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멘붕이라서 행복해요

- 주노정

이 더위 잘 보내고 계십니까?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등줄기에 ‘땀’으로 된 강이 흐릅니다. 정말 ‘무지하게’ 덥습니다. 요즘 같은 더위에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무언가 깜박깜박 잊어버리는 일은 예삿일입니다. 이른바, ‘멘붕’이 오지않으면 다행이지요.

멘붕. 아실테지만 ‘멘탈(mental) 붕괴’의 약어입니다. 그 뜻을 굳이 풀어 설명해야하나 싶을 정도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신조어가 된 것 같습니다.

#뚜껑 열리던 날

‘행정대집행’에 맞서기 위해 많은 친구들이 두물머리로 가는 날. 저는 친구들이 떠나기 전에 먹고 갈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별 것 없었습니다. 멸치와 다시마를 우려내고, 고추, 애호박, 양파를 송송 썰고, 된장을 풀어 국을 끓였습니다. 그런데 끓이던 중에 말싸움이 났습니다. 왜 냄비 뚜껑을 닫지 않고 국을 끓이냐는 물음(혹은 짜증냄)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웃어넘겼을 ‘별 것 아닌’ 잔소리. “뚜껑 좀 닫고 끓여요.”라는 그 말이 마치 시비를 거는 듯, 빈정대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너는 사람들에게 가스비를 더 부담시키려는 나쁜놈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나쁜놈이라고 불러주니 진짜 나쁜놈이 됐는지, “알았어요. 덮을게요”하면 될 일에 점점 이상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뚜껑 조금 열고 쓴다고, 가스비가 나오면 얼마나 더 나올까’ 싶어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맞불을 놓았습니다. “요리 한창하고 있는데 기분 나쁘게 잔소리하면 요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잖아요. 그건 나중에 말해도 되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나서 한다는 소리가 “지금 당신이 한 말은, 갈 길 가는 운전사에게 옆에서 이리가라 저리가라 하는 거에요. 다시 말해서 운전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와 같아요”.

지금 생각하니 낯짝이 부끄러워지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냥 바로 냄비 뚜껑 덮고 국을 끓였으면 아무 갈등 없이 해결 될 문제였는데 말입니다. 날이 더워서 그랬든,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고 싶었든, ‘그때는 멘붕이었다’는 말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강정평화대행진에서

많은 친구들이 두물머리로 가서 ‘공사 말고 농사짓자’를 외치며 ‘전의’를 불 태우는 사이에 저는 제주도 강정마을에 다녀왔습니다. 2박3일이라는 짧은 휴가기간동안 말입니다(이 더운 여름 쉬지도 못하고 일하시는 분들에게 ‘짧다’는 말은 참으로 죄송스러운 말씀입니다만). 전국에서 온 여러 사람들과 함께 걷고 이야기하면서 휴가도 동시에 즐겨보자는 생각으로 강정평화대행진에 참가했습니다. ‘생업’으로 인해 모든 일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처음 2박 3일을 함께 걸었습니다. 날이 정말, 아니 ‘너무’ 좋았습니다. 파란 하늘을 가로 질러 내려쬐는 햇빛을 온 몸으로 그대로 끌어안고 걸어갔습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습니다. 첫째 날은 ‘초심의 힘’으로 견디고, 둘째 날은 걷는 길이 짧아서 버텼습니다(물론 가장 먼저, 함께 하는 사람이 없었다면 그나마도 못했을 일이겠지요). 그런데 종종 문제는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나서, 긴장이 풀리고 ‘방심’할 때 일어납니다.

둘째날 있었던 일입니다. 열심히 걷고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습니다. 그런데 걷는 내내 뙤약볕에 얼굴을 감싸주었던 고마운 수건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제1차 멘붕. 정신 못차리고 잘 챙기지못한 제 실수라고 생각하고 웃어넘기기로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바다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했습니다. 숙소에 평소보다 일찍 도착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정신없이 놀았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먼발치 놓아둔 짐(갈아입을 옷과 샤워 용품이 든)이 바닷물에 잠기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건 뭐지, 착시현상인가’. 걱정이 되어 또 정신없이 짐을 향해 풍덩풍덩 바닷물을 헤치며 뛰듯 걸어갔습니다. 도착해보니 그것은 이미 바닷물과 ‘부비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제2차 멘붕. 정신이 번쩍드니 발이 애려오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아마 뛰어오는 도중에 바다 밑에 있던 돌에 상처를 입었던 것 같습니다. 제3차 멘붕.

멘붕은 ‘밀물’과도 같이 ‘늘 그래왔던 것’이라도 미처 스스로 생각하지 못했을 때 일어납니다.

#’붕괴’된다는 것

‘멘탈 붕괴’라는 말에서, 저는 ‘붕괴’라는 단어에 주목해보고 싶습니다.
멘탈이 붕괴됐다는건 어떤 ‘사건’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스스로 자초한 일이든, 무언가에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일이든 말입니다.
멘붕상태가 되면 모든 사건들이 생각할 겨를 없이 후다닥 지나갑니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하는데 이상하게도 손만 대면 일이 점점 더 커집니다.
물건이 됐든 기억이 됐든 깨지고 부서지고 사라지고 없어지고,
당최 눈을 뜨고 있어도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눈은 보라고 있는 건데, 이해할 수 없는 일만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그런데도 저는 늘 ‘멘붕’하고 싶습니다.
‘멘탈 붕괴’의 어원(?)은 ‘붕괴’ 그 자체에 초점이 맞춰져
일종의 패닉상태와 가까운 부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만
저는 그 의미를 조금 다르게 보고 싶습니다.
붕괴됨을 통해 자신의 한계와 마주하고,
나아가 붕괴 이후의 삶을 스스로 고민하는 것.
삶이 무너진다는 건 다시 세우고 만들어 나갈 것이 있다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그것은 이전과는 다른 삶이 시작됨을 의미합니다.

이번 <위클리 수유너머> 128호에는 시를 통해 다른 삶을 꿈꾸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읽는이를 멘붕하게 만드는 ‘미래파’의 시를 읽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멘붕’ 이후의 삶은 어떨까요.

응답 4개

  1. 샛별말하길

    주노정 ㅎ.ㅎ어쩌다가 읽게 됐는데 글이 정말 재밌어요.

  2. 여강말하길

    아하! 멘붕이었네요.지금까지 가장 나를 괴롭혀 왔던 그 것들이…
    어떤 사건을 통해 스스로의 한계에 도달한다는 그 붕괴가 문제이군요. 남들에게는 전혀 아닌, 멀정한 일들로 전쟁속을 사는 것 같아 늘 속상해온 내 일상들이 멘붕과 관계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결코 의미없는 일은 아니다.. 멘토를 만나 반갑습니다.

  3. […] | 편집실에서 | 멘붕이라서 행복해요_주노정 […]

  4. 지나가다말하길

    음. ‘맨붕’이란 단어에서 정말 중요한 의미를 끄집어 내셨군요. 붕괴됨을 통해 자신의 한계와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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