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쌍용차 분향소에서 만난 사람들

- 주노정

지난 3월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가 폭파되기 시작한 이후로, 5월 들어 MBC 언론노조의 파업은 100일을 넘겼고, 삼성공장 노동자가 32번째로 백혈병을 앓다 세상을 등졌다. 그 밖에도 너무 많은 일들이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다. 어떤 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전부 중요하고 긴급한 문제로 여겨진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그 모든 사건들이 나에게는 결국 아무것도 아닌 없는 일로 다가왔다.

쌍용차에서 21명이나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도 22번째가 되어서야 알았다. 한 명, 두 명 절망적인 현실에 세상을 등지고 있다는 건 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런데 “22명 째라고?!” 나는 머리로만 그들과 함께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외면’하고 있었다. 5.1 노동절 때에도 시청 앞에는 갔지만 분향소는 지나쳤다. 그들과 직접 연대해야겠다는 마음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나 홀로 분향소 가는 길이 두려웠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곳’으로 걸음을 옮기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들과 ‘진짜’ 함께 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문제가 점점 더 남의 일이 될 것만 같았다.

2012년 5월 12일 이른 오후, 비가 올 듯 말 듯 한 날씨다. 주말 오후 서울 한복판이 늘 상 그러하듯, 시청 앞 광장에서는 귀를 찢을 기세로 유행가가 흘러나오고, 궁궐 앞은 각종 ‘전통’문화 행사로 요란하고 시끄럽기만 하다. 그 사이에 덩그러니 외로운 섬처럼 놓인 쌍용차 분향소가 있다. 격조 높은 궁궐 옆에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것’이다. 그런 ‘것’들의 주변에는 늘 경찰들이 있다. 그들은 굶주린 하이에나 같은 매서운 눈으로 분향소를 노려본다.

어제(11일)는 쌍용차 노동자를 위한 바자회와 문화제가 열렸다. 천 여명이 모였다, 희망버스를 기획했던 송경동 시인은 트위터를 통해 이 날 ‘희망버스’때의 기운을 느꼈다고 전했다. 그런데 신문 기사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그 ‘희망찬’ 기운은 단 하루만에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 것 같다. 주변에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소란 때문이었을까. 여기가 놀이동산인지, 분향소인지 헛갈릴 정도다. 다행히 가로수에 걸린 “살인 정권 규탄, 정리해고 철폐”와 같은, 익숙치 않은 이들에게는 충분히 ‘무시 무시’해 보일 현수막의 문구들로 이곳이 주변의 장소와는 사뭇 다른 곳임을 알아차릴 수 있다.

분향소 앞에서는 시민들이 옹기종기 모여 무언가를 쓰고 있다. “용산, 쌍용차 살인진압 김석기, 조현오를 처벌하라”는 문구를 보고 함께 마음을 모으러 온 사람들이다. 그 가운데 어린 아이 손을 꼭 붙잡고 나들이 나온 가족들, 나라 밖에서 온 외국인이 보인다. 반면에 “어! 여기가 덕수궁이야” 소리치며 그냥 지나가는 젊은 여성들도 있고, 잔뜩 찌뿌린 얼굴로 3초간 분향소를 응시하고 지나가는 어르신들도 있다.

시선을 옮겨 분향소를 바라보았다. 영정 앞에 둘러 앉아 시민상주단과 웃으며 대화 나누는 쌍용차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인다. 분향소 영정은 사진이 아니라 누군가 손으로 그린 그림이다. 22번째로 세상을 떠난 노동자의 얼굴이다. 그 앞에는 소보로빵과, 비타500, 레쓰비, 물, 소주 한잔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하늘로 간 그가 생전에 즐겨 먹었던 음식이었으리라.

그곳을 계속 보았다.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눈물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영정 앞으로 갔다. 두 번 절을 했다. 상주 복을 정갈하게 입고 앉아계시던 쌍용차 노동자 한분과 맞절을 했다. 위로의 말을 해야 했다. 머리로 생각을 하고 있었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가슴이 먹먹하다. 당황스럽다. 누군가 돌아가시면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무슨 위로의 말을 해야 할지…’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그 순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이나 할 수가 없었다. 위로를 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위로를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전할 수 있는 건 함께 연대하고자 하는 마음뿐이다. 내 앞에선 그는 스물두 명 동지들의 죽음과 마주했을 것이다. ‘위로’나 ‘상심’이라는 말이 ‘감히’ 입 밖에 나오질 않았다. 거친 그의 손을 잡아주는 일이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사실 분향소에 오기 전 쌍용차 노동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그런데 직접 가서 얼굴을 마주치니, 적어도 그곳에서는 그런 물음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함께 하는 것이 중요했다. 몸이 그렇게 움직였다. 미약하나마 내가 가진 힘을, 기운을 전달하는 일이 중요했다. 고민을 했다. ‘여기 까지 왔는데…’, ‘나의 괜한 물음이 어제 천 여명의 시민으로부터 받은 기운을 빼앗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 도대체 내가 묻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래서 쌍용차 노동자에게는 묻지 않기로 했다. 자연스레 그 주변으로 눈길이 향했다. 쌍용차 노동자들과 살 부딪히며 연대하고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함께하는 ‘그들’이 있었기에 쌍용차 노동자들도 3년이 가까운 긴 시간동안 투쟁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들은 ‘시민 상주단’으로 불린다. 누구는 분향소에서 문상객을 맞이하고 있고, 누구는 ‘쌍용차 폭력진압 책임자 처벌‘요구에 함께 해달라는 서명을 받는 자리를 지키고 있고, 누구는 길에서 ‘쌍용차 노동자들 소식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다. 잠시 쉬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청했다. 흔쾌히 받아주었다. 신촌의 한 대학교 영상 제작 동아리에서 함께하는 학생들이다. 이들이 어떻게 분향소에 오게 되었는지, 어떤 마음으로 쌍용차 노동자들과 함께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김기현(가명); 학교 전공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사회가 어떻게 굴러가고,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좀 더 좋은 사회가 되려면 어떤 게 필요한지 (현장에서) 공부하려고 나왔어요. 공부하다 보니까 노동문제가 사회를 구성하는데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됐고, 노동자들과 이야기 하는게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나왔어요. 활동하다보니까 분향소에서 여는 문화제에 자주 오게 되었어요. 여기 있으신 분들과 알음알음 눈에 얼굴도 익게 되고, 하루정도 시민 상주단 해보면 좋지 않을까 해서 오게 됐어요. 시민 상주단은 쌍용차 문제를 알리는 1인 시위나 분향소 문상 맞는 일, 선전물 나눠주는 일을 해요. 사람들이 선전물 나눠주는 것 잘 읽어 주면 기분이 좋아요. 생각보다 많이 문상하러 오시는 데 그것도 좋아요. 49재까지 지루하다면 지루하고 외롭다면 외로운 시간인데 쌍용차 동지들과 대화 나누는 것도 좋고 의미 있는 시간인 것 같아요.

