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모든 구멍에서 피와 오물을 흘리면서 태어났다.”
소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라는 불리는 자본의 탄생 과정을 분석하는 <자본>의 한 장에서 맑스는 자본의 탄생 과정을 이렇게 결론 내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사회적 삶을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체제로서 구축되기 위해서 농민들과 노동자들, 심지어 소자본가의 피를 요구했다는 말이겠지요. 다시 말해 자본의 기원에는 힘없는 자들의 피눈물이, 그들의 죽음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자본의 본원적 축적기, 즉 자본의 탄생기에만 해당하는 일인지 이 시대는 다시금 묻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단지 수사법적 과장이 아니라는 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섯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용산 참사, 삼성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의 끊이지 않는 죽음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죽음이 있습니다. 2009년 여름 쌍용자동차 노동자에 대한 대량의 정리해고에 맞서 77일간 파업을 진행한 노동자들을 정부는 경찰특공대를 앞세워 진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290명이 부상을 당하고 60명이 구속되었지요. 그리고 3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스물 두 명이 생목숨을 끊었습니다. 자본은 그 탄생기만이 아니라 지금도 모든 구멍으로부터 피와 오물을 흘리며 자신의 몸집을 불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많은 목숨이 자본과 국가의 폭력과 외면 속에서 죽어가는 현실을 보며 솔직히 절망하게 됩니다. 폭력진압의 공포스러운 기억과 정리해고의 참혹한 현실 그리고 옥쇄파업 가담자라는 잔혹한 낙인 속에서 삶에 대한 모든 기대와 희망을 잃어버린 채 생을 저버리는 노동자들의 죽음이 자본주의의 일상을 구성하는 당연한 풍경처럼 받아들여지는 우리 사회가 참으로 절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스물 두 번 째 죽음을 끌어안고 대한문에서 아직도 투쟁 중인 쌍용자동차 노조의 조합원들 앞에서 그런 절망조차 사치라는 생각 역시 해 봅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의 죽음에 철저하게 얼굴을 돌리고 있는 자본과 국가는 우리에게 절망을 강요합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달라질 것은 없다는 듯 자본과 국가는 외면하고 침묵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절박한 사람들, 더 이상 물러서고 피할 곳이 없는 이들에게 절망조차 쉽게 허락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바로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요?
이번 호 위클리 수유너머는 대한문 앞에 차려진 22번째 쌍용자동차 희생자 추모분향소를 찾았습니다.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그래도 희망의 길을 찾고 있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들의 투쟁에 한국 사회의 여러 모순들이 집약되고 응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투쟁이 어떻게 결론나느냐가 이후 우리 사회의 모습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게 될 듯합니다. 앞으로도 가난한 이들, 힘없는 이들, 노동자들과 민중의 희생과 절망을 자본이 이윤을 축적하는 조건으로 만드는 사회를 계속할지 아니면 그러한 사회를 끝낼지 말입니다.
지난 5월 11일 금요일 대한문 앞에서 열린 “악! 콘서트”에서 들었던 김경동, 김선우, 심보선, 진은영 시인의 ‘스물 세 번 째 인간’이라는 시가 생각납니다. 이 죽음에 아파하고 분노하는 우리, 이런 죽음을 양산하는 이 체제를 바꾸기 원하는 우리가 바로 ‘스물 세 번 째 인간’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스물 세 번 째 인간이 되는 길은 달리 말하면 연대일 것입니다. 절망을 강요하는 사회를 끝내기 위해서는 절망조차 할 수 없는 이들의 연대가 필요하다는 단순한 진리를 기억해 봅니다. 연대가 우리에게 희망입니다.
5월 18일 대한문 분향소 앞에서 22번째 쌍용자동차 희생자의 49제가 있습니다. 그 다음날인 5월 19일 토요일 오후 4시에는 서울역에서 쌍용자동차 문제 해결을 위한 범국민대회가 있습니다. 이 자리에 꼭 와주십시오. 우리 모두 스물 세 번 째 인간이 되기 위해서 말입니다.
[…] | 편집실에서 | 스물 두 번의 절망에 절망하지 않기 위하여_정정훈(수유너머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