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정치의 사유

네그리와 하트 -다중의 정치, 다중의 민주주의

- 고병권(수유너머R)

1. 제국, 다중 그리고 공동의 부

21세기의 첫 십년 동안 네그리(A. Negri)와 하트(M. Hardt)는 통상 ‘제국 3부작’이라고 불리는 3권의 책, <<제국(Empire)>>(2000), <<다중(Multitude)>>(2004), <<공동의 부(Common Wealth)>>(2009)를 펴냈다. 이들의 작업, 특히 새로운 밀레니엄의 첫 해에 출간된 <<제국>>은 엄청난 주목을 받았고 또 그만큼이나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설령 ‘운’에 불과할지라도, 어떤 ‘때’가 닥쳤을 때 그것을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처럼 낚아채는 책들이 있는데, <<제국>>도 그런 책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사회주의가 붕괴되고 지구화가 본격화되었으며 역사의 종언이 공공연하게 선언되던 ‘짧은’ 1990년대가 쏜살같이 지났을 때 누가 ‘테러와의 전쟁’으로 새로운 밀레니엄이 시작될 것을 알 수 있었을까. 물론 <<제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예견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국>>은 이를 계기로 다시 돌아온 거대 질문, 즉 ‘이 시대가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라는 물음에 하나의 답변을 제공했다. 포스트모던의 승리가 결정적으로 보이고 거대 서사들이 종언을 고한 것처럼 보였을 때, 이들이 탈근대적 거대이론(Grand Theory)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게 참 흥미롭다.

<<제국>>은 말 그대로 ‘제국’이라는 새로운 주권 권력(sovereign power)이 도래했음을 선포한 책이다. 지구화의 결과 국민국가는 쇠퇴했지만 주권 자체는 쇠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지구적 수준에서 강력한 주권 형태가 새로 출현했다는 것. 오늘날 어떤 강력한 국가(가령 미국)도 ‘혼자서’ 지구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재작년 세계금융위기를 계기로 만들어진 G20도 그런 예 중 하나일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에 따르면 이제 주권은 ‘일국적’ 기관들과 ‘초국적’ 기관들이 구성하는 정치적, 법적, 제도적 네트워크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 형태의 주권, 세계정부 없는 지구 주권 형태를 이들은 ‘거버먼트 없는 거버넌스(governence without goverment)’라고 부르기도 한다(<<공동의 부>>).

물론 이 네트워크는 평등한 연대체가 아니며, 개별적인 국가, 민족, 지역, 영역을 매우 위계적으로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강한 국가나 기구라 하더라도 자기 이익만을 위해서, 다시 말해 ‘제국주의적으로’ 행동할 수는 없으며, ‘제국’의 이익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네그리와 하트에 따르면 20세기 후반 미국이 보스니아 내전 등 ‘내키지 않는 군사적 개입’에 나설 수밖에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제국>>). 이 점에서 ‘미국 일방주의 내지 예외주의’에 기초한 이라크 전쟁은 ‘제국’에 대해 미국이 감행한 일종의 제국주의적 ‘쿠데타’였으며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공동의 부>>).

‘다중(multitude)’은 이러한 제국 시대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생산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제국 주권의 정치적 조직화의 대상이자 생산의 기반이 되는, 한마디로 제국의 신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엄밀히 하자면 다중은 ‘신체(body)’라기보다는 신체를 구성하는 ‘살(flesh)’이라고 할 수 있다(<<다중>>). ‘살’을 “명령하는 머리, 복종하는 손발, 그리고 지배자를 지탱하기 위한 기관들로 이루어진 신체”로 조직해낼 수 있을 때 통일된 주권적 신체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제국은 지구적 규모의 ‘살’을 기관화해서 하나의 ‘신체’로 조직함으로써 생겨난 주권적 신체라고 할 수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중’ 개념이, 군주든, 정당이든, 인민이든 <일자만이 지배할 수 있으며, 통일성 없는 복수적 주체들은 지배받을 뿐>이라는 주권이론의 통념에 대한 도전이라고 말한다. 따지고 보면 주권만이 아니라 정치체 자체가 어떤 통일성의 가정 아래 성립한다는 게 통념이므로, 통일성〔단일성, unity〕없는 복수적 특이성들의 연대와 조직화가 가능하다는 이들의 믿음은 스스로의 표현처럼 “일반적 진리에 대한 도전”임이 분명하다(<<다중>>).

