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지극히 일상적인, 그래서 더 서글픈 이야기

- ihunnyi


달맞이의 책꽂이
지극히 일상적인, 그래서 더 서글픈 이야기
– < 섬> 아민 그레더 / 김경연 옮김 / 보림

하얀 바탕에 진회색의 육중한 건물이 우뚝 서 있는 겉표지를 보는 순간, 스르르 손이 먼저 움직였어. 『섬』이라는 제목이 주는 느낌도 좋았고. 정현종이 그랬던가?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고. ‘가고 싶다’는 욕망을 일으켰으니 그에게 섬은 아름다운 공간, 희망적인 공간일 거야. 섬을 통해 사람들 ‘사이’를 유영하고 싶어 하니까. 사람과 사람을 이어준다는 점에서 보면 섬은 매개의 공간이요, 소통의 징검다리이기도 할 테지. 하지만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섬은 단절의 공간,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심연의 공간이기도 해. 그러니 이 책의 제목을『섬』이라고 적은 건, 정말이지 절묘한 선택인 것 같아.

이 책에는 ‘일상적인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려 있어. ‘일상’이란 말이 이렇듯 섬뜩하게 다가오는 것도 처음이야. 이방인에 대한 무관심과 배척, 끔찍한 횡포와 폭력이 우리 삶에서 부지기수로 일어나는 것이라니! 몸에 착착 감기는 것이라니! 하도 오래 씹어 내 살육의 역사가 고스란히 전이된 껌과 같은 것이라니!(오래 씹은 껌은 참 묘한 것 같아. 쓰레기처럼 여겨지지만 쓰레기는 아니고, 내 육체로 여기긴 뭔가 찝찝하지만 그렇다고 자신 있게 내 육체가 아니라도 내댈 수도 없고)! 아무튼 작가는 잔인하고 신랄하게 우리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치졸함을 끄집어내서 보여줘.

사건은 어느 날 아침 불현듯 일어나. 한 남자가 뗏목을 타고 표류해 오거든.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작고 왜소한 나체의 남자와 바로 그 다음 페이지에 등장하는 육중하고 시커먼 남자들의 대비는 ‘남자는 그들과 같지 않았습니다’라는 작가의 언술을 극명하게 보여줘. 무엇인가를 모의하듯이 등을 보이고 있는 남자들, 그들이 들고 있는 날카로운 농기구, 실룩거리는 입술. 검은 복장. 아민 그레더가 ‘사람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음에도, 그들에게선 왜 루쉰이 말한 ‘식인’의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일까? 그들이 들고 있는 농기구가 포크를 연상시킨다는 점도 참 기묘해.

그들은 이방인을 물끄러미 구경해. 그 남자를 어째야 좋을지 생각하지. 그들은 자기들 멋대로 남자도 섬이 마음에 들지 않을 거라고 단정 지어버려. 딱 한 사람, 어부만이 남자를 섬에 놔두어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어부가 남자를 섬에 두고자 하는 건 인간에 대한 예의 때문이 아니야. 남자가 죽으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거니까. 자신의 생존에 대해서 남자는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어. 그들에게 남자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들의 영역에 뛰어든 침입자일 뿐이니까.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철저하게 물화(物化)되어 버린 남자. 남자의 모습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물질적인 것으로 도착시하는 우리네 삶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해. 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것은, 남자를 물질처럼 취급하지만, 그들 또한 남자가 사람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거야. 남자가 소란을 피우자 어부와 사람들 모두 남자를 ‘우리에게 온 사람’이라고 표현하거든.

사람들은 남자를 염소 우리에 가두고, 문에 못질까지 해. 그러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가. ‘지금까지 살던 대로 계속.’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남자가 마을에 나타나. 이 장면의 그림은 정말 기막혀. 뭉크의『절규』를 연상시켜. 극대화된 흰 자위, 벌름거리는 콧구멍, 파란 힘줄이 돋은 손이 공포에 사로잡힌 여자의 모습을 아주 잘 드러내고 있거든.
남자는 단지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좀 얻을 생각이었는데, 그만 소란이 일어나고 만 거야. 다시 의견이 분분해. 어부는 남자를 도와주자고 하고, 식료품 가게 주인은 자신들에게 온 사람을 모두 먹여 살리다가는 자신들이 굶주리게 될 거라면서 반대해. 그러자 어부는 남자를 일꾼으로 쓰자고 제안해. 하지만 남자에게 밥벌이를 할 수 있도록 해 주자는 미명과 이곳 사람을 쓰는 것보다 돈을 적게 주어도 되니 경제적일 거라는 얄팍한 계산이 만들어 낸 기막힌 술책은 성공하지 못해. 사람들에게 남자는 식당 종업원도, 목수도, 짐 마차꾼도, 성가대에도 어울리지 않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물질이니까. 어부는 다시 사람들을 설득해. ‘그렇다면 모두 힘을 모아 함께 보살펴 주는 수밖에 없다고. 우리에게는 책임이 있다’고. 그러자 사람들은 돼지들에게나 던져주던 음식을 던져준 뒤, 남자를 염소 우리에 다시 가둬.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했으니,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한 거지.

