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농사 일지 13. 다시 봄이다.

- 김융희

길고 지독했던 지난 해의 혹한이 언제였냐는 듯, 봄볕이 따사롭고 공기가 온화하다.
진즉 끝냈어야 할 거름 덮고 땅 고르는 밭 정리를 인제야 시작하려다보니 봄철 농삿일이 더욱 바쁘게 됐다. 감자를 빨리 심어야겠는데, 트렉터가 고장이라며 마무리 작업을 또 미룬다. 벌써 새파란 생명들이 굳은 땅을 밀치며 솟아오르고 있다. 봄나물들은 아직 싹이 어린데, 성질 급한 냉이는 벌써 꽃대를 새웠다. 공연히 마음은 바쁜데 할 일을 못해 더욱 마음이 어수선하다.

오늘은 전곡 오일장날이다. 병아리를 좀 사서 길러야겠다. 지금까지 귀찮아 외면해왔던 사육이지만, 구제역 싸스등으로 축산물의 파동을 생각하면, 나는 집안 경제에도 도움이 되면서, 정책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을 바꿨다. 대단한 애국심에 농정에 협력자연하는 거북스럼도 없잖으나, 철저한 나의 이기적 계산에서 떠오른 생각이다. 그 명확한 근거를 데면 공감하며 혹시 믿어줄 사람이 있을지 몰겠다.

그동안 외딴 산골에 찾아온 우리집 손님 접대로, 있는 김치에 돼지고기 조금 사면 대충 넘길 수 있었다. 늘려서 목살을 구입해 숫불구이로 술안주를 마련하면 대성찬 접대로 모두 일색의 만족이었다. 지난 겨울 구제역으로 인한 쇠, 돼지고기 파동때이다. 값도 많이 비싸졌지만, 팔면 손해를 보는 단골 정육점의 공급에 차질이 있어 가끔 불편을 겪으면서, 우리집의 고정 식단을 바꿔야 했다. 그래서 지난 겨울에는 축산물이 아닌 해산물로 식단을 다시 짜보았다. 겨울철에는 각종 조개들이 알의 여물도 좋고 맛도 있다. 특히 굴과 꼬막은 겨울이 제철이다. 이런 조개류가 내 고향의 특산물들이다. 취급하는 친구도 있고 해서 주문만하면 택배로 쉽게 받아볼 수 있었다. 특히 북쪽 산골에서의 굴구이는 전혀 새로운 정취에 기막힌 진미로 통하여 인기있는 메뉴였다. 물론 파동을 겪는 축산물과는 달리 경제적 부담도 훨씬 가벼웠다.

집에서 들겠다는 방문객들의 주문 의뢰로 나를 통해 팔아준 양도 적잖다. 거기에 더해 고향에서는 생산품을 더많이 팔 수 있어 좋아했다. 이용자는 경제적 부담도 적으면서 맛을 즐기며 건강에도 좋왔고, 나라 정책에도 도움이 될 수 있으니(물가와 물량 수급에) 이보다 좋은 일이 또 있겠는가 싶다. 더구나 지금도 나는 많은 이용자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를 받고 있다. 이런 일이 어찌 남을 위한 일이겠는가. 나를 위한 철저한 이기적 발상이 아닐까싶다. 곁길 세설이 엉뚱하게도 길어졌다. 그러나 세설을 깓으니 좀더 늘어놓겠다. 산골 촌놈이 음식을 알면 얼마나 알겠으며 맛길도 남처럼 길턱이 없다. 어설프지만 자급용 채전벌이를 하는 농사꾼이고 보면, 이제는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심고 가꿔야 할지 뿌릴 씨앗을 구상하고, 종류별로 구입도 서둘러야 할 것 같다는, 장포 뒤지는 이야기밖에 기댈게 없다. 우선 무 배추는 기본이요, 상추 쑥갓 들깨 치커리등 쌈거리에, 시금치 알타리 달랑무들. 가지 오이 호박 감자 고구마도 빠질 수 없는 품목이다.

손자들이 오면 따는 것도 좋와하며 맛있게 먹는 도마도 참외 딸기를 심어야겠고, 아네가 꼭 심으라며 당부하는 양파 쪽파에 토란과 와콘, 그리고 강낭콩… 거기에다 스스로 자란 더덕 도라지에, 취 쑥 씀바귀 고들빼기 민들레 질경이 뚱딴지….. 대충 적어도 스믈이 넘어 서른에 이른다. 소위 신토불이로 치는 가장 보편화된 일반 채소들이다. 한 가지도 더 늘리지 않는 해마다 관리하는 평상의 품목이다. 내가 이렇게 다양한 식품들을 먹고 살았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내가 잘먹고 산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우쭐해진다. 예전엔 전혀 못했던 생각이다.

