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e-mail로 받은 글 (2)

- 김융희

요즘 제가 좀 바쁩니다. 금년은, 봄이 왔으나 계속 영하의 겨울같은 기온이, 또 갑자기 여름 날씨로 변합니다. 못난 농부 날씨 탓만 한다지만, 원체 농사란 것이 날씨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 요즘처럼 변더스러운 날씨에 맞춰 농사를 짖기란 쉽지를 않습니다. 일상이 뒤죽 박죽으로 정신이 없습니다. 저뿐 아니라, 작물들도 어리둥절 어쩔봐를 모른 것은 마찬가진가 싶습니다. 멋 모르고 싹을 틔웠다가 따가운 햇빛에 타버리기도 하고, 활짝 틔워 줘야할 싹이 꼼짝을 않고 그냥 있기도 합니다.

바쁜건 농사뿐이 아님니다. 지난 겨울을 보내면서 집안의 불편을 겪었던 곳이 있어, 보완공사를 시작했던 것이 나를 몹시 힘들게 합니다. 공사를 하다보면 자꾸 욕심이 생겨져, 계속 이어지는 일들… 그리고 추가 경비…, 특히 그놈의 온돌방이 그리워 구들장을 놓은 공사가 나를 힘들게 합니다. 뚜렷한 기술자도 구할 수 없어 책을 보며 직접 하겠다고 나선 것이 무리였습니다. 계속된 시행 착오…

그러다 보니 금년 봄나물들도 모두 놓쳐 버리고 말았습니다. 꼭꼭 아껴둔 산나물들, 다래순, 취, 고추나물, 두릅들이 다 피워져버렸습니다. 어제 점심약속으로 모였던 식당에서 그 맛있는 된장쑥국을 맛보고서야 집에와서 확인했더니, 지천의 쑥들도 모두 웃자라서 파리똥이 앉아버렸습니다. 이렇게 아쉽게 봄날은 가고, 벌써 여름인가 싶습니다. 아직도 집안인은 삼사 일 더 걸릴 것 같고, 농삿일도 호박을 옮겨 심고, 고구마도 심어야겠고, 늦었지만 열무, 알타리등의 씨앗도 뿌려야겠고….

바쁜중에도 무었인지 허진한 마음. 제일 속상하고 아쉬운 일은, 우리 ‘수유너머’와의 소원감입니다. 어서 일상이 안정되어 정상으로 돌아갔으면 싶슴니다. 또 양해를 구해야겠습니다.

‘위클리 수유’원고 걱정을 하고 있는데 또 눈길이 가는 e-mail이 있어 대신합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통일원에 계셨고, 국회의원이 되어 대통령 비서실장도 하셨으며, 지금은 정계에서 은퇴하여 “한중문화협회”총재로 민간외교 활동을 하고 계신 이영일님께서 보내준 글입니다. 글의 내용에 절대 동감하여 감히 올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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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통일과 북한 동포들의 주권회복
이 영 일(한중문화협회 회장)

1.
우리가 통일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주목해야할 과제는 통일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살피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국민을 주권자로 정의(定義)하는 국가이기 때문에 당연히 통일의 주체도 국민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통일달성의 이익과 분단지속에서 오는 고통, 불행과 불편을 감내해야할 주체도 국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 통일의 주체인 국민이 주권자가 된 것은 1960년의 4.19혁명이 성공한 이후부터라고 해야겠다. 왜냐하면 한국의 민주화는 내부의 정치적 성숙의 결과라기보다는 미국의 정치적 영향력 하에서 정부가 수립되었고 국민에게 주권이 주어지는 헌법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국초기의 한국에서는 헌법상 주권은 국민에게 있었지만 당시의 진정한, 실질적인 주권자는 국민이라기보다는 대통령이나 관료였다. 주권재민(在民)아닌 주권재관(在官)이었다. 그러나 1960년 4.19민주혁명이 성공하면서부터 국민 스스로가 국가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음을 각성하게 되었다.

