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문명에 의해 평정된 세상을 살아가면서, 또한 그것이 지옥이건 낙원이건간에 서구 문명이 만들어 낼 세상의 미래를 고스란히 우리의 미래로 안고 살아가면서 그 문명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두고 아주 자주 고민에 빠져 든다.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면 대체로 세 가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첫째는 문명이라는 커다란 배에 올라탄채 떠내려 가는대로 그냥 그 배에 온 몸을 의탁한 채 살아가는 자세이다. 둘째는 문명의 그늘을 간파하고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내는 것은 곧 운명과도 같은 것이라 여기는 자세이다. 그것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셋째는 문명 비판을 하며 반문명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냥 문명에 대한 안티테제이건 아니면 제삼의 길을 염두에 두고 새 길을 찾는 모색이건 간에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문명에 반기를 드는 자세이다. 비율을 두고 보자면 첫째가 거의 대부분일테고 그 다음이 두번째 그리고 세번째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해당된다고 보는게 타당할 것이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떤 자세가 현명한 것인지 참 오래 고민하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 두번째의 견해를 견지한 선배나 친구들과 얘기를 나눌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들의 고민 역시 깊었다. 문명이 구성되고 작동하는 힘의 원천은 인간의 욕망에 있다. 그런데 인간이 살아 있는 한 욕망을 버리거나 이전에 비해 줄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우리는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욕망은 번식력이 좋아서 언제나 새로운 욕망을 낳는다. 그 수효나 정도는 언제나 많아지고 강렬해지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신문을 보다가 인터넷에 빠져 들게 된 사람이 다시 신문만 보게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전거를 타다가 차를 사서 몰게 된 사람이 다시 자전거만으로 생활하려면 아주 큰 결단이 필요하다. 농촌에서 중소도시로 그리고 대도시로 이사 오게 된 사람이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게 되는 경우는 인생을 정리할 노년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좀체 찾아보기 힘들다. 이처럼 욕망은 어떤 흐름을 지닌채 흘러간다. 그리고 그 길은 대체로 일방통행이다. 중력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는 물길과 같다. 그리고 그 흐름은 개체를 뛰어 넘는다. 아버지의 욕망을 아들이 받아 안고 잘 길러서 다시 태어나는 아이에게 전달한다. 개인의 욕망은 서로 부추기고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가운데 사회의 욕망을 형성하고, 다시 사회의 욕망은 그 구성원들의 욕망이 나갈 길을 결정한다. 무서운 것은 자본주의가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이 욕망의 기제를 늘 전제한다는 점이다. 즉 자본주의는 무한 경쟁. 아무 제약 없이 방임된 욕망이 사회를 진보시키고 발전시킨다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자본은 욕망을 현실화하는 기계이자 욕망을 제어하고 지배하는 물리적 힘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러한 자본이 각자의 삶을 결정짓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바로 이러한 현실 인식에 기반했을 때 두번째 부류의 고민은 답을 찾지 못한 채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된다.
나는 대체로 세번째 부류의 사람들과 같은 고민을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내가 세번째 부류의 생각을 대체로 옹호하는 까닭은 ‘인간’을 인간으로 고립된 존재로 보지 않고 늘 자연의 일부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의도하건 그렇지 않건 간에 자정능력을 지니고 있다. 생태계를 비롯한 자연의 계가 존속되는 방식의 가장 큰 특징은 늘 균형과 평형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특징을 통해 계는 적절한 개체수를 유지하고, 외계의 반응에 조응하고, 진화를 독려하고, 개체간의 관계를 조정하였다. 자정능력을 사람에게 적용해보자면 그것은 일종의 각성이거나 절망이거나 두려움이거나 무기력일 수 있다. 배가 나온 사람은 운동을 하거나 적게 먹게 된다. 식욕이라는 욕망의 흐름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채 또는 편리함의 추구라는 욕망에 고스란히 노출된 채 오랜 시간 살다가 어느 날 여러 질병의 징후를 통해 각성을 하고 운동을 하거나 적게 먹게 되는 것이다. 그 시기를 지나서도 각성이 없이 욕망에 몸을 맡기는 사람은 아주 큰 병에 걸려 불편하고 불쾌한 일상을 살아가게 된다. 차를 타고 다니다가 어느 날 문득 ‘길’을 잃어버리고 살았다는 각성을 하게 되거나, 또는 좀 더 천천히 사는 삶의 매력에 대한 각성을 하게 되면 자전거를 타게 되거나 걸어서 다닐 수 있게 된다. 나는 욕망의 내부에 있는 이러한 갈등에 주목한다. 각성은 비자연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의 인구가 계속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은 이러한 내 판단에 근거하자면 잘못된 예측이다. 인간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자연계 속의 한 종에 불과한 인간은 그 계가 요구하는 수준의 개체를 유지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그 종의 각성에 의한 자발적인 것이 되면 참 좋은 것이겠지만, 만일 그러한 각성이 제때 나오지 않는다면 자연계는 여러 가지 조정기제를 통해 강제적으로 각성에 이르게 할 것이다. 우리가 몇몇 인플루엔자를 앞에 두고 보이는 작금의 모습을 통해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 얻는 것이 있어야 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적대적이기 그지없는 미생물들의 도발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이것은 자연계가 조정하고 자정해가는 방식일 따름이다. 돼지 인플루엔자의 경우 기형적으로 비대화한 인간이라는 종이 그 개체를 유지하기 위해 대량 사육체계를 구축한 현실이 빚은 필연적인 산물이다. 내심 원하지 않더라도 각성이 있어야 한다. 지금의 규모로 먹고 지금과 같은 속도로 개체를 증식한다는 것은 아주 뼈아프고 슬픈 방식으로 자연의 냉정하기 그지없는 조정과정을 받아들이고야 말겠다는 인간의 도발행위에 다름 아니다. 육식을 줄이고 대량 사육체계를 지양한 채 공동체 협업체계에 의해 먹거리를 조달하려는 노력은 이상주의자들의 비현실적인 노력이 아니다. 자연계속의 다른 종 다른 개체들과 가급적 얼굴 안 붉히고 말로 잘 타협하고 조화를 모색한 채 살고자 하는 아주 현실적인 노력이다.
늘 느끼고 주장하는 것이지만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 여기는 근대적 주체의 자의식은 이제 우리를 아주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넣는 망상으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자연계에서 ‘인간’이 지니는 지위와 역할에 대한 아주 속 깊은 각성이다. 문명이 확장되고 결국 전 지구를 지배하리라는 운명론은 아주 쉽사리 우리를 허무주의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문명은 운명적으로 지금 가고 있는 길을 벗어나 제 삼의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것은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세상을 이루는 자연계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과 갈등하게 될 때, 우리의 문명을 지속시키는 원동력인 우리의 욕망들도 그 내부로부터 갈등하게 될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은 어떻게든 각성하고 조정하거나 혹 각성되거나 조정될 것이라는 믿음으로부터 지니게 된 결론이다.
GMO나 핵과 같은 과제는 말씀하신 것처럼 중장기적으로 제 3의 길을 가늠하고 계획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한편 중요한 것은 우리 몸 안에 들어와 있는 화학적 독소에 대해 우리가 대응하는 자세, 우리 주위 많고 다양한 자연물(생물/무생물)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 먹거리를 비롯한 살림살이에 대한 생협 등을 통한 능동적 대처와 같은 과제들/이슈들 또한 참 중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참 의미있는 글입니다.
GMO나 핵같은 과제를 우리가 어떻게 푸느냐가 제3의 길을 가게 될 것이냐를 보여주는 한 시금석이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