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봉준의 언더라인

우리는 정말 호모 사케르인가?

- 만세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에 대해서

1. 호모 사케르

신문을 보다 숨이 턱 막힐 때가 있다. 2009년 용산에서 무리한 진압으로 철거민 다섯 분과 경찰관 한 분이 돌아가셨을 때가 그러했다. 국가 권력에 의해 사람이 죽었지만, 국가 권력은 결코 처벌받지 않는다. 용산 참사만이 아니다. 이주노동자에 대한 과잉 단속으로 사람이 죽어나갈 때, 테러범을 잡는답시고 엄한 사람을 폭행하고 증거도 없이 수용소에 가둘 때, 그러고도 당당한 ‘놈’들의 모습을 볼 때, 숨이 막히다 못해 돌아버릴 지경이다. 우리는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국가 권력을 고발하고 규탄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당장 이 미친 짓을 멈추라고, 정신 차리라고. 국민의 삶과 행복을 책임지고 증진시키는 정상적인 국가로 다시 돌아오라고.

그런데, 정말로 이런 일들은 국가 권력이 ‘미쳐서’, 그러니까 일시적으로 비정상이 되어서 일어나는 일일까?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오히려 이것이 국가권력의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이라고 주장한다. 법이 국가권력에게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권한을 보장한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헌법은 인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야 한다고 명시한다. 거꾸로 국가가 완전히 법 외부에 존재하기에, 실정법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도 아니다. 국가권력은 늘 법과 질서에 근거를 두고, 그것을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작동한다. 아감벤에 따르면 국가권력은 법 외부도 내부도 아닌 식별되지 않는 영역을 창출함으로써 작동한다. 즉 분명 법질서 외부이지만, 그런 방식으로 법질서에 포함되어 있는 독특한 영역을 만들어 냄으로써 작동한다는 말이다.

국가 권력에 의해 끔찍한 일을 당하는 이들은 많은 경우 이처럼 법 외부도 아니고 법 내부도 아닌 독특한 영역에 위치하고 있다. 예를 들어 미등록 이주노동자를 보자. 그들은 20년 넘게 20만이 넘는 숫자를 유지하면서 한국 사회에 살고 있지만, 법질서 외부에 존재한다. ‘미등록’이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법에 따르면 존재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법질서 외부의 존재’라는 자격으로 한국 사회에 포함되어 있다. 이런 독특한 상황은 이주노동자가 끔찍한 일을 당하도록 조장한다. 미등록 이주노동자에게는 폭행을 하거나 임금을 체불해도 무방하다. 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만약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이를 참지 못하고 경찰서로 달려가면, 도리어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처벌을 받게 된다. 행위 이전에, 존재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이런 존재를 “호모 사케르”라 부른다. 호모 사케르는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지만 죽여도 되는 생명’이다.(175) 이는 호모 사케르가 처한 이중적 배제의 상황을 묘사한다. 이들은 인간 법질서 외부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죽여도 상관없다. 하지만 희생제의에 사용되는 제물들처럼 완전히 인간 법질서를 떠나 신의 질서로 편입되지도 않는다. 그들은 법질서의 외부에 있는 방식으로 법질서에 포함되어 있다. 그렇기에 희생물로 바칠 수도 없다. 즉 법질서 외부로 추방된 채 여전히 사회에 존재하고 있기에, 무슨 일을 해도 상관없고 심지어 죽여도 무방한 존재. 아무런 권리 없이 단지 생 그 자체만 가진 벌거벗은 생명. 배제된 채 포함되어 있는 존재. 이들이 호모 사케르이다.

아감벤이 보기에 국가권력, 즉 주권은 본질적으로 호모 사케르를 창출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국가의 최고 권한인 주권은 전통적 주권이론이 말하는 것처럼 단순히 법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법을 멈출 수 있는 권한, 법을 멈추고 예외 상황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이다. 호모 사케르는 바로 이런 예외 상태에 처함으로써 모든 권한을 박탈당한 벌거벗은 생이다. 이들에게는 무슨 짓을 해도 된다. 하지만 여기서 예외는 완전히 법질서 외부를 말하지 않는다. 예외는 “무언가를 배제시킴으로써만 그것을 포함하는 이러한 극단적인 형태의 관계”(59)이다. 호모 사케르는 외부의 존재라는 낙인을 쓴 채 체제 안에 존재하고 활용된다. 요컨대 주권은 법질서를 중단시키는 방식으로 법을 가동하는, 생을 법질서 외부로 추방하는 방식으로 법질서에 포함하는 권한이다.“벌거벗은 생명의 창출은 곧 주권의 근원적인 활동이다.”(177)

