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뉴요커는 어디에?(1)

- 권용선(이본의 다락방 연구실)

뉴욕에 대한 첫 인상. 야경사진 찍을 때나 쓸모 있는 높은 빌딩과 그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낡고 오래된 아파트. 그리고 고도 비만인들이 제법 많다는 것과 의외로 거리에 백인들이 드물다는 것. 하긴 평일 대낮에 거리를 배회하는 자들이란 관광객 아니면, 실업자일 확률이 높지. 혹은 그가 일용 계약직 육체노동자일 순 있겠다.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쭉쭉빵빵한 백인 뉴요커들은 다 어디에 숨었을까, 궁금하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 것은, 저마다 ‘노는 물이 다르다’는 거였다. 사철 세일을 하는 메이시 백화점은 다양한 인종의 다양한 체급의 아줌마들로 언제나 시끌벅적하지만, 우리가 상상하는 스테레오 타입의 뉴요커들은 5th AV 니먼 마커스를 사르락 거리며 돌아다닌다. 42가에 있는 허름한 가게에서 1달러짜리 피자 한쪽을 사기 위해 남미의 이민자들이 긴 줄을 서고 있을 때, 그들은 어퍼 이스트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 있고, 그들이 센트럴파크를 정원 삼아 링컨센터와 메트 박물관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으로 돌아갈 때, 맥시코와 푸에로토리코, 아프리카 말리와 중국의 쓰촨성, 한국의 울산에서 온 이민자들은 맨해튼의 바깥, 브롱스와 퀸즈, 브루클린으로 나가는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같은 뉴욕시티 안에서 그들은 한 번도 서로 마주치지 않을 수 있다. 맨해튼은 뉴욕의 강남이다. 물론 강남보다 훨씬 문화적으로 다양하고 관대하며, 어느 정도는 가난한 자들과 이방인들이 비집고 들어갈 틈도 제법 있지만.

뉴욕의 문제 혹은 흥미진진함은 삶의 전 영역에 걸쳐 대단히 섬세하고 복잡하게 그리고 완고한 방식으로 계급적 선분이 존재한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한편에서 이 계급적 선분은 대단히 투명하고 단순하게, 누구나 다 알아차릴 수 있는 방식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어떤 장소를 주로 이용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보면 된다. 이곳에서 관공서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서비스 공간은 계급적 혹은 화폐 지불 능력에 따라 세분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백화점은 신세계든 롯데든 현대든 다 비슷한 컨셉을 갖고 운영되는 상점일 뿐이다.(물론 그것이 어느 지역에 위치하는가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으나) 반면, 뉴욕의 백화점에는 어떤 등급이 있다.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메이시 그보다 조금 비싼 블루밍데일, 그보다 조금 더 비싼 싹스 핍스 그 위에 니먼 마커스 하는 식이다. 과시적 욕망이 강한 한국의 된장녀라면 빨간 별이 선명한 메이시스 쇼핑백은 부끄러운 것으로, 화려한 서체의 니먼 마커스 쇼핑백(갤러리아 백화점 서체와 흡사한)을 자랑스러운 것으로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점에선 나름 합리적이고 한편으론 또 수동적인 뉴욕의 소비자들은 자신들의 지불능력을 넘어서는 장소(혹은 낯선 장소)에는 잘 가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미국(특히나 뉴욕 땅에서)에서 소수자에게 위해를 가하거나 차별하는 것만큼 사회적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지는 범죄도 없다. 아동 관련 범죄가 가장 용서받지 못할 것으로 취급되며, 성적 소수자나 이민자, 타 인종을 차별하는 모든 언어적 신체적 표현은 사회적, 법적 지탄의 대상이 된다.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 흑인들이 오랜 시간동안 피 흘리며 쌓아온 것들, 아일랜드 이민자들과 중국인들이 목숨과 바꾼 것들, 게이들, 여성들, 장애인들이 악착같이 싸워서 만들어온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그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두께만큼 법 혹은 사회는 관용을 베푼다. 그리고 법과 사회가 그들에게 가장 관용적일 때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의 지갑이 활짝 열려 있을 때이다.