그런데 참 희한하지. 남자를 가두었는데도, 이방인을 격리시켰는데도 불안은 사라지지 않아. 그들에게 남자는 예기치 않았던 운명이었던 거야. 어느 날 갑자기 들이 닥쳐서 끊임없이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불편한 존재. 그들이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인정하지 않았지만 남자가 섬에 머물게 된 바로 그 순간부터 이미 남자는 그들의 삶 깊숙이 들어와 있었던 거지. 이제 남자는 낮에도, 밤에도,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사람들을 찾아 와. 아이들을 겁에 질리게 하고, 경찰관에게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일깨우고,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해. ‘낯선 자가 퍼뜨리는 공포’로 인해 섬 전체가 불안감에 사로잡히지.

공포(恐怖)는 어떤 대상에 대해 두려워하며, 관계를 맺기 싫어하는 거야. 사람들은 보통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 즉, 절대적인 존재인 신이나 자신보다 힘이 세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 공포를 느낀대. 이방인(異邦人)이 유대인이 선민의식에 사로잡혀서 그들 이외의 다른 민족을 얕잡아 부를 때 쓰는 말이었다는 점과 연결시켜 보면 참 흥미로워. 얕잡아 보는 존재인 이방인에게, 왜 사람들은 자신보다 우월한 존재에게서나 느끼게 되는 공포를 느끼게 된 걸까? 공포를 느끼게 될까 봐 두려워서, 자신들보다 우월한 존재라는 걸 알게 될까 봐 겁이 나서 지레 이방인이라고 얕잡아보고 배척하는 건 아닐까?

사람들은 다시 쇠스랑을 들고 모여들어. 염소 우리로 가서 남자를 결박해서 그가 타고 온 뗏목에 태워 파도 속으로 떠밀어 버려. 그런 다음 어부의 배까지 불태워 버리지. 남자를 그 섬에 두게 한 죄를 물어서. 어부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정작 자신들이었으면서도 어부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어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몇몇 사람들의 입을 막는 거야. 섬 둘레엔 높디높은 장벽을 쌓고, 밤낮으로 바다를 감시할 수 있는 탑도 세워. 갈매기나 가마우지도 쏘아버리고. 섬 바깥에 있는 그 누구도 섬 안의 소식을 들을 수 없도록.

공포를 유발한 남자를 추방하고 났는데도, 뭐가 그렇게 두려웠을까? 섬 안의 소식이 나가지 못하도록 세운 장벽이, 바깥의 소식도 들여오지 못한다는 걸 그들은 몰랐을까? 스스로 쌓은 장벽으로 인해 정작 고립된 것은 자신들이라는 걸 정말 몰랐을까? ‘불안감이 온 섬을 뒤덮은 위협적인 상황’은 이방인 남자가 아니라, 남자를 철저하게 물화시켰던 자신들이 가져온 재앙이라는 걸 정말 몰랐을까? 그 모든 걸 몰랐던 건 아닐 게야. ‘그렇지 않아도 힘든데, 다른 사람의 안녕까지 신경 쓸 수는 없다’는 지독한 이기심이 발현된 때문이겠지. 구차한 일상을 핑계대면서 철옹성을 점점 더 높이 쌓아가는 우리처럼.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한 건 ‘이방인’일 수도 있고, 어느 날 갑자기 닥친 ‘운명’일 수도 있고, 내 안에 쌓아놓은 수많은 장벽이거나, 섬일 수도 있어. ‘이방인’을 이방인으로 생각하는 한, ‘운명’을 어느 날 갑자기 몰려와 내 일상을 뒤흔든 불유쾌한 것으로 치부하는 한, 공포를 떨구긴 쉽지 않을 거야. 수없이 많은 낯선 것들이 파도처럼 시시때때로 밀려오는 게 바로 우리네 일상이요, 삶이니까.

이방인, 소통, 장벽, 운명, 공포……. 이 책은 참으로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해. 가뭇없이 사라져 가는, 사라져 버린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게 하거든.

– 달맞이

응답 4개

  1. 둥근머리말하길

    이제야 오셔서는.. ‘네 맘을 들여다봐라, 담장을.’ 하고 말해주시다니.. 이런 낯선 물음이 일상이어야 한다는 말씀 참 고맙습니다요.

    • 달맞이말하길

      둥근머리샘. 머리속이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지 몰라요. 까무룩 까무룩 잠만 쏟아지고, 활자도 눈에 안 들어오고, 덩치에 안 어울리게 병든 닭처럼 빌빌거리고 있어요. 녹음기처럼 맨날 같은 말만 토해내는 것 같고, 것도 가슴이 아닌 머리로만.
      참, 이정석 샘의 [소파의 양초귀신과 연암 호질의 해학 공간 연구 비교]라는 글이 있는데, 참 재미있게 읽었어요. 시간 남 함 봐요.
      늘 응원해 줘 고마워요!

  2. 부우말하길

    내 안에 쌓아 놓은 수많은 장벽, 하나 하나 허물어야 할텐데… 꼼꼼히 읽어봐야겠습니다. 변함없이 좋은 책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더운 날 건강하세요~

    • 달맞이말하길

      부우님, 감사합니다. 말만 그렇게 하지, 저 역시 하루에도 수많은 장벽을 새롭게 치면서 삽니다. 읽는 것과 해석하는 것, 사는 일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 글을 쓴다는 일이 ‘사기를 치는 게 아닌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사기를 쳐도 되나 싶기도 합니다.’
      부우님도 건강하게 즐겁게 지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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