아감벤의 이러한 통찰은 법질서 안에서 버젓이 이루어지지만, 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국가권력의 끔찍한 행위들을 설명해준다. 유태인 학살이나 생체 실험에서처럼 법질서 외부에 있지만 그런 방식으로 포함되어 있는 존재, 살 가치가 없다고 딱지가 붙여지는 방식으로 사회에 존재하는 이들은 정확히 이런 주권의 본성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또라이’라 공인된 나치(Nazi)만이 아니라 같은 시기 ‘자유세계의 지도자’인 미국에서도 버젓이 생체 실험이 행해진 사실은, 이것이 주권의 ‘정상적’ 작동 양상임을 증명한다. 아감벤은 법을 넘나드는 국가의 만행에 할 말을 잃은 이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법과 자연이 식별되지 않는 영역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국가의 본성입니다.”

2. 투박한, 너무나 투박한

아감벤이 수용소가 주권권력의 본성을 보여주는 근원적 장소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수용소는 법 내부에 있지만, 그 안의 존재들은 모든 법적 권리를 박탈당했다. 그렇기에 수용소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322) 수용소는 벌거벗은 생을 대상으로 하는 권력의 본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곳은 법적 상태와 자연상태가 뒤섞인 공간이다. 아감벤의 논의는 이처럼 법과 자연 혹은 제헌권력과 제정권력을 대립쌍으로 가정하는 기존 정치학의 구도를 가로지르며, 그런 의미에서 분명 독창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감벤에 열광하고 그가 국제적인 스타 이론가로 부상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열광에 동참하기에는 어떤 찝찝함이 가시지 않는다.

가장 먼저 과연 엄밀한 의미의 호모 사케르가 현실에 존재하느냐는 의문을 지울 수 없다. 앞서 말했듯 호모 사케르는 사회 안에 있지만 죽여도 상관없는 존재이다.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인간이 이런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물론 권력은 많은 이들을 죽이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권력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그가 ‘죽여도 상관없는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주노동자는 법 외부에 존재하지만, 죽여도 괜찮은 존재는 아니다. 용산 참사가 불러온 광범위한 저항은 오히려 국가권력이 누군가를 쉽게 ‘죽여도 괜찮은 존재’로 선포하지 못함을 증명한다. 엄밀한 의미의 호모 사케르는 과거의 유태인 수용소나 현재의 관타나모 수용소 같은 소수의 공간에만 존재한다. 물론 아감벤이라면 현재 호모 사케르가 현실화 되어 있지 않다 해도, 우리는 모두 “잠재적 호모 사케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232) 하지만 유신에 대한 저항과 정권의 몰락이 잘 보여주듯, 계엄 같은 상황으로 비로소 ‘현실화된’ 주권권력과 마주한 사람들조차 쉽게 ‘호모 사케르’라 말하기 힘들다.

물론 ‘죽여도 되는 존재’라는 정의에 집착하는 대신, 호모 사케르가 가진 위상학적 특이함에 주목함으로써 현실권력을 설명하는 데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위상학적으로 호모 사케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문제는 여러 가지이다. 먼저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은 지나치게 넓고 투박하다. 그것은 권력에 영향받는 존재들이 가지는 차이점을 망실시킨다. 호모 사케르의 위상학적 특이함을 강조한다면, 중증장애인 역시 호모 사케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분명 사회 내에 존재하지만, 다른 권리는 물론이고 가장 기초적인 신체 이동권 조차 보장받지 못한 채 수십 년간 집안이나 시설에서 감금되어 살아간다. 이들 역시 사회에 포함되어 있지만 법 바깥에 존재하는 호모 사케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이주노동자와 중증장애인은 뚜렷한 차이를 지닌다. 법의 관점에서 위상학적 위치가 동일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들이 권력에 의해 다루어지는 방식이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효과, 나아가 이들이 거기에 저항하는 양상은 제각각이다. 이주노동자들에게 권력은 주기적인 ‘단속추방’으로 작동한다. 이를 통해 나타나는 효과는 ‘저임금 노동력’의 창출이다. 즉 ‘위험한 일을 마구 시키고 심지어 임금을 체불해도 뒤탈 없는 존재’가 만들어진다. 이를 통해 기업은 직접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누린다. 반면 중증장애인의 경우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은 ‘보호’라는 이름의 ‘감금’이다. 이를 통해 권력은 직접적인 경제적 이익을 노리기보다, 사회의 ‘정상성’을 확립하는 효과를 꾀한다. 즉 중증장애인을 ‘병신’이자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낙인찍고 감금함으로서, 사지 육신을 지니고 노동하는 삶이 ‘정상적’이라는 사회의 특정한 합리성을 창출한다. 하지만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은 이런 차이를 망실시키고, 단지 이들이 똑같이 비참한 처지에 놓여 있음만을 강조한다.

