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향연

향연: 에로스와 변신의 시간

- 최진호

0. 향연

플라톤의 <향연>을 읽으면서 내가 가진 편견이 깨지는 것을 느꼈다. 향연은 개념어들이 난무하고 재미도 없는 무미건조한, 옛 사람들의 고담준론이 아니다. 차라리 향연에는 개념어들 연쇄고리가 아니라 삶의 연쇄고리가 펼쳐진다. 주연이 벌어지고 먹고 마시며 즐기는 속에서 그들은 축제를 벌린다. 이 삶의 연쇄고리의 끝에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제가 다시 돌아와 우리 앞에 서 있다. 끊임없이 이야기 되지만, 누구도 싫증내지 않으며, 누구도 그 문제에서 쉽게 자유로울 수 없는 에로스가 말이다. 에로스가 눈 앞에 서는 순간 모든 말들은 이 주제를 중심으로 빨려들어 간다. 예나 지금이나 대화의 최종심급은 에로스인가 보다!

벚꽃이 나무를 감싸듯이, 사람들은 에로스를 둘러싸고 밀어(蜜語)를 속삭이며 에로스를 찬미한다. 결여된 존재로 태어난 인간이 자신의 반쪽 부절을 찾게 하는 것도 에로스이며, 아낭케라는 필연이 무미건조한 삶에 우연이나 사건등을 만들어내게 해서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내는 것도 에로스라는 등등.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이 말의 향연들 속에 이질적인 하나의 질서를 살며시 집어넣는다. 심포니의 지휘자처럼 말이다.

1. 에로스

대화를 할 때, 말이 서로 통하지도, 말들이 흘러가지도 않는 순간들이 있다. 이 기(氣)막힘의 순간은 침묵의 몫이 아니다. 침묵은 강한 긴장감이 만들어내고 이 힘을 서로에게 흐르게 한다. 차라리 대화의 단절은 침묵이 아니라 말의 과잉 속에서이다. 즉 말이 의미 없이 흘러 다니며 흐르는 방향과 통로를 상실했을 때이다. 이때 축제의 참여자들은 대화가 아니라 자신의 독백에 빠져들게 된다. 향연은 축제이기를 그치고 고독한 술자리가 된다.

소크라테스는 대지를 꽉 막고 있는 말의 흐름을 잘라낸다. 그것은 자신은 말들의 경쟁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는 에로스를 찬미하는 척하는 수사학, 말의 경쟁에는 관심이 없다. 에로스는 달콤한 말도(蜜語), 연인간의 속삭임(密語)도 아니며 대상에 대한 애끓는 마음도 아니기 때문이다. 더욱이 말의 경쟁 속에서는 에로스에 대한 시비와 혼동이 일어날 뿐이다. 누구의 에로스가 옳다, 그르다는 판단을 중지하는 순간, 이 시비의 장이 내가 에로스를 만나는 데 전혀 관계없음을 알게 된다. 소크라테스에게 에로스는 수사가 아니라 내가 진리와 만나는 통로이다. 따라서 에로스를 대면하는 것은 감정에 휩쓸려, 감정에 조정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감정의 속성을 이해하고 그 양상이 달라지는 것을 보고 알게 될 때 열리는 만남의 순간이다. 감정에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타면서 감정을 보는 자기 수행의 시간이기도 하다. 그에게 에로스는 따라갈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갈고 닦을 때 만나게 되는 온전한 앎에 가깝다.

소크라테스는 디오티마를 통해 에로스의 본질을 풀어낸다. 디오티마에 의하면 에로스는 ‘~에 대한 에로스’이다. 어떤 것을 바라는 것은 내게 그것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항상 결여와 함께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인 에로스도 마찬가지다. 에로스에 아름다움이 결여되어 있기에 끊임없이 아름다워지려 한다. 아름다움과 추함의 ‘사이’에 에로스가 있다. 이런 사이의 것들이 다이몬이다. 다이몬은 ‘인간적인 것을 신들에게, 그리고 신들의 것을 인간들에게 해석해주고 전달해준다.’ 이 다이몬들은 다종다양한데 에로스도 그 하나다. 이 사이의 존재로서 에로스는 포로스(방도)와 페니아(곤궁)의 아이이기도 하다. 어머니의 본성을 갖고 있어 늘 결핍과 함께하지만 아버지를 닮아 아름다운 것들을 얻기 위해 계책을 꾸미는 것이 에로스의 속성이다. 가령 에로스는 지혜를 사랑하기에 지혜로운 것과 무지한 것 사이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에로스’가 아니라 ‘사랑하는 에로스’의 모습이다. ‘대상’으로서 에로스라는 상(想)이 사라지는 순간 생생불식하는 에로스의 세계가 열린다.

