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공부방에 세미나 안착하기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불과 얼마 전만 하더라도 인문학은 그 유효기간을 다한 듯 보였다. 누구도 인문학을 찾지 않고 사회적 처세술과 어학이나 재테크 관련 서적들이 그 빈자리를 빈틈없이 메워가고 있었다. 입시를 위한 논술을 필요한 어린 학생들만이 아직 명목적 교양을 인정하고 무미건조하고 반 조리된 식품으로 인문학을 시장에서 겨우 유통시켜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세월과 인심이 하 수상하여 언제나 버려진 것들이 새로운 핫 이슈가 될 수 있을 줄은 철저히 왕좌에서 끌어내려진 그 순간에는 차마 늘 떠올리지 못하는 것은 아직 나의 미숙함과 어리석은 눈치 때문이다.

이제는 시장에서 찾는 이가 별로 없다기에 우리는 드디어 기회가 왔는가 싶었다. 가난한 우리라고 영혼이 없겠는가? 가난은 다만 육신을 초라하게 만들 뿐 아니라 나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가능성조차를 말살해버리는 야만성이 있다. 다만 다음 순간의 생존만이 존재의 두려움으로 차오르게 될 때 우리는 자신의 영혼을 곧잘 떠나보내게 된다. 때로는 마지막까지 지키고 싶은 것이므로 또 때로는 그것이 남아 있으면 더욱 힘들게 되기 때문에….,따라서 어떤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영혼을 감싸 안고 웅장하게 운명과 아름다움과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자주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일이 된다. 개체는 종의 역사를 반복한다는 말과도 같이 우리는 우리 모두를 만들어왔던 그 세월 속에 어떤 이야기들을 들으며 우리 자신을 만들어 왔는지를 경험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각들의 생각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발전시키고 스스로를 그 속에 반영하고 삶이라는 직조물을 함께 짜왔던 것인지를 모두와 각자는 공히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나 시대는 그런 기회를 분리하여 부여함으로써 우리 종의 일부를 그 지긋지긋한 단순재생산의 기능을 고민 없이 담당하게 하도록 해왔다는 것이 실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음모론일지도 모른다. 특히 학교가 만들어진 근대 이후는 더욱 말이다.

더 할 수 없이 인문학자들의 자리가 강단에서 위험해 보였을 때 갑자기 그들의 모습이 거리와 역전과 변두리 동네에서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인문학은 골방의 때를 벗고 구원의 복음서가 되어 알콜과 실업과 가난과 노숙으로 쪄들어 아무런 희망이 없다고 하는 그들에게서 별다른 것도 하지 않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실은 끝나지 못한 인생을 끝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역사와 예술과 문학과 철학은 다양한 방식으로 끝내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의지와 끝낼 수 없는 그의 소망을 불러 세워 희망의 좌표와 인간으로서의 용기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저 인문학적 강좌를 듣고 자기 삶을 그에 비추어 말하고 쓰고 토론했던 것이 전부일 뿐인데 비용도 얼마 들지 않은 그런 교양과목이 정말 사람들의 운명을 바꾸어 놓다니 또 다시 핫 이슈가 되어 버렸다.

신기한 일은 굳이 설명을 해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가 보다. 모두가 인문학의 힘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을 하였고 무엇보다 이 대목에서 많은 인문학자들이 슬며시 기뻤을 것임은 특히 짐작 가는 바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대목에서 옛이야기의 힘을 떠올렸었다. 사실 인문학이 무어냐 하고 누가 곧바로 물어온다며 쭈뼛거릴 수밖에 없는 나 같은 어염집 아낙은 이런 것에 빗대어 말하는 것이 참으로 온당한 일이니 혹 읽는 이 중에 이 말이 틀리면 나중에 만나서 고쳐 주어야 한다.