나아가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은 비참한 이들에 대한 동정과 슬픔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들이 가진 저항의 힘을 포착하지도 제시하지도 못한다. 아감벤 논의에서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의 일차적 기능은 주권권력의 본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들은 권력에 대한 저항력을 전혀 갖지 못한 존재로 묘사된다. 호모 사케르는 권력 앞에 생명 자체만을 갖고 서있는 비참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힘없는 존재이다. 여기서 우리는 주권권력의 잔혹함을 깨닫는 동시에 뼈저린 무력감을 느낀다. 그렇기에 어떤 주체를 ‘호모 사케르’라 묘사하는 것은, 그들이 처한 비참하고 열악한 상황을 ‘고발’ 하는 데에는 유용하지만, 그들이 가진 힘을 포착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중증 장애인을 호모 사케르라는 틀을 통해 보면, 그들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벌거벗은 삶’으로 드러난다. 이는 시설 안에 감금된 장애인의 비참한 삶을 고발하고 분노를 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들이 보여주는 폭발적 저항과 투쟁을 볼 수 없게 만든다. 거꾸로 이주노동자나 중증장애인 같은 이들이 보여주는 폭발적인 힘과 저항들은, 법적 위상을 근거로 누군가를 비참한 존재, ‘호모 사케르’라 칭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지 질문하도록 만든다. 법적 위상으로는 호모 사케르라 해도 좋을만한 이들이, 주권권력을 증명하는 대신 거꾸로 그것에 도전하는 강한 힘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이 가진 이런 약점은, 아감벤이 가진 논의 구조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엄밀히 말해, 아감벤의 권력 설명은, 분석이라기보다는 묘사에 가깝다. 아감벤은 주권권력이 호모 사케르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작동한다는 사실을 여러 각도로 설명한다. 때로는 홉스 같은 전통적 주권론자의 논의 속에 자연상태와 법의 상태가 혼합되어 있음을 드러내고, 때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성을 빌어와 “작동을 멈추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힘”의 존재를 설명한다. 고대 로마 가부장이 가졌던 생사여탈권에서부터 최근의 생체실험에서까지 폭넓게 호모 사케르와 주권을 읽어낸다.

이런 복잡하고 현학적인 설명을 조금 폭력적으로 요약하면, 그것은 “주권은 원래 그렇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즉 유태인 학살처럼 예외 상태를 창출함으로써 작동하는 독특한 권력 작동을 보고서는, “권력은 원래 그렇다. 예전부터 그랬다. 수많은 주권논의에 숨겨진 것이 바로 이런 형태의 권력 작동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엄밀히 말해 분석이 아니라 묘사다. 분석이란 그런 특이한 형태의 현상이 어떤 원인에서 일어났으며 어떤 효과를 일으키고 있는지 서술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감벤은 그저 그것이 주권의 ‘본성’이라 말한다. 그리고 ‘원래 그런’ 근거를 여기저기서 끌어오고 있을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아감벤에게 “권력은 왜 예외를 창출하면서 작동합니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 그는 “권력은 원래 예외를 창출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3. 주권에서 생명권력으로

오해하지 말길. 그렇다고 아감벤의 이론이 무가치하다는 말은 아니다. 무엇보다 아감벤은 이제껏 정치나 권력의 사유에서 포착하지 못했던 영역을 드러낸다. 법이 작동한다고 말하기도, 그렇다고 완전히 법 바깥에 있다고 말하기도 애매한 여러 권력의 양상이 그것이다. 그가 수차례 강조하는 ‘비-식별역’이란 바로 이를 뜻한다. 하지만 아감벤처럼, 그것에서 권력의 본성을 읽어내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설명해야 할 대상을 설명의 근거로 치환하는 일에 다름 아닐 것이다. 문제는 아감벤이 보여준 바로 그곳에서 ‘묘사’가 아닌 ‘분석’을 시작하는 것, ‘비-식별역’을 식별할 수 있도록 사유를 전개하는 것이다.

