족정이 왜곡되면 과두제가, 혼합정이 왜곡되면 민주정이 된다고 보았다. ‘민주정’이 왜곡이라고 본 점이 특이하다. 그리고 참주정은 통치자 한 사람의 이익을 위한 체제이고, 과두정은 부자의 이익을 위한, 민주정은 빈자의 이익을 위한 체제라고 보았다.
이장 선거에 대한 기억과 추억
일단 두 사람 모두 정치체제 사이에 우열을 두지 않았다는 점, 특히 그 정치체제가 어떤 단계적 발전이나 진보의 소산이 아니라고 본 점을 기억해두자. 나도 이런 견해에 동의하는 편이다. 헌데 정치체제는 역사적 산물일 뿐 아니라, 동시에 존재할 수도 한다. 당연한 것이 사람에게 나라 차원의 제도만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마치 화두처럼 남아 있는 두 가지 예를 들어보자.
10여 년 전으로 기억한다. 강릉 근처 어떤 마을이 텔레비전에 방영된 적이 있다. 특집프로였다. 이유는 마을의 내분. 문 닫고 사는 일 없이 무척 사이좋게 지냈던 마을 사람들이 둘로 갈라지게 된 데는 바로 이장 선거가 있었다. 이장 선거에 두 사람이 나왔는데, 서로 지지하는 대상이 갈리다가 기어코 인신공격성 비난이 난무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같은 동네에 살면서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선거의 페어플레이나 결과에 대한 승복 등을 잣대로 이런 상황을 비난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질문은, 과연 이장까지 선거를 해서 뽑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라고 생각한다.
어릴 적 추억을 떠올리면, 우리집 사랑방에 어른들이 모였을 때 완구 할아버지가 ‘이번엔 상석이 아버지가 허지?’ 하면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고, 이어 ‘그랴, 이번에 고생 좀 혀!’ 하는 세광이 아버지의 재청(再請) 발언이 이어지면 특별한 문제가 없는 한 맡게 되는 자리가 이장이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는 동네라는 사회의 규모가 선위가 가능한 정도, 즉 순임금이 선위를 받을 정도이고, 서로 대략 알기 때문에 이런 방식의 합의로 맡을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뭔가 이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권 역시 그 집단의 규모와 작동 방식에 따라 제어될 수 있다.
다시 질문, 선거는 언제나 합당한가?
이장 선거와 비슷한 문제점을 낳았던 것이 총장 선거이다. 대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총장이 갖는 위상도 달라질 것이다. 그나마 학식과 덕망이 기준이라는 점에 이견이 없다면, 교수나 학내 성원들의 선거=투표로 총장을 선출하는 제도에 대해서도 이장의 경우처럼 의문을 던질 가치가 있다. 한때 모 대학의 총장 선거 때가 되면 서울 강남의 룸싸롱이 들썩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사실인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선거가 혼탁 정도를 넘어선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렇지만 선거조차도 얼마나 큰 희생과 노력을 통해 얻어졌느냐고 반문하는 분도 있다. 이해한다. 여성에게 선거권이 보장된 시기(1948년!)를 알고 나도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그런 반문이 내 질문에 대한 답변이 될 수는 없다. 총장을 선거로 뽑는 방식이 타당한지, 나아가 보통선거가 갖는 의미를 따져보았는지, 혹시 또 다른 획일화가 아닌지, 그 획일화를 통해 다른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는 집단이나 사회의 특성이 왜곡되는 것은 아닌지를 물어보자는 것이다.
또 하나. 선거는 자신을 내세워야 한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물론 약점이라는 말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즉, 단상에 나가 내가 잘났다고 내 스스로 말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역(周易)》 겸괘(謙卦. 地上山下, 즉 산이 땅 아래 있는 형상)를 들먹이지 않더라고 겸손과 공경을 빼놓으면 리더십은 매우 위험해진다.
정치학에 문외한인 처지에서 그간의 성과를 모르고 하는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투표로 상징되는 정치 참여방식이 마치 현실이나 규범의 측면에서 도달해야할 그 무엇이라는 목적 합리성과 가치 합리성을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것을 보면 내 질문이 무의미하지는 않으리라 여겨진다. 아울러 정치학이 맹자나 아리스토텔레스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다면, 분명 정치체제에 대해 내가 궁금하게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어떤 견해나 통찰이 있을 것이다. 일러주시기 바란다.
그래야 우리 애들이 매 학년 초마다 반복하는 반장, 부반장 선거가 얼마나 교육적 효과가 있는지, 앞으로 이 땅에서 주인노릇을 하는데 얼마나 기여하는지 대답할 수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는 얼마나 많은 리더십 부여 방식이 있는가? 논의가 그 리더십의 적절한 작동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야하지 않을까? 그것이 북한 세습에 대한 백 마디 논평보다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참고로,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바람은 나의 어머니’, ‘곰에서 왕으로’ 등 몇몇 책은 보았다. 자문, 책소개, 의견 두루 환영한다.
페이스 북을 검색하다가 이 글이 연동되어 있어서 들어와 보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제가 최근에 공부하고 있는 문제랑 연관이 되서 관심을 갖습니다. 근대의 여명기에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의 주관심이 바로 박선생님이 제기하신 문젭니다. 특히, 스피노자의 양대 정치저작인 ‘신학정치론’과 ‘정치학논고’는 홉스의 절대주권테제를 민주주의와 통치권의 절합이라는 관점에 비판하고 넘어서려는 노력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마키아벨리와 스피노자의 이러한 노력이 제도화된 정치체제가 대통령제라고 보는 것입니다. 해서 이와 관련된 책이 내년 상반기 예정으로 출간할 예정입니다. 그때 다시 한 번 찾아뵙겠습니다.
문장 중간에 ‘박선생님’은 ‘오선생님’의 오기입니다. 죄송합니다. 글 수정기능을 못찾아서 이렇게 정정합니다.
고맙습니다. 책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기픈옹달 and Dhandhan, Dhandhan. Dhandhan said: RT @zziraci: 세습이란 낡은 주제에 관해 우리는 일천한 지식을 갖고 있을 뿐. 세습이 나쁘다는 건 이야기 하기 쉬운데 세습보다 신거가 왜 좋은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기 힘들다. http://bit.ly/9aKr96 ‘세습’을 계기로, 질 …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ㅎㅎㅎ. 그냥 질문이었는걸요! ‘자문, 의견, 책소개’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