아이들이 어릴 적 제일 좋아하는 것들이 몇 가지가 있는데 자기가 태어날 무렵의 이야기들하고 옛이야기가 그 중 하나다. 말귀를 제법 알아들을 나이서부터 초등 저학년 때까지 아무튼 줄기차게 옛이야기를 끼고 산다고 보아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닌 게 참 강박적으로 밤마다 때마다 그걸 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들을 곧잘 볼 수 있다. 옛이야기란 보통 주인공의 성장담인데 강팍한 운명을 타고난 주인공이 대개 삼 세 번 정도 죽을 고생을 지극한 마음으로 이겨내 아름다운 행복을 구가하게 된다는 간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생각해 보면 모든 걸 절로 누리다가 이 세상에 던져진 우리 모든 미물들처럼 가혹한 운명에 처한 것들이 어디 있겠는가 하는 깨달음이 생애 초기에는 제법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모진 시련과 풍파를 이겨내려면 지극한 마음과 정성이 필요하고 그런 단련을 제법 스스로 하느라 그 꼬마들도 옛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마음의 이야기 구조를 누구나 충분히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그것을 들은 만큼 모두가 믿을 수 있거나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이 아닌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면 다시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데 오늘날은 방방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텔레비전이라는 요물이 끝도 없이 이야기를 토해내니 그런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것조차 실은 알아차리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아무튼 이런 사정으로 공부방에서는 행여 우리도 한 번 훌륭한 이야기꾼들과 학자들을 좀 만나볼 틈이 있으려나 기대가 컸다. 아이들은 키워내야 할 때 자고로 훌륭한 스승을 찾아주는 것이 첫째로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 특히 기대를 걸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찌 자리를 마련할 새도 없이 금방 인문학이 다시 열풍을 일으키니 이리저리 눈치만 보다 별 볼일이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또 그새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쉽지 않고 또 우리 애들도 아무런 준비가 안 되었으니 할 수 없다고 마음을 고쳐먹기도 했었다. 하지만 축구도 싫고, 장기도 싫고, 책이나 보고, 하고 싶은 이야기나 하고, 그림이나 그리고 괜히 꾸미고, 음악이나 듣고, 무엇보다 좋은 것 구경이나 실컷 하며 뒹굴거리며 노는 것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한테는 인문학 같은 것 하면서 노는 게 딱 인데 참 애들을 꼬셔 볼 재간이 없으니 답담하다.

그런 참에 부산에 갈 기회가 있어 인디고 서점을 굳이 우겨서 방문을 했다. 하도 좋아서 아이고 아이고 감탄이 절로 나왔다. 4층인가 하는 벽돌 건물에 점점이 아무렇지도 않게 붙어 있는 멋스런 외국 포스터와 무심한 화분들, 막 자리를 떠난 사람들이 씻어 놓은 듯한 머그컵들이 내뿜는 커피 향과 진열대와 책장을 가득 채운 인문학 책들을 보며 나는 유혹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강렬함을 느꼈다. 특히 여러 명이 함께 가서 무엇이 어쩌고저쩌고 마구 말을 거는 통에 사실 유혹에 온통 물들어 버린 내 영혼은 몸 속 어느 구석에 처박혀 할딱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너무 매혹당해 버린 것이 하도 부끄러워 나는 조금만 보고 빨리 나와 버렸다. 그 곳의 풍경은 아무도 없을 때 조금씩 잘금잘금 씹어 먹어야 하는 내 영혼의 빵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어쩌자고 마흔이 넘는 육중한 몸매를 지닌 내가 소녀들이나 젖을 법한 감상에 취해 이다지도 어지러워한단 말인가 괜한 자책도 해 보았다.