통일성 없는 특이성들의 네트워크. 다중은 이 점에서 다양한 차이가 하나의 정체성으로 묶인 인구 집단인 인민(people), 공동의 요소를 인정하지 않기에 차이가 ‘생기없는 잡다함’으로 남아 있는 군중(mob)이나 대중(masses)과 구분된다. 그리고 다중은 무엇보다 계급과 구별된다. 네그리와 하트는 어떤 때 “다중은 계급적 개념”이라고 말하지만, 가령 ‘취업한 사람들’(산업노동자 혹은 임금노동자)이라는 식의 어떤 자격이나 정체성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다. 다만 권력에 대한 집합적 저항의 시작, 집합적 투쟁의 어떤 배치를 지칭하는 한에서만 이들은 다중을 계급이라고 부른다. 오히려 모든 삶의 형태는 기본적으로 자본에 저항할 공동의 잠재력을 가졌다는 점에서, 다중은 자본주의 하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일 수 있다.

네그리와 하트는 다양한 노동형태들, 삶의 형태들이 공동성을 갖는 실제적 경향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 핵심에 있는 개념이 ‘비물질적노동(immaterial labor)’이다. 비물질적 노동이란 “지식, 정보, 소통, 관계 또는 정서적 반응 등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을 창출하는 노동”이다. 한편으로는 아이디어나 상징, 코드, 텍스트, 이미지 등의 생산물을 생산하는 지적●언어적 노동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 편안함, 만족, 흥분, 열정 등을 생산하거나 처리하는 정서 노동이다(이 두 측면은 ‘정보와 감동을 전하는 뉴스’처럼 서로 결합해 있다).

그런데 이 비물질적노동은 첨단 지식정보산업이나 엔터테인먼트산업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농작물의 관리, 가사와 돌봄 노동, 음식점이나 대형마트의 온갖 서비스 등이 모두 정서를 교환하고 생산하며 소통과 협력의 형식을 수반한다. 이것은 실업자와 홈리스, 이주자들로도 확대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가난한 자들은 삶의 사회적 생산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가령 미국 영어를 풍부하게 만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 지식과 언어, 문화를 혼합하며 지구를 하나의 공동 공간으로 다루게 해주는 이주자들을 생각해보라.

이 점에서 모든 이들은 다중일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전제가 있다. ‘이미’ 사람들은 다중이지만 그것은 그들이 “벽들 아래를 통과하는 연결 터널을 파는” 한에서다. 즉 이 다양한 삶의 형태들이 서로 연결되어 공동성을 이룰 때 다중은 실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중은 ‘이미’ 존재하지만 또한 ‘아직’ 실현되지 않은 “하나의 실재적 잠재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다중>>)

2. 삶정치(biopolitics)와 공동의 것(the common)1

문제는 이 공동성에 기반한 생산 혹은 생산된 공동성을 누가 어떻게 전유하느냐이다. 제국 시대의 정치란 이 공동성과 관련해서 정의된다. 그런데 이 공동의 것 -땅, 공기, 식물, 동물, 광물 등의 자연만 아니라, 공동의 언어, 화폐, 습관, 몸짓, 코드, 정서 등 사회 문화적인 공동의 것 모두-은 자본의 막대한 이윤의 원천이지만 또한 우리 삶의 기반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제국시대의 생산은 철저히 ‘삶정치적(생정치적, biopolitical)’이다.

