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우리의 투쟁은 생명의 저지선을 함께 만드는 일이다 – 고동민(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인터뷰

- 고병권(수유너머R)

누군가 내게 말했다. 이제는 화가 나기보다 무섭다고. 마치 연쇄살인범에 쫓기듯 우리를 죽음이 쫓아오는 것만 같다고. 22번째, 또 한 명의 노동자가 생명의 줄을 놓아버렸다. 대한문 분향소에 가면 영정 안에 오려진 그를 볼 수 있다. 지난 5월 9일 대한문 분향소를 찾았다. 3년전 77일의 옥쇄파업을 벌였던 이들, 자신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해오던 경찰특공대를 맞이하면서도 꿋꿋하게 자리를 지켰던 이들이, 지난 3년 간 동료들과 그 가족들이 하나둘 씩 생명의 줄을 놓을 때, 어찌할 바를 몰라 발을 동동구르고 가슴을 치며 울먹이다, 죽은 자의 영혼을 데리고 나와 서울 시내 한복판에 주저 앉은 곳이 대한문 분향소다. 거기서 고동민씨를 만났다. 그는 옥쇄파업 현장을 지켰던 쌍용자동차 노동조합 간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금 그 자신의 표현을 따오자면 “해고가 초래한 죽음에 맞서 생명의 저지선을 만들기 위한 싸움”에 누구보다 열심인 사람이다. <위클리 수유너머>에서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말하자, 무척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흔쾌히 응하며 “고맙다”고 했다. 편집진이 그에게 인터뷰에 응해줘 ‘고맙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그가 먼저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난 지금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말할 것이다. ‘뭐든 하고 싶다, 사람을 살릴 수만 있다면…’

1. 정말 ‘해고는 살인이었다’

2009년 5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대규모 정리해고에 반발하며 파업에 들어갔을 때 내세운 구호는 ‘해고는 살인이다’였다. 변변한 사회적 안전망도 없는 사회에서 경영자들이 ‘경영상의 이유’를 들어 내리는 해고의 결정은 노동자의 목숨을 빼앗는 것과 같다는 것. 서글픈 건 그때 노동자들이 외쳤던 구호가 어떤 사회과학자의 예측보다도 더 정확한 예언이 되고 말았다는 것. 지난 3년간 22명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이 죽고 말았다. 나는 고동민씨에게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3년이 지난 지금, 그 구호의 의미를 다시 풀어줄 수 있겠느냐고.

“사실 그 구호는 선언에 불과했던 겁니다. 해고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지 말아달라라는 일종의 구호였죠. 그런데 그게 증명이 되고 말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사실 대기업, 금속노조 소속 작업장 노동자들은 프라이드가 강해요. 어쩌면 허울좋은 거일 수도 있는데요, 이런 거죠. ‘이 회사는 내가 만들었다’라든가, ‘이 회사는 나랑 함께 컸어’라는 생각.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돌아가신 분들 대부분이 15년 이상, 20년 이상 이 회사랑 운명을 함께 했던 분들이거든요. 사실 쌍용차에서 그동안 구조조정 많이 했어요. 워낙 매각을 많이 당해서요. 그때마다 사람들이 나갔고, 이번에 남은 사람들은 정말 애사심이 있었던 사람들인 거죠. 그런데 다시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해고자가 내가 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심리적 압박이 컸을 겁니다. 게다가 관제데모에 나서야 했죠. 내가 살기 위해 오랜 세월 함께 일한 동료들에게 나가라고 회사의 관제데모에 동원된 것, 참 모멸감을 느꼈을 겁니다. 스트레스가 컸을 테죠. 처음에 한두 분 돌아가셨을 때는 몰랐어요. 뭔가 몸이 안 좋았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러다 파업 끝나기 전이었는데, 저랑 동갑이던 간부의 부인이 아파트에서 투신했죠. 그때부터 우리가 외쳤던 구호, 그게 두려워지기 시작했어요. 해고는 살인이라는 것. 생목숨들이 해고로 인해 목숨을 버리는 구나 하는 것.그 말을 쓰지 말 걸 그랬어요. 후회가 돼요. 계속 내몰렸던 사람들이 그런 선언적 구호에서 어떤 현실감을 느낀 건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들어요. 다른 말을 쓸 걸 그랬어요.”

5월 9일 저녁 7시, 여느 날처럼 대한문분향소에서는 문화제가 열렸다.