내가 바란 인문학은 이 같이 불란서의 거리 카페의 향취가 어른거리는 폼 나는 것이었음 했는데 수유너머를 만나면서 겨우 붙잡을 수 있었던 현실의 인문학은 무언가 소림사의 수도승 맛이 나기도 하고 고집불통 선비 맛이 나기도 하며 때로는 너무 모던하고 때로는 너무 클래식한 면이 범벅으로 뒤섞인 아무튼 불란서 카페는 너무도 조금 섞여 있는 그런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더욱 좌절스러운 일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별로 나랑 같이 놀 마음들이 없고 겨우 그런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또 굉장히 멀리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지역아동센터 교사들이 모여 마중물 교사 세미나를 시작하며 조금씩 더 꿈을 키워가게 되었다.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것과 이면을 볼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알지 못했던 말들이 이제는 나의 단어가 되어 이리저리 대화 속에서 굴러다니게 되는 것은 나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그것은 사실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몸과 공의 성질을 더 잘 알아서 이리저리 공을 더 잘 차게 되는 것과 똑 같은 이치의 놀이일 뿐이다. 공이나 인문학 세미나나 배우며 놀고 익히며 논다는 것에서 전혀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왠지 몸으로 하지 않는 것은 특히 어렵다는 괜한 생각이 있는 것 같다. 어렵다는 생각에 현실적으로 바쁘고 복잡한 일상마저 방해를 해대니 교사 세미나가 점점 단촐해졌다.

나 자신도 지난 해 여름 이후 전국적으로 벌어진 보건복지부의 지역아동센터 평가 거부 문제로 눈 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 새 세미나에 대한 생각을 접고 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파랑새의 교사들과 다른 지역아동센터 선생님들이 한, 두 분이 남아 세미나의 명맥을 겨우 유지해가고 있었다. 실은 명맥만 유지한 것이 아니라 크진 않더라도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작은 강좌도 마련해보기도 했으니 나름 성과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다만 아쉬운 점은 CEO들마저 인문학 경영을 이야기할 정도로 여기저기 인문학 강좌가 빗발쳐 안 그래도 소박한 강좌가 괜히 유행 아이템에 빌붙어 흉내 내기나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자칫 쓸데없는 오해를 받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는 것뿐이다.

지금은 내부의 여러 사정들을 정리하고 나도 마중물 세미나에 복귀하였다. 아마 자리를 잡고 다시 수련 모드로 돌아가려면 확실히 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왜냐면 여기 사람들은 전혀 불란서 카페를 동경할 생각이 별로 없어 보이는 탓이다.

지난 시간 우리는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었다. 막 지역에 청소년들을 위한 공부방을 새로 만들고 새로운 공간에 대한 꿈들을 이야기 해나가는 순간이라 어느 정도 시의적절한 선택이었다. 처음 책을 소개받았을 때만 해도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그래서 ‘흠 수준 있는 철학책인가 보군, 자유를 개념화하는 책이라면 좀 어렵겠군’하고 괜히 긴장을 했었다. 그러면서 책을 사지도 못했으니 애들 말로 뻘 짓을 하고 다닌 셈이다.

다시금 정예의 부대가 모여 가열차게 이빨을 깠다고 후련히 말하고 싶다. 오늘의 글은 그 중 약간의 성과물을 소개하라는 지령을 받았기 때문에 구구절절이 쓰는 것이다. 아 그 짧은 지령에 이리도 긴 서두를 붙이는 나의 조악함에 이미 질려 버렸다.

세미나 중 한 대목에서 거창하게 말하자면 놀이와 교육적 기능을 가진 세미나를 공부방에 안착시키는 방안에 관한 암중모색이 이루어졌다. 세미나를 아무리 하고 싶어도 애들이 책을 안 읽고 오는 데는 재간이 없다는 근본적 한계에 대한 지적과 그 피곤한 과정을 툭하고 외부강사에게 떠넘겨버리고 자기 역시 책과 담을 쌓고 사는 공부방 교사들의 튼튼한 신경에 대한 성토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세미나라는 기막힌 것을 하고 놀자는 교사들의 성화가 실은 너무한 것 아닌가 하는 자체 반성이 삼종 세트를 이루었다.

