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꼼

[5호] <불신지옥>과 <독>을 통해 본 2009년 대한민국의 지옥도 3

- 기픈옹달(수유너머 R)

씨네꼼

<불신지옥>과 <독>을 통해 본 2009년 대한민국의 지옥도(3/4)

2. 아파트 : 고립, 불신, 죽음의 공간

두 영화의 공간은 낡은 아파트이다. 아파트는 공간을 구획하여 최대한 사생활이 보장되도록 격리된 수 십 개의 동일한 주거공간을 만들어낸다. 우리 집과 똑같이 생긴 거실에서 누워 똑같은 위치의 TV를 보겠지만, 옆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알고 싶지 않다’. 아파트는 ‘알고 싶지 않은’ 욕망이 축조된 공간으로, 그곳에서 타인과의 조우는 가급적 피하고 싶은 일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생활 보호를 목적으로 구획한다 해도 아파트는 엄연한 공동주택이며, 그 안에는 필연적으로 이웃과 마주칠 수밖에 없는 공간들이 존재한다. 복도, 계단, 엘리베이터 등등. 여기가 바로 공포(영화)의 공간이다. 이는 아무리 개인의 삶을 강조해도 우리의 삶이 결국 타자와 연결되어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진실이 ‘불쑥 틈입한 타자의 얼굴’로 환기될 때 주체는 공포에 휩싸인다는 사실을 유비한다.

<불신지옥>에서 희진의 집 현관문은 3중으로 잠겨있다. 잠금은 이중적으로 작용한다. 외부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잠그지만, 이웃이 열쇠를 복제하는 순간 아파트는 가장 위험한 공간이 되고 만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아파트>에선 이웃에 의해 장애인(성)학대가 일어나고, <불신지옥>에선 푸닥거리로 소녀가 중태에 빠져도 외부에 노출되지 않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복도식 아파트의 복도 측 창문은 그 앞에 서 있기만 해도 안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불신지옥>에서 경비원이 실루엣이 창문에 비칠 때나, 옆집 여자가 창문에다 “저기요~”할 때, 그리고 무녀가 소녀 방 창문에 바짝 붙어 소녀를 볼 때 섬뜩한 느낌이 든다. 이때가 ‘고립’된 ‘공동’주택’-아파트의 형용 모순적 이음매가 벌어지는 순간이다.

<독>의 계단식 아파트에선 계단이 의미심장한 공간이 된다. 계단위에 앉아 있는 노인은 골목에 앉은 노인과 달리 훨씬 고립되고 유폐되어 보이며, 귀신이나 쓰레기처럼 보인다. 주인공이 계단으로 다니는 이유는 엘리베이터가 무섭고 불쾌하기 때문인데, 이는 주인공의 독안에 갇혔던 트라우마로 인한 폐쇄공포증 때문이기도 하지만, 덜컹거리며 뚝 떨어질 것 같은 엘리베이터에 대한 공포는 계급추락의 공포를 상징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다리가 아파오면 엘리베이터를 타게 될 것이라 말하던) 박장로 부부를 죽여 가방에 담고 할 수 없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온다. 이때 옆의 배달원의 표정은 공포에 가득 차 있다. 이상하고 낯선 사람과 좁은 공간에서 있어야 하는 공포라니! <독>의 아내와 딸 역시 김집사와 처음 엘리베이터에서 불길하게 만난다.

한편 아파트에는 미처 알지 못하는 공간도 존재한다. 지하실, 옥상, 옥탑 등. 이는 우리의 일상에서 표면에 드러나진 않지만 저변에 존재하는 것, 즉 무의식을 상징한다. <불신지옥>은 이러한 공간을 적극 활용하고 있는데,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지하실 추격신이며 영화의 마무리는 옥탑에서 이루어진다.

캄캄한 지하실에서 희미한 휴대폰 불빛에서만 의지해 언뜻언뜻 보이는 그림자를 쫓는 이 장면은 동생을 찾는 희진의 혼란스럽고 답답한 내면을 은유한다. 극도로 어둡고 어렴풋한 이 장면은 희진이 형사 앞에서 정신을 잃으며 보는 마지막 환상장면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거친 질감의 화면으로 희진의 내면을 염사(念寫)한 듯한 환상장면은 컴컴한 희진의 집 거실에 지금까지의 사망자들이 모두 머리에 헝겊주머니를 쓴 채 목을 매고 있다가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것을 길게 보여준다. 영화 속 가장 독창적인 장면이자 희진의 내면을 은유하고 직설하는 위의 두 장면을 겹쳐놓으면 그녀의 무의식이 그려진다. 가학과 피학이 엉겨 붙은 불명료한 충동의 상태에서 자아인지 타자인지 모를 어떤 대상을 줄기차게 쫓는 그녀. 여기서 죽음 충동의 공간, 지하실은 그대로 희진의 거실로 겹쳐진다.