길에서 시민 상주단이 나눠주는 쌍용차 선전물을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찌라시’로 생각하는지, 거절하는 모습을 보며 그럴 때마다 나눠주는 이들의 기운이 빠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 친구들에게 시민 상주단 일을 하는 동안 겪었던 어려운 점이나 쌍용차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하는데 있어 한계에 부딪히는 지점이 궁금했다.

신소미(가명); “(쌍용차 강제 정리해고가 일어난) 2009년 때 쌍용차 노동자들이 치열하게 싸웠지만 결국 실패했어요. 2012년에는 쌍용차 투쟁에 주목했으면 좋겠어요. 작년에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이 전사회적으로 이슈가 되고 많은 시민들이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결국 승리했잖아요. 쌍용차 문제를 어떻게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지 고민이에요. 이야기 했던 걸 또 반복적으로 했을 때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라는 문제에 있어서 답답한 게 사실이에요. (이곳에 오기 전) 쌍용차 평택공장을 점거하고 파업하면서 그 주변에서 평택시민들에게 많이 알리는 일을 했었어요. 쌍용차는 지역의 구심점이에요, 많은 지역 주민들이 쌍용차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주민들에게 많이 다가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려내지 못하는 게 있었어요. 3년이 지나고 올해 들어서,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했을 때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쌍용차 노동자 가족들이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 또 한명이 죽었다고 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무겁게 받아들일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어요. 어쨌든 투쟁을 어떻게든 이어 나갈 거고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 얻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어요. 평택에서는 계속 고립되어 있었는데 22번째 와서는 ‘이제는 안 된다. 23번째는 진짜로 막아야 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국 대한문까지 왔잖아요.”

분향소에 오기 전 쌍용차에서 신입사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시대를 살고 있는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물었다.

신소미; “아무리 정리해고 문제가 대한민국 모든 사람들의 문제라고 말해도, 그런 것들이 명문대 다니고 좋은데 취직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대학생들에게 와 닿진 않을 거 아니에요. 자기는 좋은 직장 취직해서 해고 안 당하면 되니까, ‘이것도 너네가 피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단순히 위협하는 말이 아니는 걸 알았으면 하고, 정리해고 문제가 발생하는 큰 맥락을 봤으면 해요. 우리가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때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좋겠어요.”

김기현; “저희는 23번째 희생자를 막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든 쌍용차 문제와 함께 할 거에요. 분향소가 정리되면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쌍용차 문제를 다른 학생들에게 알리는 일을 할 수도 있겠죠. 올해 들어 많은 시민들이 함께 하는 모습을 보면서 3년간 겪었던 무기력하게 이어온 투쟁에서 희망이라는 것이 보일 듯 말 듯 한 상태까지 온 것 같아요. 정치가 어떻고 정권교체가 어떻고 이야기하지만, 이런 시기에 필요한건 모든 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이런 정리해고 문제에 연대하는 게 아닐까요”

나처럼 분향소라는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에 압도되어 가기가 망설여지는 분들은, 부디 용기를 내셨으면 한다. 가서 시민들과 연대하는 기쁨을, 노동자들의 손을 마주잡고 함께하는 기쁨을 누리셨으면 좋겠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함께하면 ‘희망 버스’에서 보았듯이 고통 받고 있는 나와 당신, 그리고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 질 것이다. 주위 사람들 손 붙잡고, 분향소로 찾아갔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이 말은 꼭 하고 싶다. “우리, 함께 살아요!”

응답 1개

  1. 미리퐁말하길

    뒤늦게 보게 되었는데요, 많은 부분 공감했습니다..
    혼자 분향소 가는길에 여러 생각이 들었을것 같구요,
    전, 몇년, 구경꾼의 비약에서 어쩔줄을 몰랐는데요, 집회에 가도 구호는 외치는데
    아무도 못 만난것 같은 기분,허했죠 .최근 은유님(그땐 누군지 몰랐는데 얼마전에 알게되었네요)의 “그냥 옆에서 피켓만 들어줘도 되는데”
    그 말의 생생함에 간 쌍차 행진에서 “함께” 라는 말이 뭔지 그때 알게되었죠..
    수유너머 이곳은 사람을 다시 잡아주는 그런 곳… 그렇네요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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