4.19혁명이후에도 두 차례에 걸쳐 군부가 헌법외적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했지만 그렇다고 국민의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다. 군부를 향한 국민들의 저항이 계속되는 가운데 군사정권들도 4.19의 민주혁명정신을 준수할 것을 다짐했고 주권자로서의 국민을 두려워하면서 국가발전을 추진하였다. 이 결과 한국은 국민을 주권자로 섬기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토대로 경제발전을 추진함으로 해서 현재 세계랭킹 15위권에 이르는 성공국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군 점령 하에 있던 북한은 공산당이 주권을 행사하는 독재국가가 되었고 독재권력을 합리화하는 이른바 주체사상과 수령독재를 내세우고 권력을 부자간에 세습하는 현대판 동양적 전제국가(Oriental Despotism)의 길을 걷게 됨으로 해서 오늘날 지구 최빈국으로 전락했다. 아직도 2200만 북한 동포들은 주권 없이 수령에게 충성할 것을 강요받으면서 중세시대의 농노(農奴)처럼 배고픈 땅에 묶여서 생을 이어가고 있다.

2.
오늘의 세계는 크게 나누어보면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로 나뉜다. 주권이 국민에게 없는 나라는 1인 독재국가이거나 1당 독재국가이다. 그러나 독재국가들 가운데서도 개혁개방을 통해 외부세계와의 소통과 내왕이 자유로운 나라가 있는가하면 외부세계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차단한 가운데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찾아 떠나는 권리마저 허용 않고 굶거나 먹거나 자기나라에만 묶어두는 패쇄적 독재국가도 있다.

오늘의 세계에서 인간의 운명은 개인의 능력보다는 어느 나라에서 출생했느냐에 따라 행복의 수준-자유나 복지-이 결정된다. 미국의 글로벌 발전연구소의 Charles Kenny는 좋은 나라, 즉 국민이 주권자인 나라에 태어나면 자기개인의 노력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복지를 향유한다고 말했다. 주권자로 대접받는 나라에 태어난 인간은 비주권자로 태어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비록 주권은 없더라도 외부와의 소통이 허용된 국가에 태어난 사람은 그렇지 못한 나라에 태어난 사람보다 더 행복하다. 민주화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가 있고 적어도 굶어죽지 않을 수준의 물질적 혜택과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유능하고 근면하고 가정이 화목하더라도 국민의 주권이 철저히 부정당하는 국가에 태어난 사람은 결코 행복할 수도, 발전할 수도, 꿈을 가질 수도 없다. 우리 사회의 종북(從北)주의자들도 월북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주권이 없는 국가에서 겪는 인간의 비극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의 북한은 외부와의 소통이 막힌 최악의 1인 독재국가이다. 독재 권력도 3대에 걸쳐 세습되고 있다. 권력이 세습되기 때문에 전임자의 잘못이나 과오를 시정하기 힘들다. 개혁개방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선군(先軍)정치가 국민들의 복지와 관계없이 유지된다. 독재 권력을 유지시키는 힘이 선군정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남북한이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는 한 남북한 간에는 인민개념(주권 없는 인민과 주권 있는 인민의 차이 때문에)이 공유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하다.

3.
바야흐로 21세기는 주권 없는 국민들이 지구의 도처에서 독재자들에게 빼앗긴 주권을 되찾는 투쟁의 문을 열었다. 작년 한 해 사이에 중동과 북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주권 없는 국민들이 주권을 되찾는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했다. 국민주권을 부정하고 1인 독재를 구사했던 이집트, 튀니지, 리비아에서 국민들은 투쟁을 통해 주권을 회복해 가고 있다. 시리아와 예멘에서도 민주화의 불길은 번져나가고 있다. 미얀마에서도 주권이 국민들에게 돌아오는 중이다. 재스민 혁명의 물결은 그 파고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평양에도 봄은 올 것인가. 이것은 시 구절이 아니다. 평양에도 반드시 봄은 온다. 북한 동포들이 주권을 되찾을 평양의 봄은 반드시 온다. 그러나 봄꽃은 꼭 섭씨 15도(Critical Mass임계질량)가 되어야 핀다. 지금 평양의 온도는 몇 도일까. 현재의 온도를 정확히 아는 사람도 말하는 사람도 없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국제정치전문가들도 소련의 붕괴나 중동의 민주호의 물결을 예측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예측을 못한다고 해서 올 사태가 비켜가지는 않는다. 북한 땅에서는 주체적으로 민주화운동을 펼칠 여지가 현재로서는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북한주민이 독재에 저항할 유일한 수단은 탈북뿐이다. 이점에서 탈북이야말로 최고의 투쟁으로 평가해야 할 것이다.