5월 9일 저녁 7시, 여느 날처럼 대한문분향소에서는 문화제가 열렸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상징적 선언이 더 이상 상징이 아닌 현실이 되어 버린 것, 그는 ‘후회한다’고 했지만, 그도 알듯, 상징적 구호가 현실이 된 것이 어떻게 구호 탓이겠는가. ‘해고가 살인’이 되는 미래를 막기 위해 그들은 구호를 외쳤지만 ‘해고는 살인’이라는 말은 이미 현재였던 것이다. 삶의 줄을 놓아버리는 사람들이 쌍용차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왜 그토록 쌍용차에서 열심히 일을 했던 나이든 노동자분들이 이렇게 많이 죽게 되는 거냐고, 어떤 사정이 있는 거냐고 물었다.

이 분들은 사실 비정규직이랄까 해고자의 삶을 살아보질 않으셨어요. 나만 해도 장기간 노동, 최저임금 정도 받는 일을 해봤죠. 그런데 돌아가신 선배들은 쌍차에 입사해서 계속 오신 분들이니까 그런 일들에 면역력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희망퇴직하고 나가면 할 일이 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물론 쌍차 대우를 받을 수는 없지만 일자리야 있겠지요. 그런데 일자리가 있어도 쌍차 해고자 출신이라면 도무지 취직이 안 돼요. 경력직임에 불구하고요. 게다가 사실 여기서 수십 년 일하다보면 다른 일 못해요. 자동차 도장공장에서 조립공장으로 옮기는 건 가능하지만 아예 다른 일은 못하죠. 처음에 퇴직금 받은 건 얼마 있으면 금세 날아가는데 쌍차 출신에게 일자리 구하는 건 불가능하고. 또 여기 있을 때는 노동조합이 힘이 있기 때문에 사측이 아무리 힘이 있다 해도 관리자들이 노동자를 함부로 못 대해요. 하지만 바깥에 가면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죠. 그냥 김씨, 이씨 이렇게 불리죠.

좀 전에 회사와 운명을 함께 해왔다는 말이 다른 의미에서 또 실감이 난다. 몸 자체가 회사의 생산 공정에 맞춰져 있고, 심리도 회사의 노사관계 문화 속에서 형성되어 왔기에, 그 노동자들에게 ‘해고’는 말 그대로 수십 년간 만들어져온 존재의 박탈, 즉 ‘죽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 생명의 저지선

지난 5월 1일 메이데이 총파업을 촉구한 행진을 하며 나는 이런 피켓을 들었다. “쌍용자동차에서 22명의 노동자와 그 가족이 죽었다. 나는 지금 그 살인범을 찾고 있다.” 고동민씨에게 그 살인범에 대해 물었다. 사실 그는 지난 총선 때 진보신당 당원들을 만난 자리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는데, 이 죽음에 대해 ‘사회적 타살’이다, ‘정부가 죽인 거다’라는 말씀을 저는 드리지 못하겠습니다.” 살인범에 대한 물음이 간단치 않다는 걸, 그에게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 죽음들에 대해 죄책감을 많이 느낍니다. 내가 열심히 투쟁을 못해서일까. 여러 생각이 듭니다. ‘사회적 타살’이라는 말이 있죠. 아마도 그 말은 죽음이 이 사회에, 즉 모두에게 있다는 말이겠죠.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모든 언론, 모든 단위, 모든 이들이 자기 자신을 빼놓는 느낌입니다. 저부터도 그렇거든요.

순간 고동민씨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그는 자신이 잘 우는 사람이라는 말을 몇 차례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자기 자신을 빼놓는 것에 화가 납니다. 이명박 욕하고 싶죠. 쌍차 경영진들, 지금 대주주인 마힌드라, 열거하자면 한이 없죠. 파산법원, 검찰, 경찰, 어쩌면 우리 동료들까지. 숱하게 많아요, 1차적 가해자들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이. 하지만 1차적 가해자만 있었던 건 아니죠. 언론사에서는 이제 쌍차 문제 더 실을 게 없다고 하더군요. 누구 죽었다는 단신밖에는. 보도할 만큼 했다는 거죠. 그래도 제가 말해요. 제발 이야기 해달라고. 기사의 야마가 된다고 생각되든 아니든, 사람죽은 거 책임감을 느끼면, 아니 이게 사람 살리는 거라고 생각되면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고요.

