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고통을 공감하면 쓰나 약이 된다.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현대인은 문명을 발전시켜 편리와 편안을 그리고 건강과 수명을 누리고 있지. 그러나 갑자기 문명의 보호막을 벗겨냈을 때 현대인이 지구상에 현존하는 원시인들만큼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버지가 걱정하는 것은 육체적인 생명력보다 허약해진 정신적인 생명력이야. 만약 3차 세계 대전이라도 일어나서 갑자기 문명의 편리와 편안의 보호막을 거두어간다면 그 충격과 두려움과 절망감 때문에 고통스러운 삶을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현대인은 갑자기 찾아온 고통은 정상이 아니고 무언가 잘못 됐다고만 여길 거야. 생존이 기적이고 병고와 죽음이 자연스러운 리듬인 것을 원시인은 인정하지만 현대인은 인정하지 않을 거야. 문명으로 고통을 제거하고 오랫동안 편리와 편안을 누리었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에 갇혀있는 생명체는 세대마다 생노병사(生老病死)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순환하는 과정임 잊은 거야.

아마 편리·편안하다보니 무의식적으로 잊기도 했겠지만 편리·편안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삶의 괴로움을 잊고 지냈을 거야. 고통스럽게 아이를 낳는 여인은 아이로 고통의 보상을 받지만 고통에서 아무런 가치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현대인들은 고통이 닥치면 고통의 원인과 무능한 의술을 향하여 저주를 퍼부을지도 몰라. 그러나 고통이 우리를 파괴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우리는 고통으로 더욱 강해질 수 있어. 왜냐하면 고통의 맛이 쓰기는 하지만 잘만 사용하면 약이 되기 때문이지. 그렇다면 홍아야, 우리가 고통에서 좋은 의미나 가치를 이끌어내어 고통으로 쓴 약을 제조해 볼까.

어떤 생명이든 즐거움과 기쁨만으로 살아가거나 괴로움과 슬픔만으로 살아가지는 않아. 만약에 즐거움과 기쁨만 계속된다면 덜 즐겁고 기쁜 상태가 괴롭고 슬픈 상태가 될 것이고 거꾸로 괴로움과 슬픔만 계속된다면 덜 괴롭고 슬픈 상태가 즐겁고 기쁜 상태가 될 거야. 아마 즐겁고 기쁜 상태나 괴롭고 슬픈 상태나 하나의 상태만이 한결같이 계속된다면 비교 대상이 없기 때문에 그게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없을 거야.

대개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고통은 더 큰 고통을 겪기 전에 악화되는 상황을 빨리 통제하라는 경보야. 그러나 이미 최악의 상황이 지났는데도 오히려 고통이 더 커진다면 이는 경보 수준을 터무니없이 높이려고만 하는 경험체계 즉 마음이 병들었기 때문이야. 부정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 있어서 이미 마음이 불안이나 구려움으로 병들어 있다면 고통을 실제보다 더 크게 받아들일 거야. 부정적인 마음이 고통을 더 큰 고통의 경보가 아니라 징조로 받아들이니까 고통이 실제와 비례하지 않는 거야.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고통은 육체적인 상태만도 정신적인 상태만도 아니고 상호작용의 결과라는 거야. 불쾌한 전기 신호를 경험체계에 비추어 불안하거나 두렵거나 밉다고 해석된 느낌 중의 하나야. 그러니까 고통은 해석에 따라서 종류와 정도를 달리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해. 그래서 긍정적인 해석으로 좋은 마음먹기가 즉 수행이 가능해지니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어.

고통을 증폭시키는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미움에서 벗어나려면 고통의 부정적인 의미를 긍정적인 의미로 바꾸어야 돼. 만약에 고통이 더 큰 고통의 징조가 아니라 즐거움이나 기쁨을 가져올 징조라고 생각되면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고통도 훨씬 줄어들 테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통을 통제하려는 수단으로 고통의 긍정적인 가치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야. 고통은 쓰지만 잘만 쓰면 실제로 약이 되는 긍정적인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거야.

살아있는 존재는 생존에 필요한 수많은 욕구가 있어. 욕구를 채우면 즐겁고 채우지 못하면 괴롭지. 어떤 생명체든 욕구를 채워서 행복하고 싶지만 한정된 자원을 놓고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어야만 하는 생존 조건에서는 욕구를 충분하게 채울 수가 없으니 괴로울 수밖에. 게다가 자연 상태에서 늙고 병든 것은 잡혀 죽거나 굶어 죽어야 해. 이것이 살아있는 것들이 고통스러운 원래 모습이야.

