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OWS와 나의 친구들

- 심보선

OWS와 나의 친구들

– “I care about you” 나오미 클라인에게 큰 영향을 준 포스터의 문구를 읽어보세요…. 그 말은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말입니다. OWS의 사람들로 하여금 영감으로 가득한 인간성과 새로운 경제적 윤리를 소통하도록 하는 태도에 대한 말입니다. AAAC는 지구적 사회의 중심에 인간적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OWS의 목표와 함께 동양적 가치와 미학을 재발명하는 것을 미션으로 삼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뉴욕에 거주하는 Robert Lee가 최근 친구들에게 끊임없이 보내고 있는 단체 메일 끝자락에 매번 첨부하는 구절이다. 나는 그를 박사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만났다. 그는 Asian American Arts Centre(AAAC)라는 갤러리의 디렉터인데, 그곳은 동양계 예술단체와 예술운동을 주제로 하는 내 논문이 반드시 연구해야 할 대상이었다. 2000년대 초반 AAAC를 방문하여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하자, 처음에 그는 매우 의심스런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의 태도는 이해할만했다. 영어도 잘 못하는 한국인이 아시안 아메리칸 예술단체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이 납득이 가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나 한 달 정도 갤러리 내부 공사에 한 푼의 임금도 받지 않고 노력 봉사를 하는 내 모습에 감동을 했는지 어쨌는지 우리는 곧 친해졌다. 나는 Mr. Lee에서 Bob이라고 호칭을 바꿔 그를 부르기 시작했고 그는 내게 AAAC의 모든 것과 그의 속내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AAAC의 중요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갖게 됐다.
AAAC는 뉴욕의 차이나타운에 위치한 자그마한 비영리 갤러리다. 언제나 쪼들리는 재정상황 속에서 Bob은 거의 40년간 주류사회에 저항하듯 AAAC를 운영해왔다. 외부 펀딩은 불가피했지만 Bob은 주류 기관과의 파트너십이라든지 이사회 충원이라든지 컨설팅이라든지 하는 조직 혁신 전략을 고집스레 거부했다. 그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이 있었고 부정적인 평가가 없는 것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가 동양적 가치와 미학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외골수처럼 AAAC를 책임져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마지막으로 뉴욕을 방문하여 그를 만났을 때, 그는 몹시 힘들어 하고 있었다. AAAC는 미래를 장담할 수 없을 만큼 재정적으로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었다. Bob은 AAAC가 사라져도 기관의 핵심인 아카이브는 지켜야 한다며 그것을 승계해줄 다른 조직을 찾고 있었다(다행히도 아카이브는 아직도 AAAC가 보유하고 있다). 또 그때 그는 자전거를 타다 사고를 당해 뇌수술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매우 지쳐 있었다.
그러던 그가 Occupy Wall Street 운동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참여자가 됐다는 사실을 메일을 통해 접하게 되었다. Bob은 작년 11월경에 “Asian American Community March in Solidarity with Occupy Wall Street”이라는 제목의 메일을 보낸 적이 있다. 거기에는 이런 구절이 있었다.

아시안 아메리칸은 우리 사회의 부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운동에 오랫동안 참여해왔다. OWS 운동은 경제 침체와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불평등으로 인해 고통을 겪고 있는 다수의 미국인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만약 뉴욕시와 전체 미국이 사회적 안전망을 위협하는 예산 삭감의 길에서 빠져 나오지 않는다면 전체 뉴욕 인구의 13%를 차지하는 아시안 아메리칸 또한 그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없다. 아시안 아메리칸 커뮤니티는 우리 사회의 약자를 보호하고 세금 개혁을 요구하기 위한 연대에 동참하고자 한다.

이 문건에 서명한 이들 중에는 익숙한 이름이 몇 있었다. Bob을 비롯해 1970년대 뉴욕의 아시안 아메리칸 운동을 주도했던 핵심 인물들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들이 다시 뭉쳤나? 그 중에서도 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논문을 쓸 때 Bob 못지않게 중요한 인물이었던 Fay Chiang이었다. Fay는 뉴욕에서 1971년 아시안 아메리칸 운동이 출발하면서 설립된 Basement Workshop의 디렉터였다. 그녀는 액티비스트이면서 동시에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인데 현재 암과 싸우고 있으면서도 차이나타운에서 왕성하게 다양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다. 그녀는 10월에 한국을 방문할 예정이다. 내가 참여하게 된 국제 작가 교류 프로그램에 그녀를 해외 시인 자격으로 추천했는데 주최 측이 내 요청을 받아들였다. Fay는 초대 메일을 받자마자 나에게 메일을 보냈다. “아무래도 네가 추천한 것 같은데?”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초대를 수락했다. 예상한 그대로 Fay 또한 OWS 운동에서 자원 활동을 하고 있었다. 포스터와 배너 제작 외에도 리버티 광장의 OWS 키친에서 음식을 담당했고 경찰 진압 이후에는 그녀가 일하는 단체에서 주말마다 열리는 OWS 회의에 음식을 제공했다고 한다. 그녀가 올 가을 한국을 방문하면 우린 문학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미국의 OWS와 한국의 희망버스, 시청 앞 오큐파이, 대한문 분향소 이야기를 신나게 할 것이다.
2000년대 초중반, Bob과 Fay, 그 외의 아시안 아메리칸 문화예술 관계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내린 내 논문의 결론은 매우 비관적이었다. 뉴욕의 아시안 아메리칸 예술 기관들은 더 이상 운동 단체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전문화되고 파편화되고 항상적인 비상 모드로 운영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OWS에 참여하고 있는 Bob과 Fay를 보고 생각했다. 만약 그때 OWS가 있었다면 Bob과 Fay는 내 인터뷰에 어떻게 답했을까? 또 나는 OWS를 어떻게 논문의 전체 논지와 연결시켰을까? OWS 운동은 침체된 아시안 아메리칸 운동에 새로운 연대와 공동체의 감각을 불러일으켰을까? Bob은 메일에서 AAAC의 미션을 OWS와 연결시켜 다시 정의했다. 그러나 AAAC의 홈페이지를 방문해보니 미션은 예전 그대로였다. 무엇이 변했을까? 과연 변하기는 했을까? 여러 궁금증이 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긴 하다. 위의 사진은 Bob이 단체 메일로 보낸 사진들 중의 하나이다. 나는 사진들을 살펴보다가 Bob처럼 보이는 사람을 발견했다. 사진을 자세히 보니 아무래도 Bob이었다. 위의 사진에 표시한 붉은 원 안에 Bob의 얼굴이 있다. 그는 군중 전체를 부감으로 담으려는 듯 카메라를 머리 위로 들고 사진을 찍고 있다. 무엇보다 내 시선을 붙잡은 것은 그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랬다. 그는 행복해 보였다. 바로 그것이 내가 그를 인터뷰했을 때, 그리고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와 비교할 때 분명히 다른 점이었다. 그는 어쩌면 1970년대 이후 처음으로, 나이 60이 넘어, 뉴욕시의 한복판을 점거한 군중 속에서, 인종과 세대를 초월한 반자본주의적 저항과 연대 속에서, 다시금 행복해졌는지도 모른다. 내가 밥을 다시 만난다면 그에게 던지는 첫 번째 질문은 이런 것이리라. “Are you happy now?”

응답 1개

  1. 성북동비둘기말하길

    운동의 성과를 다른 곳에서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사람들의 표정, 그것이 다 말해주니까요. 당신은 행복하세요? 마치 운동을 시금하는 말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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