누군가 중증장애를 가진 아프리카 출신 게이라고 해도 그것 때문에 그가 뉴욕에서 살아가는 게 문제가 되진 않는다. 합법적인 신분을 가지고 있는 한. 그의 삶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그의 정체성이 아니라 은행 잔고이다. 청소년기에 유학을 와서 마흔이 다 될 때까지 뉴욕에서만 살았다는 한 한국인 여성은 이곳에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인종차별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하지만 bmw를 타고 다니며 고급호텔 레스토랑을 주로 이용하고 오페라 공연 관람이 취미인 사람을 차별대우 할만한 곳이 미국 땅엔 별로 없다. 화폐의 소유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그가 외국인이든 장애인이든 게이든 세 살 먹은 아이든 간에. 물론 어느 사회에나 내부적으로 더 들어가면, 직업이든 학벌이든 집안이든 어떤 척도로 다시 사람들을 묶어세우고 갈음하는 배제의 선분들이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표층의 차원에서 그것들을 선명하게 의식하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화폐의 사용방식 혹은 ‘취향’의 실천이 다시 사람들을 구분하고 구별하는 증거로 활용된다. 맥도널드 티비 광고 모델은 언제나 흑인이거나 아시아인이다. 자동차 아우디의 광고 모델은 매너 좋아 보이는 중년의 백인남이고, 현대차 모델은 흑인이거나 남미인이다. 지하철 내벽에 붙어 있는 커뮤니티 칼리지의 광고 모델은 그야말로 인터네셔널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기에 진짜 뉴요커는 없다. 광고는 어떤 주류적인 현상을 반영하고 타겟이 될 만한 소비자층에 친숙한 모델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그보다 앞서 특정 인종과 계급, 성별, 연령에 대한 이미지를 선도하고 고착화시킨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맨해튼 거리에서 마주치는 고도 비만인들 중 백인-뉴요커는 얼마나 될까? 당연히 별로 없다. 우리가 상상하는 뉴요커의 이미지 속에도 ‘비만’은 제외되어 있지 않나. 그런데, 의학적 질병이 아닌 생활-비만은 그가 어떤 사회적 위치와 상태에 놓여 있는지 보여주는 샘플이기도 하다. 맨해튼에 있는 보통 식당에서 점심 한 끼 먹으려면 팁을 포함해서 10-15달러 정도 드는데, 맥도널드에서 햄버거 세트 메뉴를 먹는다면 약 5달러 남짓. 열량은 후자 쪽이 훨씬 높다. 또 따로 시간을 내서 피트니스 센터에 다니거나 강변을 따라 조깅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하루에 100미터도 걸을 일이 없는 것이 이곳의 생활인데, 그것조차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이다. 다양한 문화적 취미를 향유하도록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 여가를 즐기는 방법 또한 티비 앞에서 팝콘 바구니의 바닥을 확인 하는 생활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에 노동과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관계에서 오는 스크레스까지.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조건상, 육체노동을 하는 저학력의 가난한 비백인일수록 비만이 될 가능성은 높고, 실제로 그렇다. 그러므로 비만은, 한 개인의 무능력이나 나태에 관한 것으로만 전가시킬 수 없는, 그가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와 노동-소비의 문제 전반에 어떤 권력의 기형적 힘들이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응답 3개

  1. 케이말하길

    지나가다님, 신형님 말씀 감사합니다. ^^
    아직 가벼운 인상기의 수준입니다.
    뉴욕에서 ‘차별’의 문제는,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나 제법 엄격한 편인 것 같습니다. 이민자들이 사회의 기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죠. 비백인으로서 경험하는 차별의 ‘개인적 실감’은 물론 도처에 흔하게 존재합니다. 메인스트림에 진입하는 것도 쉽지 않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처럼 구별과 차별이 노골적이진 않다는 것 정도? 제가 지금껏 본 것들은 그정도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니라, 모든 차별을 무화시킬 정도로 화폐의 능력이(바꿔말하면 자본주의가) 엄청나다는 거죠. 화폐앞에서 만인은 평등하다는 것, 엄밀히 말하면 그게 아메리카드림의 실체니까요.
    그런데, 신형님께선 ‘뉴욕의 현재모습’을 어떻게 보고 계신건지 궁금하네요. OWS때문에 재미있는 가능성들을 많이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

  2. 지나가다말하길

    인종차별을 무화시킨 화폐, 그런데 화폐지불능력에 따른 구별의 선은 그보다 훨씬 선명하고 잔혹하군요. 궁금했던 뉴요커의 모습 잘 봤습니다.

    • 신형말하길

      너무나도 다양한 가치 기준들이 공존하는 가운데 ‘어떤 기준을 중심에 두면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또는 ‘그런 다양함을 오래도록 유지하면 어떤 가치관이 종국에는 남을까?’를 고민한다면, 뉴욕의 현재 모습에 답이 있을 거라고 봅니다. 돈은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 가치를 차별화해내지 못할 때 ‘제 값을 받지 못’하는 것일 뿐이죠. 돈에 따라 생활 수준에 차등이 있다해서 인종차별을 무형화시켰다고 보는 건 비약이 아닐까요? 지나가며 대댓글 하나 달아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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