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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책꽂이

생명에 대한 예의

- 달맞이

생명에 대한 예의를 일깨우는 동화
-『바랑골 왕코와 백석이』장주식 글, 상수리

2011년은 유엔이 정한 ‘생물다양성’의 해다. “생물다양성은 생명. 생물다양성은 우리의 삶”은 생물다양성의 해를 상징하는 표어다. 이 표어는 온 지구상, 아니 온 우주상의 생명체가 모두 다 소중한 존재이며, 그들을 홀대하거나 외면하고서는 인간의 삶 또한 행복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구제역으로 인해 지난겨울을 지옥에서 보낸  우리에게는 참으로 뼈아픈 경고인 셈이다.『바랑골 왕코와 백석이』는 구제역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구제역이 남긴 상흔, 다양한 인물들의 속울음에 주목하다

작가는 바랑골 만석농원을 통해 구제역에 직면한 축산 농가의 아픔을 세밀히 그려낸다. 십년 동안 애지중지 키우던 멀쩡한 소들을 하루아침에 죽여야 하는 기막힌 상황에 직면한 만석농원 가족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소들에게 주사를 놓으려는 수의사를 막아서며 절규하는  할머니의 모습이나, 칠십 년을 넘게 살아 눈물마저 말라버린 할아버지가 그저 먼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독자의 마음속에 오롯이 새겨져 여운을 남긴다.

작가의 시선은 피해자들에게만 머무르지 않는다. 살처분에 가담한 공무원, 수의사 등 주변 인물들의 혼란과 고통 또한 세밀하게 드러낸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길이 없는 낭떠러지에 발을 걸치고 있는 위태로운 얼굴(40쪽)”이라고 묘사해 업무상 직책상 살처분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하는 담당 과장의 고충을 잘 보여준다. 주사기 숫자를 세던 수의사 주은애가 텃밭으로 나가 채 소화되지 않은 청국장 알갱이들을 꺽꺽거리며 토해 내는 장면(143쪽)은 주은애의 고통과 혼란스러움을 잘 보여준다. 또한 주은애를 세 살짜리 아이를 둔 엄마로 설정해 심리적 갈등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뱃속에 든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죽는 순간까지 다리를 배 쪽으로 모으며 애를 쓰는 암소를 본 주은애가 새끼소의 울음소리를 환청으로 듣는 장면은 그녀가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생명을 키워내는 인물(의사)이 생명을 죽이는 일에 동참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비판한다. 죽는 순간까지 제 안에 있는 생명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가축(암소)과 맡은 일을 위해 생명을 죽일 수밖에 없는 인간을 대비시킴으로써 인간과 가축, 둘 중에 누가 정말 ‘영물(영혼이 있는 동물)’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것이다.

작가는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여주듯 객관적인 시선으로 구제역 파동을 둘러싼 다양한 상황과 인물들의 상흔을 세밀히 그려낸다. 이를 통해 구제역이 단순한 축산 농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임을 보여주며, 살처분이 얼마나 비인간적인 방책인지 드러낸다.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해 병들지 않은 멀쩡한 소까지 속전속결, 가차 없이 죽이는 비윤리적인 방책이 마치 구제역을 예방하기 위한 최선의 조치인양 떠들어대는 작태를 통해 문명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이 얼마나 야만적인지 드러냄으로써 속도 중심의 시대에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식구’와 ‘상품’, 그 머나먼 거리

한 때 집에서 기르던 가축들은 그야말로 식구였다. 할아버지에게 왕코는 고단한 농사일을 같이 하는 동반자였고, 천석이에게 왕코는 같은 해 태어난 친구였다. 해서 이름을 붙여주고, 눈을 맞추고, 마음을 나누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가축(소)을 바라보는 우리네 시선도 변했다. 축산과 졸업반인 천석이 형 만석이 말대로 소를 짐승, 아니 상품으로 여기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들인 노력만큼 결과를 얻는 경제의 원리가 중시되는 시대에서 사용가치가 떨어진 왕코 같은 늙은 소를 식구처럼 대하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다. 그러기에 아버지와 만석이는 고기값이라도 받을 수 있을 때 왕코를 도축장에 팔려고 한다. 선호 아버지는 사람 뱃속에 들어가는 것이나 땅에 묻는 것이나 키우던 소를 팔아먹는 것은 똑같으니 돈만 똑같이 준다면 살처분을 당해도 불쌍해 할 필요가 없다(105쪽)고 잘라 말한다.

사실 살처분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이 동원되는 것도 어찌 보면 가축을 기르는 환경이 대규모 공장식 축산으로 바뀐 탓이다. 움직임이 적어야 살이 찌니 좁은 우리에 수십 마리를 가둬 키울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구제역이 생겼을 때 빠른 속도로 전염이 되는 것이다.  지난겨울 ‘미친 학살의 시대’를 겪은 것도 청정 축산국의 명예를 지키느라 소들 스스로 바이러스를 극복할 수 있는 2주 정도의 시간을 주지 않은 탓이다. 이 모두가 소를 식구가 아닌 상품으로만 여기기에 벌어진 사단인 것이다.

