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기록의 반란 – 기록학 학술대회를 보면서 –

- 오항녕

실록에 눈이 가는 진짜 이유

조선시대 실록은 비교적 널리 알려진 자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실록을 그냥 역사책이라고 알고 있다. 맞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사(史)이다. ‘史’에는 근대적 의미의 역사(history) 뿐 아니라 기록(archives)이 포함된다. 실록은 기록의 모음, 문서 모음이다. 사관(史官)들이 후대에 남길만하다고 생각하여 보존한 문서를 날짜순으로 모아놓은 것이다.(2011년 7월 19일자 수유너머 위클리 칼럼에서, 노동자역사연구소 한내를 소개하며 김종배 선생이 엮은 《전노협백서》를 실록과 잠깐 비교한 적이 있는데, 요 문제를 이해하려면 그 글을 참고하시면 된다.) 이래서 실록을 당시에 국사(國史)라고 불렀지만 요즘 말하는 국사와 다른 것이다. 국사(national archives)이었지만 국사(National History), 구성된 국민국가사가 아니었다. 나는 실록이라는 문화유산의 힘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500년을 기록으로 남긴 찬란함’에 있다기보다, 이 국사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고 보았다.

실록이라는 국사(national archives)는 국가 관료제를 통해 생산되지만, 국민국가사와는 다른 역사쓰기를 가능하게 해준다. 중앙집권적 관료시스템에 의해 생산된 문서이지만, 사관이라는 탈-관료제적 존재의 관찰에 의해 기록이 보완되면서 국가의 활동영역을 넘어선 기록화(Documentation)가 이루어진다. 왕조시대에 왕조 이후의 시대를 입에 올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반역을 빼곤 역사의 이름, 오직 하나였다. 특히 실록은 대놓고 후대, 즉 왕조 이후를 말할 수 있는 반역적 텍스트였다. 왜냐하면 실록을 편찬하는 사람들 자신의 입으로, 실록은 후세를 위한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했으니까. 실제로 실록은 당대 왕조 사람들에게는 공개되지 않는 기록이었으니까. 참고사항을 확인할 때 열람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제한된 사관을 제외하고는. 그러니까 실록은 자기를 만들어내는 토양과 조건을 부정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논의를 확장하면 근대 역사학의 개별 학문분과의 성립이라는 관점에서 전통적 사(史)의 미분화를 논할 것이 아니라, 즉 전통적 사를 미숙한 단계의 역사학으로 논할 것이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의 국사라는 틀을 벗어나기 위한 지평의 확대로, 국민국가와의 유대관계 속에서 협애해진 근대 역사학의 영역과 역할을 반성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전통적인 ‘사’의 범주에 주목할 필요가 도래했음을, 그것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때가 되었음을 실록편찬의 전통은 말해주고 있다.

상도(商道) 없는 장사꾼들

근대 역사학의 본질과 위기는 2011년 11월 수유너머위클리에 쓴 칼럼, 〈국민국가사(史)조차 쪼개는 사람들〉에서 어느 정도 정리했기 때문에 또 말할 필요는 없다. 핵심은 국민국가사로는 천잠산을 산책하며 사색하는 나의 하루, 연구소나 학과 동료들과의 강독과 번역, 학생들과의 치고받음, 전주시민들과의 교감, 강연을 통해 만나는 초딩이나 중딩, 언론의 집필로 만나는 독자들,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을 공부하는 수유너머R의 세미나 등 역동하는 나의 삶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사란 시험볼 때 빼고, 애국주의 논쟁할 때 빼고 거의 내 인생과 상관없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하다. 그러나 현재 역사학과는 국민국가사로 짜여 있다. 재미없게. 국민국가사를 먹기 좋게 시대순으로, 전공별로 나누어놓았다. 그래야 싸우지 않고 안전하게 밥그릇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국가사가 의심받거나 무너지면, 당연히 현재 역사학과 체제는 무너진다.