뭐 세미나를 하려면 책을 좀 읽고 제 시간에 딱딱 참석하고 간간이 부담스러운 발제를 맡는 것과 비용부담이 소액 있는 것이 힘들어서 그렇지 와서 한참 여러 이야기를 주워 올리고 하면 몸도 마음도 운동이 되는 게 무언가 기초훈련이 되는 것 같아 그리 나빠 보이지는 않는데 그저 무언가를 지켜간다는 것이 사실 어려운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어려운 이야기를 해도 잘 모르겠는데 설명 좀…. 하는 부분만 지나면 일사천리로 늘 자기 얘기하기 바쁜 것이니 이처럼 훌륭하게 스트레스를 날려 버릴 곳이 또 따로 있을까 싶다. 안 그래도 공부방에서는 시기과 질투, 음모와 배신 그리고 결국 전투로 이어지는 애들 싸움을 주제로 허구헌날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다. 이건 뭐 때로는 말이 하고 싶어 싸우는 건지 아니면 싸우다 말을 하게 되는 건지 구분이 안 갈 정도니 말이다. 아예 규칙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쭉 풀어 놀 자리를 마련해 주는 게 서로에게 훨씬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을 꺼낸 것이 불씨가 되었다.

세미나에 모인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러면 아예 애들은 책을 읽어 와야 한다는 과제는 일단 좀 남겨 두고 교사들이 하는 세미나 자리에 참석만 시키자는 의견이 나왔다. 다만 교사들이 세미나 하는 책을 아이들 책으로 정해서 세미나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그 중 끼어들어 말을 하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으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도록 해보자는 말도 하였다. 혹 그러다보면 나중에는 자기도 아예 처음부터 자리 잡고 앉아서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서 책도 읽어오겠다 할지 모른다는 희망이 갑자기 솟구쳐 올라 너도나도 의견을 내었던 것이다.

그렇겠지, 아마도 세미나가 얼마나 즐거운 방식인지 사실 제대로 알릴 기회도 없이 덥석 책부터 읽어 와야 재미를 알 수 있을 거야 하고 생각한 것이 무리였겠지 하고 모두 급 반성모드로 돌변했다. 그랬더니 그럼 듣는 것도 얼마나 큰 공부고 또 애들이 얼마나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끼어들고 싶어 하는데 분명히 끼어들고야 말거야 하고 확신이 찬 목소리도 나왔다. 한 사람은 그럼 애들한테 멋있게 ‘애들아 우리 세미나 좀 해 보자‘하고 세미나라는 말로 확 당겨보자는 그럴법한 안도 내었다. 나는 안달이 나서 이걸 언제 교사회의를 하고 시작해보나 궁둥이가 들썩거려졌다.

나는 교사 회의를 아직 못 열었다. 교사회의를 하는 날 보일러가 얼어 방이 냉골이 되어 아이들을 데리고 찜질방으로 피난을 가는 일대 대소동이 벌어진 탓이다. 그런데 다음 번 마중물 세미나도 벌써 내일이다. 난 내일 두 장이나 발제도 맡았다. 어제까지 써달라던 이 글도 오늘 새벽에 부랴부랴 쓰고 있다. 이 글을 출근하자마자 보내야 한다. 이렇게 긴 글일 필요도 없는데 괜히 흥분해서 애들 아침밥도 안 먹이고 이 짓을 하고 있다. 내일 아침 9시에는 대전에서 일이 있다. 세상이 이렇다. 마음은 빤한데…… 시간은 쏜 살같이 늘 나를 비웃으며 달려간다. 내 몸은 늘 너무 굼뜨다. 그 와중에 나는 기를 쓰고 소설책 한 권에서 손을 못 떼고 있다. 나도 참 그렇다.

응답 1개

  1. 지나가다말하길

    저번주에 연극 워크샵 팀이 구로 청소년 공부방 친구들 만나고 와서 계획했던 프로그램 죄다 바꿔야겠다고, 우선 아이들과 ‘raport’ 형성하는 데 전력해야겠다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대단한’ (부정의) 의지를 가진 구로 공부방 친구들과 연극이나 인문학 공부를 함께 할 때는 무엇보다 대단한 ‘맷집’이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인문학의 불온성에 대해, 불온한 인문학에 대해 생각케 하는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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