나는 푸코의 생명권력이 여기에 유용한 도구가 되리라 생각한다.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권력을 인용하면서, 푸코가 생명이 정치의 주요한 대상이 되었음은 포착했지만, 구체적으로 주권이 생명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고찰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엄밀히 말해 이는 푸코의 문제의식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푸코의 생명정치는 주권이 생에 어떻게 접근하는지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권이라는 전통적인 권력 설명 방식을 넘어 생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그리고 푸코의 이런 시도는 여전히 ‘주권’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아감벤을 극복하는 데 좋은 도구가 된다.

푸코의 방법을 따라 아감벤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근대권력을 ‘죽이는 권력’이 아니라 ‘살리는 권력’으로 파악해야 한다. 아감벤이 말하는 생명권력은 사실상 ‘죽이는 권력’이다. 아감벤은 모든 권력 현상에서 예외 상태를 선포해 호모 사케르를 만들겠다는, 그래서 생을 벌거벗게 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하겠다는 주권의 동일한 협박을 목격한다. 반면 푸코는 근대 생명 권력은 단순히 생명을 억압하는 권력이 아니라, 이를 유용하게 길러내는 권력이라 지적한다. 19세기 이후 권력은 단순히 죽음을 협박하는 것이 아니라, 유용한 노동자, 정상적인 성 행위자, 이성적 인간을 길러낸다. 물론 이는 권력이 더 이상 사람들을 죽이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거꾸로 그런 죽음조차 어떤 ‘효과’를 낳는지, 다른 인민을 길러내는 데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봐야 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권력의 적극적(positive) 측면에 주목함으로써, 생명권력은 아감벤의 투박함을 극복한다. 즉 어떤 권력 현상에서건 ‘예외 상태에 처하게 만들어 죽게 만드는’ 단일한 주권의 권능을 보는 대신, 그 현상이 일으키는 효과와 이를 통해 육성되는 생명의 양상을 세세하게 분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감벤에게는 19세기의 주체이건 20세기의 주체이건 그들은 벌거벗은 생의 위협에 처한다는 점에서 모두 호모 사케르이다. 반면 푸코에게 19세기의 주체는 특정한 정상성을 내면화함으로써 길러지는 규율된 주체이지만, 20세기 이후의 주체는 자기 스스로 목표를 설정하고 성취하기를 요구받는 기업가적 주체이다. 이론의 목적이 권력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작동하는 권력의 양상과 허점을 파악하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이라면, 어느 쪽이 보다 유용한 태도인지 말할 필요가 있을까?

보다 근본적으로 생명권력은 권력을 관계로 정의함으로써 주권을 극복한다. 주권은 권력에 특정한 중심이 있다고 가정한다. 그 중심은 지고한 권한을 갖고 있다. 권력 현상은 그런 중심이 발휘하는 능력이다. 아감벤 역시 이런 가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주권을 입법권으로 정의하는 전통적인 논의와 달리, 그것을 ‘예외상태 창출권’으로 정의할 뿐이다. 이런 주권이론에서 권력 행사는 모두 동질적이다. 모두 주권이라는 동일한 권력이 발휘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감벤에게는 로마 시대 가부장의 권리도, 프랑스 혁명에서의 혁명정부도, 나치 정권도, 미국의 생체 실험도 모두 이런 ‘예외상태 창출’로 설명된다.