작가는 ‘가축(소)’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변화(할아버지-아버지-만석)를 통해 구제역이 단순한 바이러스성 질병이 아니라, 사람들의 가치 변화가 낳은 것임을 일깨운다. 살처분이 단지 제1종 가축전염병을 척결해 축산 선진국으로 올라서기 위한 경제적 가치가 아니라, 생명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맞물려 있는 문제임을 환기시킨다. 생명에 대한 예의와 윤리를 잊어가고 있는, 야박하기 짝이 없는 이 시대의 우울한 자화상을 또렷이 드러내는 것이다.

애도의 윤리

살처분이 시행되자 살처분을 바라보는 만석농원 가족들의 고통도 극대화된다. 하지만 만석 농원 사람들은 살처분을 받아들인다. 아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살처분을 하지 않으면, 보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보상을 받아야만 전염병이 그치고 나면 다시 소를 사서 농장을 꾸릴 수 있기에 그들은 묵묵히 자신들에게 닥친 시련을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보상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지금의 끔찍한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156쪽)이며, 그 보상이 천석이네에게는 ‘삶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대목(157쪽)은 축산 농가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암울한 장면이다. 그러기에 천석이는 자신이 대피시켰던 왕코와 백석이의 행방을 알려준다.

친구와 조카를, 식구처럼 여기던 소들의 학살을 지켜봐야하는 게 바로 우리네 삶이라는 이 뼈아픈 전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애도하는 것밖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나약함을 언제까지 ‘어쩔 수 없음’이라고 변명해야 할까?

샘골댁과 오주무관의 눈물은 삽시간에 좌중을 울음바다로 만들고 말았다. 소리 죽인 울음이었다. 애써 소리를 낮추면서 우는 울음은 아픔을 삭이면서 우는 울음이다. 울고 나서 시원한 울음이 아니라, 아픔을 잠시 잊기 위한 울음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울음이다. (131~132쪽)

무릉도원 같았던 바랑골을 지옥으로 만든 것이 바로 인간들의 이기심일진대, 언제까지 우리는 “전체를 위한 일부 희생(43쪽)”이라는 이유로 이러한 사태를 방관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숙고하지 않는 한, 작가의 말처럼 지난겨울의 악몽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여전히 진행 중(“이제 만석농원의 일은 모두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165쪽)”)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이야기는 무릉도원으로 표상되던 환상 속 공간인 바랑골이 변질되고 와해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셈이다. 이상향이 세속에 불과했음을, 아니 이상향을 지옥 같은 세속으로 만드는 게 바로 우리들 인간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러기에 이 작품은 슬프고 우울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아름다운 것은 열세 살 천석이 때문이다. 천석이는 가축을 상품으로만 여기던 아버지와 만석으로 대변되는 요즘 시대에 동떨어진 가치를 지닌 인물이다. 왕코와 백석이를 식구로 여기는 할아버지 시대의 가치관으로 회귀한 인물이다. 그러나 작가는 가축=식구라는 가치관이 가져올 수 있는 틈에 대해서도 놓치지 않는다. 돈을 안 주어도 왕코와 백석이만 살리면 좋겠다는 천석이에게, 선호는 실실 웃으면서 말한다.

‘다른 소는 죽어도 되고?(105쪽)’

작가는 천석이를 통해 왕코와 백석이를 생각하는 마음이 자칫 가족 이기주의, 집단 이기주의로 그칠 수 있음을 경계한다. 내가 돌보고 정을 주던 가축만 식구이고, 그렇지 않은 가축은 상품으로 여긴다면 그 역시 아버지나 만석이의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친구 선호의 말은 뾰족한 가시가 되어 천석이를 찌른다. 천석이는 왕코와 백석이의 안위만 걱정하고 다른 소들 걱정은 하지 않았던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낀다. 자신을 성찰하고 반성하는 천석이의 모습은 우리 미래가 암울하지 않으리라는 희망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애도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반성과 행동이 뒤따르지 않는 애도는 자칫하면 자기 최면이나 위로에 그칠 수 있다. 살처분이 슬픈 운명이나 암울한 현실이 아니라, 생명을 바라보는 우리 시각을 교정하는 더듬이가 될 때, 그로 인해 뭇 생명들의 목숨이 바로 나의 삶이라는 연대의식이 싹틀 때, 육식 위주의 식습관에서 과감히 뒤돌아 설 수 있을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진정한 애도를 하게 되는 건 아닐까?

* 2011년 9월『도서관이야기』에 실릴 원고입니다.

응답 1개

  1. 양효정말하길

    010-9971-1062
    달맞이님이 박혜숙?
    보고싶다 친구야 보고싶다
    개학하기전에 널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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