우리 모두가 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아닐 것이다. 그는 가해자에 우리 모두를 끌어들이면서 사실은 이 문제가 우리 모두의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어 했다. 모두에게 죄의식을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라, 쌍용차의 죽은 이들이 사실은 당신에 관한 이야기라고, 더 이상의 죽음을 막는 일이 사실은 쌍용차의 노동자만이 아니라, 바로 ‘당신을 살리는 길’이라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분향소 풍경을 기록하고 있는 고동민씨

분향소 풍경을 기록하고 있는 고동민씨

저는 쌍차투쟁이 쌍차해고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돌아가는 문제로 이제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해고라는 게 죽음이라는 걸로 증명되었으면 죽음을 막기 위한 생명의 저지선을 함께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경영상의 이유로 100만명 가령이 정리해고 되었다고 합니다. 거기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몇 사람이나 되겠어요. 누군가는 죽음 가까이 가 있겠죠. 우리 사회가 넘어서야 하는 것들이 우리를 통해 발현되고 있는 거라면, 이 싸움을 함께 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드러난 것 아닌가요?

그것이 대한문 분향소를 여기에 만든 이유가 아닐까 생각했다. 쌍용차 앞의 분향소가 아니라 대한문 앞의 분향소. 그것은 지금 이 투쟁이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복직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명 저지선의 문제라는 걸 말하기 위해서 거기 있는 게 아닐까.

3. 대한문 분향소 –방법을 모르겠기에 찾은 방법

여기에 온 건요, 솔직히 방법을 찾기 위해서에요. 우리가 3년동안 격한 투쟁도 하고 정말 여러 투쟁을 해봤어요. 산업은행에 불도 들고 가고 페인트로 피바다도 만들어보고, 24명이 연행될 때도 있었어요. 우리 대오 얼마 되지도 않는데. 희망버스 이어가려고 희망텐트도 해보고 희망뚜벅이도 해보고 희망광장, 정말 여러 동지들이 이것해보면 좋겠다, 저것해보면 좋겠다고 말한 것, 정말 여러가지 해봤어요. 그런데도 세 분이 돌아가셨거든요. 3년동안 방법을 찾기 위해서 천일 동안 투쟁을 해왔는데. 정말 많이 울었어요. 무슨 방법이 없어요. 22명째의 죽음을 들었을 때 사실 저 도망갔어요. 사람들 죽어가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어서요. 그런데 지부장님이 그러더군요. 자기도 미치겠다고 죽을 것 같다고. 그러니 그냥 여기 곁에 함께 있어달라고. 돌아와서 그냥 함께 울기만 했어요.

그는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무슨 기발한 전략도 아니고, 무슨 의연한 행동도 아니고, 그냥 수가 없으니, 사람은 죽어가는데, 답답하고, 그래서 모여서 함께 우는 자리, 그것이 대한문 분향소라는 거다. 내가 용산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용산과 쌍차는 연결되는 지점이 많다. 2008년 촛불시위 이후 야만적 반동의 시기가 도래했다. 미네르바 사건을 비롯해서 요즘 불거진 민간인 불법사찰까지 공안권력이 곳곳에서 사람들을 짓눌렀다. 그리고 하나의 본보기처럼 용산과 쌍차가 희생제물처럼 올려졌다. 경찰특공대가 컨테이너 박스를 이용해서 투입되는 모습까지 똑같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때 그 자리에서 죽은 것과 나중에 사람들이 죽어간 것,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까. 나는 죽은 이들을 껴안은 채 1년을 버티며 싸웠던 용산의 사람들 이야기를 꺼냈다. 무슨 수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대로 물러설 수는 없기에. 그리고 그 1년의 싸움이 결국 2010년부터 힘의 역전을 가져온 것 같다고 말했다. 기륭도 그랬고 희망버스도 그렇고… 여기 분향소를 보니 죽은 자와 1년을 더불어 싸웠던 용산의 사람들이 생각난다고.

앞서 말한 것처럼 사실 분향소는 방법을 찾기 위한 저희의 몸부림입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오만가지 방법을 사용한 건 아닙니다. 단식도 안했고 고공농성도 안했지요. 공장 점거 파업이 경험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분향소를 차릴 때는 수가 없기 때문에 몸부림이라도 해보자 하는 심정이었죠. 그런데 일단 분향소를 차린 뒤에는 이게 전설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어느 누구도 총선 국면에 접어든 이후 싸우려들질 않았어요. 투표로 심판하자고 하고는 아무도 몸으로 투쟁을 하지 않았죠. 그렇게 보면 지금 이 자리, 우리가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4. 현장의 언어와 진실한 투쟁