하지만 이주노동자와 중증장애인에게 가해지는 권력이 서로 다른 것처럼, 이들은 결코 모두 동일한 사태가 아니다. 왜냐하면 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특정한 중심이 발휘하는 권한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소가 맺는 ‘관계’에 따라 만들어지는 경향이기 때문이다. 이 관계에는 법을 포함한 여러 요소가 개입한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에서, 죄수에게 가해지는 권력에는 단지 법만이 아니라, < 죄수와 간수를 관통하는 시선의 배치>, < 독방이라는 건축적 양식>, < 법률위반자를 비행자로 파악하는 정신의학> 등이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 좋은 예다. 이런 관계가 달라지면, 권력은 전혀 다른 형태로 작동한다. 특정한 권력 현상마다 거기에서 구성되는 주체의 양상이 다양함은 그 때문이다. 그렇기에 문제는 법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도, 법인 동시에 법이 아닌 비-식별역을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구체적으로 법을 포함한 여러 가지 요소들(지식, 기술, 건축 등)이 특정한 관계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권력을 작동시키는지 포착하는 것이 필요하다.

저항은 바로 이처럼 지금 작동하고 있는 권력의 양상을 세세하게 파악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어떤 요소를 통해 작동하고 있는지, 어떤 기술과 전략이 이를 관통하고 있는지 파악해야, 그 허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저항은 하나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주권을 공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저항은 각 권력 현상마다 어떤 특이한 관계가 작동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이를 다른 방식으로 작동시킬 방법을 고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감벤의 논의는 분명 독창적인 이론이다. 그것은 이제까지의 담론이 포착하지 못한 현상을 드러낸다. 아감벤은 법으로 설명이 안되는, 그렇다고 완전히 법 바깥에 있다고도 말하기 힘든 권력 현상에 주목한다. 그리고 이것이 수많은 현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는 입법권을 권력의 궁극적 권한으로 보고, 법적 개념으로 권력을 환원했던 전통적 주권이론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하지만 그는 법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수한 권력 현상을 규명하기보다는, 법과 법 외부가 뒤섞인 ‘비-식별역’을 가정함으로써, 그리고 ‘비-식별역’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을 주권과 법의 본성이라 재정의함으로써, 다시 모든 권력 현상을 하나의 설명으로 환원한다. 이는 주권과 법에 대한 조금 특이한 정의가 될 수는 있지만, 주권이 가정하는 ‘권력현상의 동질성’이나 ‘죽음으로 환원되는 권력’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이는 논의의 타당성을 저해하는 것은 물론, 정치적 가능성까지 차단한다.

그런 의미에서 아감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답이 아니라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제기한 특이한 권력 현상에서, 죽음의 권력이 아닌 살리는 권력을 읽어내는 것. 각각의 현상이 드러내는 여러 권력의 세밀한 관계를 읽어내는 것. 주권에서 생명권력으로 이행하는 것. 그것이 아마 아감벤을 넘어 다시금 권력과 저항을 사고하는 자들에게 요구되는 일일 것이다.

– 만세(수유너머N)

응답 2개

  1. j말하길

    호모 사케르는 불경스러운 존재이면서 신성한 존재이다. 그들은 신에게 제물로 사용됨으로써 그들이 갖고있는 생명은 그 어떤 법으로부터도 생명권이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를 상징체계로부터의 배제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바쳐진 제물’이라는 의미를 통해 상징체계에 포섭되고 포함된다. 호모 사케르로 규정된 인간들은 이미 제물로 바쳐졌기 때문에 그들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을 죽이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더불어 더욱 중요한 점은 그들을 ‘다시’ 제물로 바치지 못한다는 점이다. 즉, 그들에 대한 재조명이 금지된다. 이미 바쳐진 제물은 다시금 제물로 바쳐지는 것이 불경죄로서 금기시된다. 호모 사케르는 법체계와 상징체계 안에서 불경한 존재로 낙인찍혀 희생의 제물됨으로써 저주받았고, 제물로 바쳐진 존재이기에 신성하다. 이 양가적 특성은 한국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소위 ‘빨갱이’라 불림으로써 지명당한 그들은 합법적인 살인에 노출되며, 그들에 대한 재조명, 재평가는 금지된다.

  2. […] This post was mentioned on Twitter by zune. zune said: 우리는 정말 호모 사케르인가? ≪ Weekly 수유너머 http://ht.ly/27Two '저항은 각 권력 현상마다 어떤 특이한 관계가 작동하고 있는지 파악하고, 이를 다른 방식으로 작동시킬 방법을 고민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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