한국 모든 대학교의 역사학과(한국사학과, 국사학과)는 커리큘럼이 같다. 커리큘럼이 같다는 말은 교육내용이 같다는 말이다. 당연히 교수진의 구성도 같다. 말 안 해도 알 것이다. 그런데 요즘 학생들도 안 오고 취직도 안 되니까 역사학과는 불이 난 양상이다. 학생들 모으러 다니고 학과 이름도 인터넷 낚시글처럼 요렇게 조렇게 바꾸어 손님을 현혹한다. 고교 방문이다, 무슨 문화프로그램이다, 하는 데코레이션이 덧붙여진다.

데코레이션 방식 중에 딱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기록학, 스토리텔링, 영상역사 등의 새로운역사 영역이 주목을 받으니까 현재의 국민국가사 커리큘럼에 더덕더덕 덧붙인다. 물론 한 번 교수는 영원히 교수니까 교수 충원은 불가능하다. 장사 안 되는 역사학과에 대학본부에서 교수정원을 더 줄 리도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같은 역사학과 교수 사이에서도 기존 국민국가사 체제를 바꾸면서까지 새로운 커리큘럼을 넣어야 한다는 비전이 없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냥 인기 있으니까 하는 것이고, 안 하면 불안하니까 과목을 신설하는 것이다. 그건 강사에게 맡기면 되는 것이다.

결국 대학이 장사꾼이 되었는데, 정작 장사꾼 자질은 없다는 것이다. 물건이 안 팔리면 장사꾼은 당연히 내 물건이 뭐가 문제인지 생각한다. 이게 도리다. 그러나 대학에서는 자신들이 팔려는 상품을 돌아보지는 않는다. 아니, 돌아볼 능력이 없다. 당연히 가게가 안 될 때는 상품에 문제가 없는지 그 질을 돌아보는 최소한의 상도(商道)도 갖추지 못했을 만큼 한국 강단 역사학계의 무기력은 극에 달해 있다. 그러니까 왜 망하는지를 모르면서 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역사학과의 필망을 예견하는 이유이다. 왜 망하는지 알면 소생할 기회가 있지만 왜 망하는지 모르면 망하는 건 필연지세이다. 이유는 모르는 채 아무리 학생들 모으러 돌아다녀봐야 맛없는 음식점 캠페인이다. 오래 못 간다. 사람들을 바보가 아니다.

5월 12일의 학술대회

난 역사학과가 구원받을 지 별 관심 없다. 문제를 풀 실력도 강단도 없으면 문제에 치이는 것이다. 다만 역사학과가 아닌 역사학, 또는 역사공부는 탄력을 받을 희망을 그제 발견했기에 몇 자 적어둔다.

내가 토론자로 들어간 발표는 별로 재미가 없었다. 잘 모르고 하는 발표였기 때문에 어디서 손을 대야할 지 난감했다. 요즘 종종 내게 이런 난감한 논문이나 발표에 대한 논평을 요청하는 일이 많은데 뭔가 음모가 있나 싶을 정도이다. 더 나쁜 건 이런 발표는 대개 길다.

숨통은 테리 쿡(Terry Cook)이라는 UCLA 기록학 교수에게서 뚫렸다. 원래 캐나다 국립기록원(National Archives) 직원이었다가 대학으로 옮긴 분이다. 기록학 이론 중, 평가론(Appraisal), 즉 어떤 기록을 남길 것인가 하는 이론 쪽으로 밝다. 내가 편역한 《기록학의 평가론》(2004)에도 이 분의 논문이 하나 들어가 있다. 일이 바빠 최근 글을 보지 못했는데, 프랭크 업워드(Frank Upward), 앤 길리랜드(Anne J. Gilliland) 등과 여러 고민을 나누었나보다.