이 ‘삶정치(biopolitics)’라는 말은 ‘정치적 행동’과 ‘경제적 생산’을 구분한 아렌트(H. Arendt) 식의 정치관념이 더 이상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국 시대의 ‘삶정치적 생산’을 보면, 아렌트가 ‘정치적인 것’의 특질로 묘사한 ‘공동의 세계에서의 특이성들의 협력’, ‘발화와 소통의 중요성’, ‘공동의 것에 기반하고 공동의 것을 낳는 끝없는 과정’이 경제적 생산 활동에도 적용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삶[경제적 삶]은 정치적이다〔bio-political〕. 또 정치는 욕구와 생계의 영역, 삶의 영역에서 결코 분리되지 않으며 오히려 삶의 형태 자체를 생산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삶이기도 하다〔bio-political〕.(<<공동의 부>>)

사실 ‘삶정치’라는 말은 푸코의 ‘생권력(biopower)’과 ‘생정치(biopolitics)’에 대한 검토를 통해 제안된 개념이다. 푸코는 19세기에 인구의 생명 관리와 육성이 권력의 주요 관심으로 떠오르고 정치가 생물학화되는 사태를 지칭하기 위해 그 말을 사용했다. 그런데 네그리와 하트는 푸코가 여러 곳에 편재하며 모세관적으로 작동하는 권력 개념(대항 권력 역시 억압 권력과 동형적일 수밖에 없는 그런 권력)을 제시하면서도, 그것과는 다른 권력을 이론화하기 위해 끝까지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푸코가 종종 ‘저항(resistance)’이라고 부른, 하지만 적절한 이름을 부여할 수 없었던 ‘다른 권력’이란 무엇일까. 네그리와 하트는 그것이 권력에 저항하면서도 권력으로부터 자율성을 추구하는, 주체성의 다른 생산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한다. 삶을 다루고 지배하는 권력〔power over life〕과는 다른 삶의 권력〔power of life〕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자를 ‘생권력(biopower)’으로, 후자를 ‘삶정치(생정치, biopolitics)’라고 명명한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보면 제국 시대의 정치는 ‘삶정치’이지만, 좁혀서 보면 주권 내지 자본의 ‘생권력’과 다중의 ‘삶정치’ 간의 대결이라고 볼 수도 있다.

우리 삶의 근간이 되는 ‘공동의 부(common wealth)’, 우리를 생존하게 하는 대지와 공기로부터 우리가 생산하는 소통과 협력까지, 우리가 삶 자체라고 불러도 좋을 이 ‘공동의 부’는 권력과 자본의 명령에 의해 끊임없이 사유화되고 상품화되고 있다. 공동의 자연이 사유화되고(가령 에너지 산업의 사유화), 우리가 생산한 공동의 것이 상품화되며(가령 지식상품화와 저작권), 우리가 살아가는 커뮤니티 자체가 상품으로 판매된다(가령 뉴타운 개발). 우리에게 특정한 삶의 형식을 명령하고 거기서 막대한 이윤을 끌어내는 자본주의 생권력에 저항하는 일, 거기서 대안적인 삶의 형식을 발명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네그리와 하트는 ‘삶정치’와 관련해서 다중의 구성적 능력에 대한 근본적 신뢰를 갖고 있다. 푸코가 ‘자유’와 ‘저항’을 권력 실존의 선행조건으로 인식했듯이, 삶을 지배하는 권력은 삶의 권력, 즉 삶정치를 전제한다는 것이다. 다만 사유화와 상품화를 통해 자본은 우리 공동의 것[공동의 자원, 공동의 협력]의 존재를 은폐하거나 억압할 뿐이다. 하지만 ‘공동의 것’에는 기본적으로 반란의 성격이 들어 있다. 즉 공동의 네트워크는 일단 작동을 시작하면 무한히 확장될 수 있기 때문에, 권력이 명하는 특정한 질서를 초과할 수밖에 없게 된다. 또한 자본은 이윤을 위해서도 다중의 창의성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데, 창의성 자체는 특정한 용법, 특정한 질서를 초과할 수밖에 없다.