그러나 인간은 기본적인 요구를 채울 수 있으며, 다른 동물들에게 잡혀 죽지도 않고,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자연스러웠던 고통을 현대 의술로 통제할 수 있으므로,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인간은 자연스러운 고통에서 예외라고 생각하게 됐어. 분명히 현대인은 편리와 편안을 그리고 건강과 수명을 누리는 만큼 행복하겠지.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꾸만 더해가는 생존 경쟁에서 승리자도 경쟁의 스트레스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탈락자도 생존의 기본 욕구를 채울 수 없어서 고통스러워. 그리고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죽음이 늙음과 병듦을 거느리고 찾아오는 길을 막을 수가 없어. 그러니 인간도 고통스러운 존재임을 인정하고 우리는 이 모든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찾기 위해 고통을 직시해야 돼.

고통이 더 큰 고통의 징조로 해석되면 독이 되지만 더 큰 고통의 경보로 해석되면 약이 될 수 있어. 만약에 최악의 상황이 다가오고 있다면 우리는 그걸 알기 위해 경보를 제대로 분석해야 돼. 잘 살펴보면 고통의 여러 증상들이 그 고통이 왜 그리고 어디서 왔는지 넌지시 경보하고 있어. 그러니 그 원인을 규명하고 원인을 어떻게 처치하여 치료할 건지 분명함 계획을 가지고 있어야만 우리가 고통을 통제할 수 있어. 고통은 잠시 뿐이고 치료되면 사라질 것을 믿는다면 이겨낼 수 있기 때문이야.

그러나 만약에 고통을 외면한다면 우리가 고통을 움켜쥐는 것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에 무지한 우리들을 움켜쥐고 흔들 거야. 그러므로 고통의 경보를 정확하게 해석하려면 외면하거나 짜증내지 말고 직시해야 돼. 고통은 우리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이며 또 벗어날 수 있다는 경보야. 그러므로 여유를 가지고 대하되 남의 고통을 진단하듯이 고통을 객관적으로 살펴보자. 그러나 만약에 우리의 힘으로 몰아낼 수 없는 고통이라면 죽음이라는 최악의 상황까지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하고 그 고통과 화해하자. 그때까지 짜증내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고 고통에게 약속하자.

동병상련(同病相憐), 같은 병을 앓는 사람들끼리 서로 고통을 호소하고 고개를 끄덕여 공감해 주면 고통이 덜어진다는 겨야. 내가 누구의 또는 누가 나의 아픔과 괴로움을 동병상련해줄까. 누가 정말로 그 부위에 그만한 통증을 느낄 만큼 공감해줄 수 있을까. 원래 샤먼은 공감으로 남의 아픔을 대신 아파줘야만 환자가 낫는다고 믿었고 실제로 공감 속에서 아픔을 겪었대. 홍아야, 만약에 엄마나 아빠를 대신하여 네가 아플 수만 있다면 정말 네가 대신할 수 있겠니? 만약에 네가 그럴 마음이 들었다면 왜겠니. 그건 네 엄마와 아빠가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너도 엄마 아빠가 얼마나 아픈지 같은 고통을 공감했기 때문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져서야. 그러므로 괴로움을 공감하는데서 사랑과 자비가 나온단다.

아니, 누구라도 우리에게 고통과 괴로움을 호소하면서 조금만이라도 함께 나누자고 하면 그럴 수 있을까? 있다면 어느 정도일까. 적어도 반절쯤은 대신해서 아파줄 수 있을까. 그의 아픔을 반절쯤 느끼는 거 말이야. 우리가 아픔을 공감했으면 그걸로 우리 일이 끝난 걸까. 아니란다. 괴롭고 아프고 슬프면 본능적으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마련이야. 그때에 함께한 우리 모두의 경험과 지혜를 이용하여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함께 몸부림치게 마련이지.

홍아야, 네가 만약에 부당한 해고자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면 해고자의 복직을 위해 함께 투쟁하지 않겠니. 너의 공감과 지혜가 해고자의 원상회복에 약이 되었다면 보람이 있지 않겠니. 이와 같이 남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이 거기서 벗어나는 지혜를 찾게 만들고 결국은 너를 지혜롭게 만들 거야. 그래서 우리가 인류의 고통을 해결할 지혜를 가르치는 위대한 스승이 되자는 게 아니야. 다만 우리가 남의 고통을 공감하고 우리의 사랑과 지혜로 조금이라도 이를 덜어주는 것을 우리의 기쁨으로 삼자는 거야.

홍아야, 고통을 겁내지 말아라. 나의 고통에 대한 통찰과 남의 고통에 대한 공감은 자비와 지혜로 우리를 성숙시키는 보약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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