탈북행렬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평양의 온도는 이미 10도 넘어선지 오래인 것 같다. 배고픔을 틈타 외부세계로부터의 지식과 정보가 북한주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사상강국(思想强國)이라는 북한의 목표는 이미 허물어지고 있다. 경제강국의 꿈은 사라진지 오래다. 군사강국으로 버텨나가지만 갈수록 인민을 장악하기 힘든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정권으로부터 배급이나 온정을 기대할 수 없는 인민들은 탈북하거나 탈법(脫法)으로 생계유지의 수단을 강구한다. 주민이 가난하면 권력집단의 하수인들(보안요원 등 당 간부와 관료)도 가난한다. 북한권력의 하수인들이 살아가는 방법은 비리, 부정부패, 독직이다. 모든 독재 권력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부패에서 북한의 독재자들은 결코 면책될 수 없다. 이래서 평양의 온도는 비록 더디지만 계속 15도를 향해 오르고 있다.

4.
문제는 한국이다. 한국국민들이, 여야 정치인들이 북한 동포들을 주권자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로 단결하지 못하고 국론이 끝없이 분열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야가 국론을 통일하고 북한의 인권실태와 선군노선을 비판하는데 목소리를 하나로 모으기만 한다면 평양의 온도는 조만간 임계질량인 15도에 도달할 것이다. 늦가을 썩은 나무에서 과일이 떨어지듯 북한의 독재정권도 그 지속의 한계점에 근접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통일은 남북으로 갈라진 동포들이 보다 더 자유롭고 더 행복하게 살아가는 조건을 만드는 과업이다. 따라서 남북한의 어느 일방이 무력이나 강압으로 타방을 정복하거나 합방하는 방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 무력에 의한 현상변경은 외세의 개입을 불러와서 통이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분단보다 더 심각한 불행과 재난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결국 남북한이 발전 면에서 세계사의 현재라는 시간과 민족사의 현재라는 시간을 일치시킬 만큼 공동으로 번영 발전해야 한다. 한국이 민주화되고 한국이 경제적으로 발전했다고 해서평화통일의 여건이 모두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이 함께 발전해야 한다. 한국과 더불어 북한도 민주화되고 경제발전이 이루어져야 ‘남북한이 서로 잘사는 상태에서 만나는 통일’을 내다 볼 수 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북한 동포들이 하루속히 북한의 주권자로서의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 곧 공동발전과 통일의 지름길이다.

지금 북한 땅에는 무주권(無主權)의 동포들이 2200만 명 넘게 살고 있다. 4.19민주혁명이 국민을 국가의 주권자로 만드는 것이라면 아직도 주권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북한 동포들에게 주권을 찾게 하여 북한 땅의 실질적인 주인으로 만들어 주는 일이야말로 지금 우리 앞에 나서는 4.19혁명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지금부터 52년전 4.19혁명은 한국국민들을 주권자로 대접받게 만든 민주혁명이었다. 그러나 4.19혁명은 현재까지는 남한만의 민주화에 공헌한 혁명이다. 북한 동포들이 북한의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되찾아 북한의 실질적 주인이 되도록 만들 때 비로소 한민족 전체의 민주화에 기여한 혁명으로, 나아가 민족의 평화통일에 공헌한 혁명으로 4.19혁명은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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