3. 다중: 존재에서 생성으로

사실 다중의 창조성에 대한 네그리와 하트의 절대적 신뢰는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공동의 부>>). 먼저 마슈레나 라클라우(E. Laclau)는 다중의 존재를 우리가 긍정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정치적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였다. 다중의 자율성과 특이성들이 통일된 행동을 요구하는 정치적 행동과 상충할 수 있다거나(마슈레), 다중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헤게모니적 힘이 행사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무력하다는 것(라클라우)이다.

둘째 비르노(P. Virno)와 발리바(E. Balibar)의 지적이 있다. 비르노는 다중이 소유하는 공통의 수단들(언어, 커뮤니케이션, 정서, 지식 등)이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기에 다중의 정치성은 양가적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고, 발리바 역시 다중 개념 자체는 그 행동의 진보성이나 반체제적 성격을 담보할 어떤 기준이 존재하지 않으며, 다중은 항해하는 선박처럼 어디로든 나아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셋째 지젝(S. Zizek)과 바디우(A. Badiou)의 지적이 있다. 이들은 다중이 혁명적이기는커녕 지배세력과 제휴할 것이라고 말한다. 다중의 다양성과 네트워크 구조는 자본의 탈중심화되고 탈영토화된 전개의 거울 구조에 불과하며(지젝), 다중의 운동이란 향유할 권리만 시끄럽게 주장할 뿐 단련(discipline)의 어떤 형식도 회피하는 쁘띠 부르주아 대중운동의 진부한 반복(바디우)이라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 답하기 위해서 네그리와 하트는 우리가 다중에 대한 시각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다중을 본성상 혁명적인 정치 주체라기보다는 ‘정치적 조직화의 프로젝트’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존재(being)로서가 아니라 생성(becoming)으로서, 다중으로 존재하기(being the multitude)가 아니라, 다중을 만들기(making the multitude)로 논의를 이동시켜야 한다고 말한다(<<공동의 부>>). 다중이라는 존재가 혁명적인가 아닌가를 논하기보다 어떻게 하면 다중을 만들 수 있는가, 어떤 경우 다중의 생성은 실패하는가로 문제를 바꾸는 것이다.

네그리와 하트에 따르면 마슈레와 라클라우가 제기한 문제, 즉 다중이 어떤 통일성, 어떤 헤게모니로 통합되지 않으면 무력하다는 생각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에 대한 통념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삶정치적 생산모델은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와 같은 생산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이런 생산 일반에서의 자기 조직화와 협력의 역량을 키는 것은 곧바로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특정 헤게모니나 통일성 없이도 하나의 공동 행동이 가능할 때 다중은 생성된다.

물론 이러한 공동행동 자체는 비르노와 발리바가 지적한 것처럼 정치적 해방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가족이나 기업, 민족 -이것들도 공동의 것에 기반하고 또 생산하는 것들이었다- 등 언제든 공동성을 타락시키는 형식들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구체적으로 어떤 공동성의 심급이 타락을 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대중들이 그것에 애착을 갖게 되었는지이지, ‘다중은 반동적’이라는 비난이 아니다. 사람들은 어떤 조건 아래 있을 때 공동의 것의 나쁜 형식, 타락한 형식에 중독적인 사랑을 하게 되며 다중의 생성에 실패하게 된다.

따라서 생권력에 대한 저항과 투쟁, 탈주, 그리고 새로운 삶의 생성을 위해서는 분명 어떤 훈련(training)이 필요하다. 대중의 자기 죽음에 대한 욕망을 분석했던 스피노자가 제시한 것처럼, 정치학은 윤리학과 결합해야 하며, 우리에게는 윤리학과 정치학이 결합한 ‘힘의 존재론(ontology of force)’이 필요하다. 한마디로 삶을 자율적으로 운용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도대체 이런 힘은 어떻게 길러지는 것일까. 어떻게 우리는 다중의 형성에 성공할 것인가.

