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 고병권(수유너머R)

<위클리 수유너머> 이번호는 지난호에 이어 ‘총파업(general strike)’ 특집입니다. 평소보다 하루 늦춰 업데이트를 했습니다. 업데이트 예정일인 5월 1일에 예정됐던 총파업 행진 풍경을 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는 민주노총이 주관하는 수만 명이 참여한 노동절 기념행사가 있었습니다만 저희 편집진은 한국은행 앞에서 명동 을지로를 돌아 대한문, 상공회의소까지 행진을 했던 수백 명의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수백 명이라고는 했지만 저는 거기서 수만 명 이상의 힘을 보았습니다. 파업과 별 관련도 없어 보일 것 같은 사람들이 총파업에 나섰습니다. 예술가들, 여성들, 빈민들, 생태농업가들, 평화운동가들, 도시운동가들, 성소수자들, 성노동자들, 장애인들, 대학생들, 청소년들, 연구자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하나의 대열, 하나의 평면을 이루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아니 문제는커녕 서로에게 얼마나 큰 힘과 기쁨을, 그리고 새로운 생각을 갖게 해주었는지 모릅니다. ‘나의 이유’로 총파업에 나섰던 이들은 서로에게서 ‘너의 이유’를 들었습니다.

총파업을 공장에서의 생산을 멈추는 것에 한정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들이 파업에 나선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을 겁니다. 하지만 지난 호 <위클리 수유너머>의 여러 필자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총파업이란 개별 공장에서 일어나는 파업의 단순한 확대 버전이 아닙니다. 오히려 총파업은 개별 공장이 아니라 이 체제 자체에 대해서 그것의 중단을 요구하는 선언이자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체제가 지속되는 걸 원치 않는 그 누구도 총파업에 나설 수 있고 나서야 합니다.

어제 행진에 참여한 이들이 외쳤던 공동의 구호는 “도시를 멈추고 거리로 나가자”였습니다. 하지만 도시를 멈춰야 하는 이유는 각자에게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강정마을의 해군기지 건설을 막는 것을 의미했고, 또 누군가에게는 두물머리 유기농단지를 지키는 것이고, 또 누구에게는 하이힐이나 메이크업, 브래지어로 상징되는 신체에 대한 구속을 거부하는 것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노동자의 지위를 인정받는 것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감정노동의 착취를 이제 그만 두라는 것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최저임금을 올려달라는 것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등록금을 낮추라는 것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부양의무제를 폐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요구가 다른 요구보다 덜 중요한 것은 없었습니다. 어제 행진에 참가한 이들에게는 모든 요구가 절박하고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임금이나 노동조건 개선을 내걸지는 않았지만 이들에게는 체제를 중단하고 교체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더 멋진 것은 이들의 행진이 대안적 삶의 이미지를 어렴풋하게 보여주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못견디겠다는 외침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진은 우리가 살고 싶은 사회의 초보적 모습을 표현하는 장이기도 했습니다. 떡을 돌리고 상추모종을 나눠주고 재밌는 소품들을 함께 제작해서 선물하고 노래를 하고 구호를 외치는 일. 무엇보다 수만 명보다 다양성이 더 큰 수백 명이 서로 어울려 하나의 일관성의 평면을 구성할 수 있다는 것, 대중이 연대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 것, 그것은 정말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번 총파업은 세계적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노동절 행사를 동시에 각국에서 진해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 메이데이 총파업은 각별했습니다. 지난 금융위기와 점거 운동이 일어난 이후‘공동행동’의 형식으로 총파업이 지구적 수준에서 제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어제 뉴욕에서는 수만 명(어떤 이들은 2만, 어떤 이들은 5만이 모였다고 합니다)이 총파업 행진을 벌였습니다. 메이데이의 중요한 연원이 미국에 있기는 하지만 사실 한동안 미국에서 메이데이는 큰 의미없이 지나가곤 했습니다. 뉴욕시에서 총파업을 위해서 수만 명이 행진을 벌인 것은 좀처럼 유례를 찾기 어려운 일입니다. 미국의 뉴욕만이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의 많은 도시들에서 공동행동을 시도했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몇몇 신문, 심지어 진보적인 신문에서조차 이번 행동을 평가절하하는 걸 보았습니다. 수만 명이 모이기는 했지만 이제 정점 찍고 하강할 것이라고. 또 어떤 기사에서는 생각보다 많이 모이지 않았다고, 언론의 주목도도 예전 점거 운동이 일어나던 시점에 비하면 급감했다고. 아마도 제 생각에는 로이터, 에이피 등 해외 주요 통신사들의 기사를 요약해서 국제면을 받아 쓰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제가 뉴욕에 있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습니다. 점거 현장에서 며칠 떨어져나와 신문들을 보고 있으면 이제 이 운동은 이렇게 끝이나는 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현장에 가보면 어떤 활기를 보고, 뭔가 새로운 면을 보게 됩니다. 이번에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라는 책을 냈습니다만, 만약 제가 사무실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썼으면 두세 편 글을 쓰고 말았을 겁니다. 그런데 현장에 계속 가면서 감흥이 갱신되는 걸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단지 시위에 몇 명이 모였는지, 주도자는 누구인지, 요구가 뭔지에만 주목하는 걸, 로자 룩셈부르크는 ‘경찰관적 유물론’이라고 불렀습니다. 경찰들이나 관심을 갖는 거라는 거죠. ‘이번 일이 얼마나 버티겠어?’라는 냉소적 질문보다 이 일이 앞으로 벌어질 일의 어떤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는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최소한 두 가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 하나는 노동자가 아닌 다양한 이들이 총파업에 나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계가 총파업을 매개로 해서 공동 투쟁의 형식을 갖춰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몇 명? 그래서 얼마나? 이런 식으로 묻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노동자가 아닌 이들이 파업에 나선 것(희망버스를 생각해보세요.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이 어떻게 구별불가능한 지대로 이행해가는지), 그리고 세계가 공동 투쟁의 형식을 자꾸 시도한다는 것(지금 그것이 바로 대성공을 거두지 못했다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가진 잠재성은 정말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저는 이번 메이데이 총파업을 보고 정말 놀랐습니다. 당장의 현실성도 그랬지만 특히 도래할 일의 규모, 잠재성의 규모에 대해 말입니다.

편집자 말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위클리 수유너머> 커버이미지를 담당하고 있는 디자이너 켄짱이 저희에게 보낸 멘트를 적고 마치겠습니다. “(디자인 구상이) 어제 (행진에) 참석하고 난 다음에 확 바뀌었어요. 뭔가 여러 색을 가진 살마들이 각자 조금씩 변화를 만드어가는구나 싶어서.” 독자 여러분, 현장에 나오세요. 사건에 참여하세요. 거기서 도래하는 것의 힘을 느껴보세요.

응답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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