2. 변신.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잘 잡히지 않는 에로스에 끌리는 것일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좋은 것이 늘 자기의 곁에 머무르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가령 지상의 모든 것들도 사멸함을 피할 수 없다. 부나 육체와 같은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명예나 앎과 같은 것도 생노병사하게 된다. 이 경우 우리는 이 아름다운 것들을 일시적으로만 머물게 하며, 우리도 또한 그것과 일시적으로만 만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사멸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그리스 인들은 원래의 것과 닮은 새로운 것을 남겨 놓음으로서, 즉 출산을 통해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변하지 않는 것을 산출할 수는 없지만 유사한 것들 생산할 수는 있다. 이 유사한 것들의 생산을 통해 우리는 불사의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산에 대상으로서의 에로스가 아니라 상(相)없는 에로스가 요청되었을까? 그것은 에로스와의 만남이 계속 이루어지리라는 것, 그것도 정해진 순간, 내 의지에 따르지 않은 사건이 도처에서 발생하리라는 예감이었을 것이다. 상이 없기에 에로스라는 사건은 도처에서 생겨날 것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 아니라 매번 새롭게 갱신되는 사건으로서의 에로스. 매 순간의 에로스는 매번 특별한 에로스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인들에게 지금의 삶을, 내가 마주치고 있는 열정의 순간들을 중시하라고 권고한다. 인연의 장 속에서는 이런 특별함만이 지속되리라. 소크라테스는 바로 지금이 무한이라는 말한다. 매번 특별한 순간만이 발생한다. 즉 지금의 특별한 순간이 무한을 만나는 시간이다. 이 에로스와 함께하는 무한의 경험은 자기 수련과 변신, 즉 자기배려의 순간 속에서 펼쳐진다. 자기배려를 하는 이들에게 지금은 불멸의 찰나다.

현재의 아름다운 것들을 만나거나 누군가와 사랑에 빠질 때 이데아의 세계를 다시 상기(想起)하게 된다. 상기하는 순간, 이 느낌이 만들어지는 인연의 조건을 이치에 맞게 파지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저편의 에로스-이데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 느낌의 흐름을 파지하는 것 자체가 바로 상기의 과정이며 에로스 체험일 수 있다. 에로스는 이 과정 자체일지 모른다. 이 길은 섬세하게 자신의 변화를 따라가는 도정이자 새로운 감각을 내 몸에 새기는 변신의 시간이기도 하다. 물론 출발점은 육체로부터이다. 먼저 자기 몸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해서 다른 몸에 대한 사랑으로 확장되고. 다시 모든 아름다운 몸에 대한 사랑으로 나간다. 이때 우리는 하나의 몸에 대한 열정에서 벗어나 그 자기 몸에 대한 열정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 그 다음에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한다. 사람의 행실과 법속에 있는 아름다움과 같은 것이다. 이 아름다운 것을 계속 추구하는 것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건과 만나게 된다.

이 아름다움의 큰 바다로 향하게 되고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아낌없이 지혜를 사랑하는 가운데 많은 아름답고 웅장한 이야기들과 사유를 산출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거기서 힘을 얻고 자라나서 어떤 단일한 앎을, 즉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것으로서의 앎을 직관하게 됩니다.

이 아름다움에 대한 직관! 갑자기 ‘본성상의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을 직관하게 될 것이라는 비의. 참된 덕을 산출하는 존재로의 변신은 나에게 다가오는 느낌을 부단히 섬세하게 닦아가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때에야 비로소 신이 친애하는 자이자 불사자가 되는 일이 가능하리라. 그리스인들은 이렇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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