4. 혁명의 거버넌스

네그리와 하트는 생권력에 맞서 대안적 삶의 형식을 창안하는 그 첫 시도를 ‘탈출(exodus)’에서 찾는다. 삶정치적 맥락에서 계급투쟁은 일차적으로 ‘탈출’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탈출이란 지리적으로 어디론가 떠난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자리에서 자본과의 관계로부터 ‘탈퇴(subtraction)’하는 것이다. 자본이 명령하는 삶의 형식을 내적으로 전복하는 방식으로. 사실 따지고 보면 노동자는 언제든지 자본에 대해 ‘노(No)’라고 말할 권리가 있고, 그 잠재적 능력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자본에 대한 저항이 삶의 ‘탈출’로까지 이어지려면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무엇보다 노동자가 개별적으로 고립되어서는 이것이 쉽지 않다. 탈출은 오직 ‘공동의 것(the common)’을 기반으로 해서만 가능하다. 공동의 것에 접근할 수 있고 그것을 이용할 능력을 갖추었을 때, 달리 말하자면 코뮨에 기반하고 코뮨을 구축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본격적 투쟁을 전개하기 전에 우리에게 존재하는 ‘공동의 것’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를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 우리와 함께 움직이는 사람들, 우리가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 이용할 수 있는 자원들, 주고받는 정보 형태들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공동의 것’의 기반을 더 많이 가질수록, 그리고 더 많은 ‘공동의 것’을 생산할수록 삶을 운용하는 우리의 능력은 더 확대될 것이다. 이 과정 자체가 바로 ‘다중의 생성’이다. 다중은 얼마만큼의 능력을 가졌는가. 이는 다중의 존재가 아니라 다중의 생성에 달린 문제이다.

네그리와 하트가 혁명의 거버넌스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단지 지배세력, 구체제에 타격을 가하는 봉기로는 충분치 않다. “이미 다중의 형성이 이루어졌다면”, “이미 민주주의가 완성되었다면” 모를까, 혁명은 새로운 삶, 새로운 주체성의 꾸준한 확대와 생성을 요구한다. 우리는 공동의 것 안에서, 공동의 것을 생산하면서 삶의 능력을 지속적으로 확대해야 한다. 봉기가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중단을 의미하는 봉기가 삶 안에서 꾸준히 지속되어야 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봉기의 사건이 일상의 삶으로 연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에 따르면 봉기(insurrection)와 제도(institution)-권력의 앙상한 명령 형식으로서가 아니라, 코뮨의 일상에서 지속되는 집합적인 실천과 습속으로서의 제도-가, 레닌의 기동전과 그람시의 진지전이 구분될 수 없는 지점으로까지〔레닌주의자 그람시〕나가야 한다. 또 봉기가 제도화(하나의 지속적인 집합적 삶의 형식으로 변형) 되는 것처럼, 혁명 역시 ‘공동의 것’의 민주주의, 다중의 민주주의를 향해서 ‘끈기 있게 지치지 않고’ 투쟁의 투쟁을 거듭하면서, 사회의 탈주적인 힘들, ‘흘러넘치는 힘들’을 하나의 일관된 프로젝트로서 조직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외적 조건들, 예외적 상황에서 제국이 ‘세계정부’ 없이도 ‘거버넌스’를 유지하는 것처럼, 어떤 지도자나 전위정당 없이도 그런 조직화가 가능해야 한다. 그것이 이들이 생각한 다중, 즉 민주주의다.

  1. ‘공동(共動)’은 ‘common’에 대한 임시적 번역어이다. 여러 특이성들이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함께 행동한다’(共-動)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이 말을 사용했다(스피노자의 ‘특이적인 것’ 혹은 ‘개체’에 대한 정의와도 잘 통한다). 동일성을 강조하는 ‘공동(共同)’과는 발음만 같고 뜻은 거의 반대에 가깝다. ‘서로 통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공통(共通)’도 괜찮은 번역어라 생각되지만, ‘공통성’이란 일상어에서 동일한 특성들을 지칭하는 데 많이 사용되고(특히 ‘차이’의 반대말로 자주 사용된다. 가령 공통점과 차이점), 동적인 생성보다는 정적인 비교의 느낌을 주는 것 같다. []

응답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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