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안전이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 숨(수유너머R)

초등학생 때였던가요,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가고 있었는데 어떤 아저씨가 뒤에서 나의 성기를 만지고 지나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린 나는 아저씨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나에게 똥침을 놓고 가지, 하며 의아해했죠. 아저씨가 나를 성추행했다는 건 커서야 알았습니다. 성인이 되고서도 몇 번 더 이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대낮에 북적대는 쇼핑가에서도, 귀가길 지하철 안에서도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더군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어두운 밤 골목길 귀가는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일입니다. 누가 내 뒤에서 발자국 소리라도 내면 그가 나를 지나치기 전까지 불안에 떨면서도 무서워서 뒤돌아볼 엄두를 못 내지요.

아마 많은 여성들이 나와 비슷하거나 더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했을 거에요. 제가 아는 한 여성은 어린 시절 지속적으로 삼촌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성폭력은 일상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일어났지만, 일어나지 않은 것으로 치부되었던 일.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성폭력에 대해 각종 언론사들이 터뜨려대는 기사와 정치권, 정부의 대응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나주 아동성폭력 사건 관련 기사가 약 한 달간 각종 포탈의 메인을 차지했습니다. 한 일간지(ㅈㅅ일보)는 이 사건의 피의자 사진을 잘못 게재하는 오보를 내기도 했습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는 성폭력 범죄자를 처벌하는 도구들을 발견하고 도입하고 강화하고 있습니다. 성범죄의 심각성에 관심을 기울이고 예방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분명 필요하고 환영할 일입니다. 친고죄 폐지 등 긍정적인 결론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처방책들의 방향이 조금씩 교묘하게 뒤틀려가는 게 보입니다. 남성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라며 성폭력을 옹호했던 이들이 똑같은 논리로 화학적 거세를 도입했고 더 나아가 물리적 거세 법안을 발의하려는 시도를 합니다. 과거 성범죄 수사과정에서 수많은 2차 가해를 해왔던 경찰이 불심검문 강화를 추진하구요. 신고를 해도 검찰에 고발되는 경우가 많지 않고, 재판을 한다고 해도 재판부에 의해 실형보다는 집행유예를 받는 게 더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헌데 법무부는 전자발찌 관리 인력과 예산을 확충하는 방안을 마련하겠다네요. 이 모든 새롭게 도입된 강력한 처벌도구들의 효과가 어떠한지는 따로 생각해보아야할 듯합니다. 성범죄 예방효과는 몇 년 후에 판가름 할 수 있겠지만 당장에 경찰력이나 사법권을 더 강화하는 효과는 확실해보입니다. 그 사이 우리는 더 불안해하겠지요. 어두운 밤길의 공포는 전혀 줄어들지 않을 거에요.

몇 달 전 언니에게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큰 조카가 학교생활을 많이 힘들어한다는 얘기는 전에 들었지만 그날 통화내용은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었어요.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상으로 정신건강검진설문을 했는데 조카가 관심군으로 분류되었다는 겁니다. 검사 결과 자살충동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나 언니가 학교로 호출되었다고, 언니는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언니네 집에 놀러갔다가 이후의 상황을 들었습니다. 큰조카는 학교에 배치된 전문 상담선생님과 2차 상담을 했다고 합니다. 자살시도를 해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조카아이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선생님이 그럼 어떻게 시도했냐고 물었습니다. “손으로 입을 막고 숨을 참았어요.” “그래서 어땠니?” “답답하고 무서워서 울었어요.” 이야기를 듣다가 웃음이 터졌어요. 왜냐하면요, 이건 나도 청소년 시절에 해봤던 거니까요. 그런데 이내 좀 씁쓸해졌습니다. 그때 나는 스스로를 관리군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니까요.

조카는 초등학교와 다른 폭력적인 중학교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학교 선생님들이 숙제 안 해왔다고 때리고 시험문제 틀렸다고 때린다고 합니다. 또래 사이의 폭행이 아니라 선생님의 폭행과 폭언, 조금 더 높아진 학습수준 때문에 힘들어 했습니다. 언니와 형부의 갈등도 조카를 예민하게 만든 요인 중에 하나였겠지요. 올해 전국의 초중고 학교에서 정신건강검진 설문을 실시했는데 응답한 전체 학생 중 30%가 관심군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그 중 한 명이 저의 조카였습니다.

보건복지부에서도 이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생애주기별 정신건강검진을 한다고 합니다. 대한민국의 자살율은 세계에서도 알아주지요. 청소년의 사망원인 1위도 자살이라고 합니다. 높은 자살율과 최근 잇따른 청소년자살에 정부가 관심을 가져 다행이긴 하지만 국민정신건강검진이 효과적인 대책인지는 물음표를 붙여봅니다. 정신건강검진을 하면 나의 정신건강정보가 고스란히 정부에 기록될 텐데요. 이제는 나의 머리와 마음의 이력까지 관리하려고 합니다. 그 이력이 정부, 보험회사, 제약사, 병원 등에 의해 어떻게 사용될지는…

서로 많이 달라 보이는 두 가지 상황을 떠올린 건 일련의 정책들이 더 강력하게 우리 개개의 신체를 통제하고 기록하고 관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쪽에서는 괴물을 만들어내면서, 한 쪽에서는 비정상의 범주를 만들어내면서 말이죠. 겁을 주는 방식으로요.

삶이 폭력적으로 멈추는 자리에 선, 참혹한 고통을 받거나 스스로 인생을 끝내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두렵습니다. 그 고통에 공감하면서도, 그것이 언제 나의 일이나 내 가족의 일이 되지 않을까 불안해합니다. 이제 권력은 새로운 땅을 발견했습니다. 우리의 불안과 공포이지요. 익숙하고도 낯선 땅입니다. 예전의 공포와 오늘의 공포는 성질이 다릅니다. 뚜렷한 적-북한이 있었던 공포였다면 오늘날에는 생존자체를 일상적으로 걱정해야하는 공포입니다.

이번호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공안체제를 다룹니다. 사람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자극해서 “사회를 보호해야한다”라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어느새 우리의 몸도 그 명분을 실현하기 위한 권력과 기술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죠. 그렇다면 되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권력의 입맛에 맞게 괴물과 비정상을 만들어내며 계속 불안해할 것인지, 불안과 공포를 뛰어넘어 삶을 건강하게 구성하고 통치할 수 있는 우리의 힘을 키울 것인지.

응답 2개

  1. 박카스말하길

    생존자체를 일상적으로 걱정하게 하는 것들이 뭔지 꼼꼼히 생각해보게 됩니다. 동시에 이전에 시설조사 나갔을때 수도권 둔지에 시설촌으로 보이는 곳에서 장애인, 이주노동자들은 콘테이너박스에서 지내고 주변엔 노인요양소들이 즐비하던 풍경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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