원래 쿡은 개별기록이 아닌 조직의 기능, 사회의 기능을 중심으로 기록을 평가하여 남기자는 거시평가(Macro Appraisal) 이론을 주장해왔다. 기록을 관리, 보존하는 사람을 아키비스트(라이브러리언=도서관, 큐레이터=박물관을 떠올리면 된다.)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그의 이론은 전문가로서의 아키비스트보다 아키비스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의 이동인 셈이다.
당연히 토론에서 구조기능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비판도 나왔다. 변화 논리가 부재하고, 인간이 부재하는 이론적 배경도 지적했고, 다시 거시적 역사학으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도 곽건홍 교수(한남대)에 의해 나왔다. 또 곽건홍은 하워드 진이 지적했듯이 국립기록관은 소수자 기록을 배제한다는, 그리고 어쩔 수없이 정부기록 중심으로 평가한다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기록관 역시 국립기록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쿡은 곽건홍의 문제제기에 흔쾌히 동의하면서, 자신이 하워드 진의 팬이라고 소개했다. 또 자신의 문제의식은 기록의 현장성(現場性 통역자는 현지성이라고 했는데 현지성이 뭐의 번역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현장성이 적절할 것이다.)임을 확인해주었다. 여기서 말하는 현장은, 마치 국사로 수렴되는 역사가 아니듯이, 기록 역시 국립기록관으로 수렴되는, 빨려들어가는 기록이 아니라 자체로 존재근거를 갖는 방식으로 관리, 보존, 활용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홉스봄의 말처럼 정당한 당파성의 결과 역사학이 다루는 분야가 노동, 여성, 아동, 이주민, 지방민 등 소수자(대개 다수이면서 소수자인!)의 삶으로 확대되었듯이, 기록학이 발을 딛을 토대도 각종 사회단체, 종교단체, 학교, 지방 등 현장의 기록관이 되어야 한다는 상식적인 주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쿡의 논지는 업워드에게도 이어졌다. 하지만 여기서 내가 막혔다. 그가 들뢰즈(Gilles Deleuze)의 《새로운 아키비스트 Le nouvel archiviste》에서 인용한 푸코의 스케치를 보여주었는데,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동문선에서 번역되어 나온 들뢰즈, 허경 역, 《푸코》 1부 1장이 ‘새로운 고문서학자’여서 업워드가 인용한 책과 같고, 또 《푸코》도 따로 발표된 논문을 모인 것이어서 일치할 가능성이 크지만, 푸코의 스케치가 없다.) 요건 좀 더 찾아보기로 하겠다.

구원의 가능성

오전 발표만 듣고 안타깝게도 자리를 떴다. 오후에 다른 학회 토론이 하나 더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발표문도 듣고 싶은 데가 꽤 있었으니,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다. 정리하자.

버벅대며 몰락하는 역사학과들이 한편에 있고, 그 옆에 쿡이나 내가 예상하는 기록관들이 만들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앞서도 소개했던 노동자역사연구ss소 한내 같은 기록관이 많이많이 생긴다면, 대학의 역사학과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거의 할 일이 없을 것이다. 아니 뭘 하기를 기대하기보다 그냥 쉽게 생각하자. 수유너머R 같은 공동체, 교회, 사찰, 가문, 시민단체, 기업, 전주 같은 도시, 동네, 전주대학교 같은 학교 등등에서 기록관이 생긴다면(이미 생기고 있다!), 우리는 그 기록관의 기록으로 역사를 쓰리라. 그러면 그 역사가 국사가 될까, 아닐까? 바보 같은 질문이다. 단언컨대, 이제 국사의 시대는 갔다. 무수한 역사만 남을 것이다. 붕괴는 이미 진행 중이며, 미래는 이미 와 있다.

작은 사건 하나. 대회장에서 반가운 분, 이영남 선생을 만났다. 《푸코에게 역사의 문법을 배우다》의 저자. 국가기록원 입사 동기이자, 같은 부서에 근무하던 동료. “저, 국가기록원 그만두었습니다.” “풀무 학교 중심으로 공부하려구요.” 이상하지 않았다. 국가기록원의 입장에서는 인재를 잃은 것이겠지만, 그의 선택은 일관되었고 무엇보다 지혜로웠다. “임상역사학 계속하려구요.” 임상역사학? 강호의 역사학, 현장 역사학이다. 누구나 자신의 역사가 있음을 발견하고, 자신의 역사를 써가면서 역사를 배운다. 국가기록원으로부터의 그의 탈주가 그날 학술대회와 매우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퍼뜩 들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내내 약간 흥분했다. 쿡, 업워드와 세미나를 만들어보자는 이상민 선생의 말에 동의하면서, 곽건홍, 이영남에게 말했다. “기록학이 역사학을 구제할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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