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1919년, 혁명을 꿈꾸던 청년들 ― 메이지대생 양주흡의 2․8과 3․1 (1)

- 권보드래

메이지대 법대에 다니고 있던 양주흡이 고향인 함경북도 북청을 향해 떠난 것은 1919년 1월 31일이다. 도쿄 유학생 사이 2․8 독립선언 계획에 참여한 후 자못 흥분돼 있는 상태였다. 조선 유학생들 사이 공개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월 6일이었던 듯하다. 이 날 학우회 편집부 주최 웅변대회에 참석했던 양주흡은 “구세의 국책을 설명하여 만장일치가 되었으므로” 위원 열 명을 뽑아 일본에 대해 시위운동을 벌이기로 했다고 적는다. 다음 날에는 아예 ‘독립운동 혁명회’라고 명명한 회의를 개최했다. 도쿄에 유학하는 학생 중 절반 넘는 4백여 명이 참석했고, 좀체 자리를 함께 하지 않는 여학생들도 대표 두 명을 파견했다. 일본 정부에의 질의, 각국 외교관저 앞에서의 시위운동 등을 결의한 후 학생들은 마침기도를 할 때 “만장일치로 눈물을 흘리면서 절규”했다고 한다. 이 날 회의가 끝난 후 대표 20여 명이 경시청을 방문했다. 양주흡은 이 날 일기에 “이 민족을 구제할 자는 우리 동경의 유학생이므로 비록 산이 움직이더라도 나는 움직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대표단의 경시청 방문은 그야말로 ‘질문과 회유’로 끝났지만 양주흡은 의기를 꺾지 않았다. 졸업을 1년여 남겨두었을 때였지만 “졸업을 하여도 별볼일이 없으므로 이 차제에 독립이 되지 않으면 미국으로 가서 정치과를 졸업하기로” 결심한다. 신분을 위장해 미국에 건너가고자 중국인의 민적등본을 구하기도 하였으나 실패. 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북청의 부모에게 인삼 장사를 할 계획이라며 거금 6백원을 청구했으나 회답이 없다. 줄여서 1백 20원을 청구한다. 그래도 조선 내 어지간한 월급쟁이로선 반 년 치 수입에 해당하는 거액이다. 여비 문제도 있고 하여 양주흡은 그 사이 미국 대신 만주로 가려 생각을 바꾼다.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북간도나 만주 들판의 외지에서 활동할 곳밖에 없”다. 그러나 며칠 더 기다리는 중 “귀국하여 경성에 가서 민심을 선동할까, 만주로 갈까” 다시 고민하기 시작한다. 판단은 혼잡하고 피는 끓고, 겨우 경성행을 결심하고 났는데 고종 승하 소식이 들려온다. 양주흡은 더 안타까워진다. “경성에서는 이태왕 서거로 인하여 민중이 회집하여 혁명을 하는데 절호의 기회인데 아― 어찌하여야 하는가.”

도쿄에 유학하던 젊은이들이 대개 그러했듯 양주흡도 ‘혁명’을 꿈꾸었다. 3․1 운동 전이고 아직 2․8 독립선언과 검거 열풍도 일기 전이지만, 양주흡의 눈에 이미 혁명은 시작되고 있다. 야시장에 가서 책을 사고 『수양론』이며 『대전과 미국의 장래』며 『연설미사법』 같은 서적을 읽으며 소일하는 동안 서울에선 이미 사람들이 혁명 운동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고종 승하 소식을 듣고 “아― 혁명― 새 생명의 혁명”을 외쳤던 와세다생 김우진과 마찬가지로, 양주흡 역시 옛 군주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에, 애통해 하기보다 곧 격변이 닥쳐올 곳을 예감하고 기원한다. ‘구세계의 장례식’으로 제 1차 대전이 자리매김되고 있던 당시다. 유럽이 쇠퇴하고, 약육강식의 질서가 몰락하고, 제국주의적 세계 질서가 종막을 맞게 되리라고 했다. 1년여 전 있었던 러시아 혁명 같은 경로일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도 바야흐로 혁명을 바라보고 있는 듯 보였다.

1월 30일 마침내 본가에서 돈이 도착했다. 80원이 온 중에 외투를 17원을 주고 사고, 한 판 오락이 없을 수 없어 활동사진관에 들렀다 술 한 잔을 곁들이고, 그래도 서둘러 시모노세키에서 연락선을 탄 것이 2월 1일이다. 2월 2일에 부산에 도착했지만 북청에 이르기까지는 근 1주일이 더 걸렸다. 서울에서 하루 이틀 머물며 영화 관람도 하고, 여러 차례 기차를 바꿔 타고, 함경선 몇몇 역에서는 지인들을 만나느라 지체한 탓이다. 2월 8일 마침내 고향에 도착한 양주흡은 관망이었는지, 1주일쯤 별다른 외부 접촉 없이 독서로 시간을 보냈다. 『혁명론』을 읽고 『연설 및 식사』에 대해서도 자습을 했다. 도쿄를 떠날 때 친구에게 사 주고 온 칸트의 『이상적 국가』도 떠올렸을지 모르겠다. “웅변자습서를 자습하였다.”, “연세혁명사를 자습하였다.” 등으로 단조롭게 이어지던 며칠을 보낸 후 양주흡은 분연 서울을 향한다. 처에게만 알린 조촐한 출발이었다. 2월 16일. 그러나 기차를 타지 않고 말을 타고 이동한 탓인지 원산까지만 열흘이 넘게 걸렸다. 마침내 서울에 도착한 것이 3월 1일 오후 네 시 50분이다.

응답 1개

  1. 말하길

    호오, 혁명을 위해 말을 타고 3.1운동의 현장에 도착한 양주흡! 다음편이 기대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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