새삼 찬찬히 생각해보니 옛날엔 이것이 우리들의 보편적 반찬거리였었다. 이런 찬거리에 쌀과 보리를 곁드린 것이 우리의 건강을 유지해주는 옛음식의 재료였다. 정말 그 때는 돼지고기는 명절때나 일 년 한두 번 먹는, 쇠고기는 평생에 몇 번을 들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닭은 집에서 길렀지만 알 빼서 팔아야 했기에 잡아먹는 것은 천부당이다. 혹시나 늙어 달걀 생산이 중단되면 잡아 먹을 수 있을까 기대하지만 어림없는 일, 귀한 손님이 오면 어른들은 아픔을 무릅쓰며 잡아서 손님을 접대하면 끝이다. 가끔 생선을 든다하지만, 지금처럼 생선이 흔치도 않았고 살 돈이 쉽게 있어야지…

소는 우골탑이란 이름처럼 큰학비 조달용이나 큰산림 밑천으로, 돼지는 새끼를 쳐 시집장가 밑천으로, 닭은 달걀팔아 살림용돈 조달의 경제수단으로, 톡톡히 일조를 했었다. 작은 부담이었지만 채소도 가정 경제에 도움을 주었던 것은 마찬가지다. 지금도 길 모통이서, 시장 구석에 앉아 손수 길른 채소를 팔고있는 할머니를 보면 그 때가 물씬 떠오른다. 이런 저런 일을 회고하면서 쓰려고하니 마음이 자꾸만 비참해질려 한다. 그러나 단순히 못살고 비참했던 지난 일을 떠올림이 아닌 나의 간절한 바람의 뜻이 있음에서 궁색을 떠나보다. 비록 작은 규모의 내 텃밭관리가 수익성이란 관점에서 보면 꼭 빌어먹을 짖거리다. 그러나 수익성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수익성만을 내세운 농사가 오늘날 우리의 건강을 망치고 엉망진창 삶의 환경을 바꾸는 빌미의 원흉이라는 생각을 나는 지울 수 없다. 얼마전만 해도 우리는 손수 자기 먹거리를 스스로 생산하며 살았고, 지금도 지구촌의 많은 인구는 같은 방식의 생활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산업의 발달과 더불어 농업도 산업의 일부로 변해버린 것이다. 산업의 발달은 농사의 형태를 완전히 바꿔버린다. 대지를 활용하는 기술인 농사는 삶의 기술을 익히는 가장 직접적인 일임에도 말이다.

오늘 사온 병아리는 집단생산이 아닌 집에서 며칠을 먹이며 길렀다는 이유로 병아리값이 오천원이 되었고, 사료를 살려고 했더니 어린 병아리는 항생제가 들어있는 비싼 사료를 먹이지 않으면 기르기가 어렵다는 설명이다. 항생제 사료를 먹이지 않는 싱싱한 닭이 필요해서 기르려한다고 했더니, 사료주인이 웃으면서 기르는 재미만 즐기라는 의미있는 말을 한다. 병아리값에 사료값만 쳐도 벌써 가공닭 몇 마리값이다. 우리 장포에서 채소를 가꾸는일과 오늘 병아리를 사면서 겪는 여러 일들이 오버랩되면서 마음이 착잡한 하루였다. 오늘 시장에서 병아리 20여 마리를 구입하며 새삼스러운 몇가지 사실을 접하면서 농사일지로 병아리이야기를 쓸려고 했던 것이, 마침 집에서의 여러 일들이 겹치면서 조급하게 원고를 정리하려다 보니, 또 이처럼 뒤틀려버린 것 같다. 함부러 다룰 수 없는 너무 심각한 문제를 사소하게 늘어놓아 면목이 없다.

응답 1개

  1. cman말하길

    맞습니다. 농사일은 끝에서부터 하나씩 되짚어 와야만 일머리가 잡하는 듯 합니다. 조금 규모가 있는 농장의 경우에는 사람과 장비까지 챙겨야하니 게획을 세우다가 하루가 저뭅니다. 입식한 병아리가 장닭과 어미닭이 되어 많은 병아리와 함께 무리지어 놀 것을 상상하면 벌써 마음이 넉넉해 집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