이는 두 장면의 매개항인 옆집여자의 말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희진이 지하실에 내려간 이유는 동생이 그곳에 있으며 지하실이 따뜻하고 되게 좋다고 한 옆집여자 때문이었는데, 그녀는 곧바로 자기 집 거실에서 목을 매고 죽은 채 발견된다. (자궁암이 걸린) 옆집여자가 말한 ‘따뜻한 지하실(=자궁)’은 다름 아닌 ‘거실에서의 자살’이었다. 영화는 ‘지하실=거실’의 이미지 중첩을 통해 일상을 영위하는 아파트의 거실(living room)이 괴괴한 죽음충동을 내재한 공간이라는 것과, 그 안에서의 삶이 헝겊주머니를 쓰고 목을 맨 채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삶이자,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함 속에서 무언지 모를 대상을 강박적으로 쫓는 삶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한편 <불신지옥>이 새로 발굴한 공간은 물탱크 위 옥탑이다. 옥상(<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4인용 식탁>등)이나 물탱크(<검은 물 밑에서>)는 공포에서 활용된 공간이지만, 물탱크 위 옥탑은 처음 보는 공간이다. 영화는 아파트 중에서도 가장 높은 그곳을 광신과 부활의 재단(齋壇)으로 삼았다. 어머니는 동생을 그곳에 눕히고 장미꽃잎으로 덮어 부활을 기다리다 딸과 함께 떨어진다. 가장 하늘과 가까운 곳이자 가장 추락위험이 높은 그곳은 말할 것도 없이 저세상과 맞닿은 죽음의 장소이다. 이는 고층아파트와 죽음 이미지가 결부되는 맥락을 가장 극대화시킨 것이다. 그렇다. 아파트는 안락한 생활의 장소이자 최적의 투신자살 장소이다. 이는 고도성장과 부동산 불패신화로 대변되는 삶의 욕망이 들끓는 곳이자 최고의 자살률과 최저의 출산율로 대변되는 죽음의 욕망이 음산히 퍼지는 곳, 대한민국에 대한 유비이다.

3. 소녀 : 가장 보호받아야 할 객체에서 히스테리적 신탁의 주체로

<여고괴담>이래로 한국공포영화에서 소녀는 꾸준히 공포의 담지자였다. 지난 10년간 소녀공포영화는 성차와 연령 중심의 사회에서 주체적 욕망의 발현이 가장 억압된 소녀들의 욕망을 배설하는 환상공간으로 기능해 왔다. 그런데 <불신지옥>과 <독>의 소녀들은 ‘소녀귀신’이 아니라, ‘귀신 들린 소녀’이다. ‘귀신 들린 소녀’는 <폰>이나 <분홍신>에도 등장하는데, 빙의된 부르주아가정의 어린소녀가 극단적인 오이디푸스 욕망이나 탐욕을 드러내는 것을 통하여 공포를 배가시키고 주제를 부각시켰다. 그러나 <불신지옥>과 <독>의 ‘귀신 들린 소녀’는 다른 주체의 욕망을 발화하는 악령의 전달체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과 불안을 발화하여 저주를 수행하거나 진실을 드러내는, 히스테리적 신탁의 존재이다.

<불신지옥>의 소진은 사고 후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아버지의 죽음과 집안의 몰락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여파로 현실감각을 잃은 어머니에 의해 병원도 학교도 가지 않고 집안에만 있게 된 소녀는 유일하게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던 언니마저 떠나보낸다. 그녀는 병들고 우울하고 유폐된 존재로, 사회관계가 없으며 심리상태를 털어놓을 곳도 없다. 어머니 이외에 만나는 사람이라곤 어머니와 같은 교회에 다니는 두 명의 이웃이 전부다. 사고 후유증으로 신경계 손상도 우려되는 10대 소녀-피암시성과 정서적 감응력이 특히 높은 인구군이다-가 현실적인 사회관계가 박탈된 채, 성령과 종말에만 ‘올인’하는 어머니의 정신적 지배하에 살고 있다니, 정신의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친밀한 두 사람 사이에 망상체계를 공유하는 ‘공유 정신병적 장애’(Shared psychotic disorder)가 생길 최적의 상태이다.

소녀가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신들인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여기서 주목할 건 소녀의 심리상태이다. 그녀는 타인과의 관계를 원치 않으며 냉담하고 단조로운 감정표현을 보이는 등 ‘분열성 인격 장애(Schizoid personality disorder)’의 여러 진단기준에 부합된다. 그런데 어느 날 처음 보는 무녀가 복도 창문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후 여러 명이 문을 따고 들이닥쳐 무속적 제의를 강제한 것이다. 극도의 불안과 흥분, 분노 상태에서 무속적 트랜스를 경험하고, 이후 그녀는 거부하였지만 그들은 계속 찾아왔다. 마지막 날 그녀의 뚜렷한 거부의사에도 불구하고 더 강력한 제의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자신을 위협하는 이웃에게 뺨을 날리며 분노와 증오를 담아 말한다. “너희 다 죽어.” 그리고 의식을 잃어가며 엄마에게 말한다. “…다 죽어…언니가 오면 깨워줘.” 이는 언니를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의 마지막 열망을 말한 것일 뿐이다.