정말로 선거는 자주 운동의 블랙홀이 되곤 한다. 선거가 운동의 전달이나 증폭, 표출이 되지 않고 운동을 끌고들어가 투표함 속에 가두는 일이 많다. 운동을 대변하는 사람보다 시급한 것은 정말로 운동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운동을 대변하려는 정치인은 많아도 운동을 하려는 정치인은 많지 않다. 고동민씨는 운동 속에서 그가 본 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실 희망버스에서 본 힘을 이어가기 위해 희망텐트를 했으나 희망텐트에서는 사회적 힘들을 확인할 수 없었어요. 금속노조, 노동조합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방식이 여기서 한계를 드러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금속노조가 주최하고 정치인과 중요한 사람들의 발언을 듣고… 이런 방식으로는 사람을 모을 수 없다는 게 여실히 드러났어요. 대중들은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 명확히 느꼈지요. 뭔가 다른 방식을, 다른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희망버스를 보면서 노동운동이 사회운동과 구분불가능한 지점으로 들어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노동운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번 분향소가 그런 측면에서 중요한 것 같다고 했다. 노조가 세운 분향소에 시민이 참배하는 것. 공장 바깥에 만들어진 이 공간, 이런 공간이 열리는 것, 물론 절박해서 만든 것이지만, 뭔가 다른 것이 열린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고동민씨는 조심스러워 했다. 새로운 것이 있지만 전통적 노동운동의 의의가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고, 그 중요성도 분명히 환기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나는 앞서 말한 것과 여기서 약간의 거리를 두고 싶어요. 실제로 금속노조의 방식이 잘못된 것인가, 나는 그런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노동자들이 해야할 투쟁, 했으면 좋겠는 투쟁이 있어요. 우리 사회에 정말 중요하고 필요한 일이죠. 올해 민주노총은 총파업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올 여름에요. 실질적인 총파업으로 이어질지는 아무도 확신 못하지만요. 저는 우리 노동조합이 할 일은 생산을 멈추는 것이라고 봅니다. 세상 사람들이 억압받고 착취받는 지금의 현실 속에서, 그나마 힘이 있고 조직이 있는 노동자들이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생산을 멈추는 것밖에 없죠. 그래서 세상을 바꾸어 내는 것, 그게 긍정적인 거라고 봅니다. 당장에 그것이 후퇴나 실패로 보일지라도 그것은 분명 많은 이들에게 희망을 줄 겁니다.

그는 분명 시민들이 기존 금속노조의 방식에는 호응하지 않는다고, 전통적인 싸움 방식과는 다른 방식과 공간의 창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전통적 운동의 분명한 몫을 강조했다. 노동자들은 그런 운동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듯이. 그렇다면 이 두 가지가 ‘함께 가능한’ 길이 있을까. 상반된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사실이 어떻게 그에게는 하나로 통합되어 있을까. 새로운 방식을 고민하는 고동민씨와 전통적인 운동의 가치를 옹호하는 고동민씨. 그는 매우 흥미로운, 아니, 정말 중요한 말을 내게 해주었다.

김진숙지도위원의 한진싸움과 지금 쌍차의 싸움에 사람들이 연대한 이유, 그리고 금속노조의 그동안의 싸움에 사람들이 연대하지 않은 이유 그게 무엇일까요. 나는 금속노조 싸움에 사람들이 연대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투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투쟁에 대해 말하기는 했지만,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는 실제 투쟁은 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보수언론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87년과 97년 총파업 때 김밥과 물을 가져단 준 건 시민들이었습니다. 김지도위원에게 그렇게 많은 이들이 갔던 것, 그건 김지도가 정말 절박하게 투쟁을 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 사람들, 어떤 목표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공감하고 존경을 표합니다.

언뜻 촌스러워보이는 ‘진실함’이나 ‘절박함’이라는 말. 그런데 그 말이 정말 힘을 갖는다. 말로는 누구나 투쟁을 요청할 수 있지만 그 말에 진실함과 절박함을 담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진실하고 절박한 사람만 할 수 있다. 그것이 마음에 닿는 것이다.

김지도의 말을 보면 그렇게 사회화된 용어를 쓰지 않아요. 굉장이 노동조합스러운 말, 물론 여성이시고 워낙 언변이 좋으시니까. 말도 글도… 그래서 조금 다른 건 있지만, 그대로 그 분의 말을 보면 노동조합 언어가 아닌가, 그렇지 않아요.