그런데 샤머니즘적 귀신관과 죄의식에 빠진 이웃들은 정말로 차례로 다 죽고, 종말론을 믿으며 딸의 죽음을 부정하고픈 엄마는 희진이 오면 소녀가 부활하고 ‘다 죽는’ 종말이 온다며 소녀를 방치해 죽게 한다. 결국 엄마는 자신의 믿음대로 소녀의 부활(“저것 봐, 소진이 깨어났잖아.”)과 희진과 함께 추락하는 (주관적) 종말을 맞는다. 시달릴 데로 시달린 소녀의 말은 자신의 분노와 욕망을 담은 것이었지만, 믿고 싶은 데로 믿는 신념의 장(場)안에서 그녀의 발화는 놀라운 수행성을 지니는 ‘신탁’이 되었다.

<독>의 소녀는 임신한 엄마를 적대하고 이웃 할머니에게 붙이는 등 기이한 행동을 한다. 부모는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이려니 하지만, 행동은 점차 과격해진다. 영화는 소녀가 아버지 어릴 적 이름을 안다거나, 이웃 할머니의 무덤으로 떨어진 사건, 할머니 얼굴로의 변신, 그리고 김 집사의 말 등을 통해, 친할머니나 이웃할머니 귀신이 소녀에게 빙의된 듯 암시한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면 소녀의 행동이 무엇 때문인지 알게 된다. 소녀는 할머니 손에서 자라 할머니와 정이 깊었고 (그래서 할머니로부터 아빠의 어릴 적 이름을 들었을 것이다.) 자신에게 국을 떠먹이려던 할머니를 저지하던 엄마가 낙상하여 유산하는 사고를 목도하였다.

서울 오는 휴게소에서 아버지와 할머니가 따로 갔지만(“아빠와 할머니는?”, “뒤따라 오실거야”), 아빠 혼자 집으로 온 것도 알고 있다. 어른들은 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착각하지만, 가족 간의 불화와 갈등은 아이들도 충분히 눈치 챈다. 소녀는 위 사실들을 재구성하여 할머니의 부재를 나름대로 이해했을 것이다. 소녀는 할머니가 어떤 식으로든 버려졌음을 알고 있으며(이후 할머니에 대해서 한 번도 묻지 않는다), 이유도 짐작하고 있다. 자신과 엄마 아빠가 오순도순 잘살기 위함이었다는 것! 아이는 서울에서 처음 유치원에 갈 때 무척 신이 나 있었다. 그러나 이웃할머니를 통해 친할머니가 연상되었을 테고, 할머니의 죽음에 대한 암묵적 동조자이자 수혜자로서의 죄의식, 할머니와 갈등의 장본인이었으나 이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평온하기만 한 엄마에 대한 증오, 자신의 친어머니를 버린 아빠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새 가족(자신)과의 행복을 위해 헌 가족(할머니)을 버릴 수 있는 부모라면, 새 가족(동생)이 태어난 후 자신도 헌 가족으로 버려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 것이다. 소녀는 다그치는 아버지에게 마침내 진실을 말한다. “동생 태어나면, 나도 버릴 거잖아!” 그리고는 히스테리적 발작을 일으킨다.

<독>은 심령극의 외피를 쓴 심리극이며, 무서운 정치적 함의를 품고 있다. 부모는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하여 서울에 왔고, 그 과정에서 불필요한 존재인 할머니를 죽였다. 그런데 가장 소중하게 지키고 싶었던 것(자식)에 가장 쓸모없다고 버린 것(할머니)이 들러붙어 망가뜨린다.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어떤 공동체에서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소수자를 제거하면, 그 폭력의 상흔은 소수자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은 사회의 윤리성을 신뢰하지 못하고 심리적 안정은 깨어진다. 소수자를 제거하면서 지키고 싶어 했던 내부는 윤리적· 심리적 파탄을 겪는다. 이들은 소수자가 되는 불안에 시달리는 피학적 존재가 되거나, 한편으로는 죄의식으로부터 자아를 방어하기 위해 자아와 윤리를 망각한 파시스트가 된다.

<독>은 폭력적인 공동체의 일원이 느끼는 모든 분열적 심리를 보여준다. 엄마는 자신의 죄의식을 환기시키는 타자(이웃 할머니)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적대감을 드러내며 윤리적 몰아의 길을 간다. 반면 소녀는 죄의식과 불안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발작적으로 행동한다. 소녀의 히스테리적 발화는 윤리적 주체로서 희생자를 망각하지 않으려는 애도를 담고 있으며, 자신을 포함한 누구라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불안을 담고 있다. 그것은 ‘진실을 말하는 입’ 이자 ‘권력자의 죄를 가리키는 손가락’으로 작용한다. 마치 안티고네처럼. 혹은 ‘촛불 소녀’처럼.

황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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