‘현장의 언어’라는 게 있다. 사건을 공유한 사람, 경험을 공유한 사람, 그래서 그 감응을 그대로 느끼는 사람의 말 말이다.

바로 그래요. 현장의 언어입니다. 그래야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감동이 전해지거든요. 그게 진정성이죠. 대한문 분향소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저희 처음 분향소 세우며 열 명이 연행되고 또 열 명이 병원에 실려갔죠. 시민들이 조금씩 움직이게 된 건 그런 것들 때문일 겁니다. 나는 저 사람들에게 밥을 가져다주고 싶다. 나는 음료수를… 이런 소식이 퍼지면서 ‘나라도 뭔가 내밀어봐야 하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생기는 거죠.

인터뷰 후 월스트리트 점거를 기록한 책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를 선물했는데 고동민씨가 책을 들고 포즈를 취해주었다.

인터뷰 후 월스트리트 점거를 기록한 책 <점거, 새로운 거번먼트>를 선물했는데 고동민씨가 책을 들고 포즈를 취해주었다.

5. 연대 -나는 네가 되어 울고 또 싸운다

인터뷰가 끝날 때즈음 고동민씨는 두 사람 이야기를 해주었다. 기억나는 두 사람이 있다고.

처음에 우리 참 많이 울었어요. 어렵고 힘들어서. 그런데 아주 인상적인 장면이랄까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저기 앞에 나무, 분향소 옆에 있는 나무 말이에요. 거기서 어떤 여성분이 30분을 울더라고요. 생면부지의 사람이 우리 해고자들의 22번째 죽음에 대해, 저처럼, 저같은 마음으로, 나보다 더 한 슬픔을 나한테 보여주는 거였죠. 물론 나에게 보여주려고 한 건 아니겠지만. 나에게는 그게 충격이었어요. 사실 그때 저는 아무 음식도 먹지 못할 정도로 슬펐어요. 그런데 그렇게 울어준 분, 그 분을 보니 정말 위안이 되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많았죠. 처음에 정말 초라한 분향소였거든요. 영정을 바닥에 그냥 늘어놓고. 그런데 거기서 사람들이 울어주었어요. 저희처럼요. 저희를 수렁에서 건져준 분들이죠.
또 떠오르는 다른 사람들은 이창근 동지 탄원서 때에요. 이창근 동지가 연행되어 탄원서를 내려고 했는데 수천 장의 탄원서가 들어왔어요. 사실 그 실체는 불특정 다수가 아니에요. 대부분 조직된 노동자들이죠. 그런데 어디 사람들이냐. 바로 희망뚜벅이랑 희망광장 함께 했던 장기투쟁 사업장 동지들이요. 콜텍, 재능, 코롱, 케이씨, 현대차 비정규직, 기아차 해복투, 유성이라든지… 그런 동지들이 해준 거에요. 상황도 매우 어렵고, 또 심지어 인간적으로 어려운 관계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가서 탄원서를 받아왔어요. 어려운 조건에서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이 저희 문제를 위해 헌신해준 거죠.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없는 세상이라는 건, 그런 자발적 움직임이 있을 때 되는 게 아닌가 싶어요. 무슨 지침을 내려 총파업을 하는 것도 있겠지만 정말 중요한 건 ‘내가 네 문제를 위해서 이렇게 헌신한다는 것’ 그런 게 전해질 때 세상은 바뀐다고 생각해요. 희망뚜벅이, 그런 기획 투쟁들이 사회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내부적으로는 아주 유기적인 관계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최근에 쌍차 해고노동자들과 와락에서는 벼룩시장도 열었고, 화장품 샘플 같은 것을 모아 이곳저곳으로 보내기도 했다. 쌍차는 항상 아픈 곳이고 우리 모두가 보살피고 돌봐야 하는 곳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이 일을 보면서 이곳이 서로를 돌보고 서로 함께 싸우는 어떤 적극적인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고동민씨는 5월 19일 토요일 4시에 있을 공동행동에 꼭 함께 해달라고 말했다.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의 복직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고로 만들어진 죽음들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함께 나서달라고 했다. 5월 19일, 5월 19일, 5월 19일, 오후 4시다.

응답 2개

  1. 탱탱말하길

    토요일, 모인 사람들보다 시청주변을 가득 매운 경찰들이 더 많아보여 가슴이 아팠습니다. 나는 떡볶이를 좀 잘하니 오늘은 떡볶이를 만들어 분향소에 가서 투쟁하고 있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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