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보일기

‘동건씨의 은밀한 사생활’을 내리면서

- 아비(장애인활동보조인)

이미 독자분들께서 아시는 바와 같이, 얼마 전에 장애인차별철폐연대 활동가 세분께서 수유너머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활보일기’관련하여 간담회를 요청하셨기에 약속 후 방문하신 것입니다. 사실 저는 이 만남 이전부터 어떤 낌새를 채고 있었습니다. 한번은 술자리에서 동건씨를 비난한 장애인분이 계셨습니다. 동건씨를 아는 주변 사람들이 글의 내용들을 다 알고 있으며, 그 내용이 동건씨의 이야기임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건씨가 어떤 정신으로 집필을 허락해줬냐며 비난하셨습니다. 제가 ‘활보일기’를 쓰는 것에 크게 문제를 느끼지 못했던 이용자는 스트레스를 받는 듯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일어난 사태에 대한 스트레스라기 보단 누군가가 자신을 비난하는 것 자체에 대한 스트레스인 듯 보였습니다.

글을 내린 가장 결정적 이유

활보일기를 쓰면서 동건씨에게 동의를 구했었습니다. 이용자의 사생활 차원에서 동의가 필요해 보였습니다. 처음 이용자에게 글을 쓴다고 했을 때에는 이용자는 실명으로 글을 쓰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저는 그의 비밀스러운 것들 또한 쓰겠다고 말하였고, 대화 끝에 가명을 쓰기로 하였습니다. 글을 쓰고 난 뒤 이용자에게 보여주고 게시하였습니다.

가명을 쓰면서 간과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장애인분들이 사회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부분은 협소한 만큼 또 밀접하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가명을 썼음에도 동건씨가 누구인지 동건씨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크게 잘못한 일인데, 동건씨와 함께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은 무수히 많으며, 글을 하나하나 쓸 때 마다 그들에게 모두 동의를 구하는 것은 무리한 일로 보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글을 쓴 까닭에 동건씨의 옛 연인에 대한 부분은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았었습니다. 글을 내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 부분입니다.

남근중심적 장애남성의 성권리 문제가 가장 복잡한 문제는 아닐까

저는 동건씨의 활동보조를 하면서 동건씨의 성욕과 그것이 해결될 수 없는 사회적 조건들이 장애인의 인권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로 느껴졌었습니다. 동건씨가 주장하는 ‘섹스할 수 있는 권리’는 자칫 ‘인권’이라는 추상적 단어로 가려질 수도 있을 구체적 권리로 느껴졌었습니다.

활동가분들께서는 활동보조인과 장애인 이용자가 남근중심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으며, 이렇게 표현된 부분들이 장애남성 일반의 인식으로 비춰져서 독자들에게 잘못된 선입관을 형성시킬까 우려하셨습니다. 저는 활동보조인 일반을 대표하지 못하며 동건씨 또한 장애인 일반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장애라는 것은 그 다양함 만큼이나 그 누구도 대표할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으며, 그것을 돕는 활동보조인 또한 그 누구도 대표할 수 없는 특징을 갖고 있는 듯합니다. 따라서 활동보조인이 쓰는 글, 혹은 장애인을 대상으로 쓰는 어느 글 무엇 하나도 일반성 혹은 대표성을 가질 수 없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제가 느끼기로는 장애문제에 대한 일반성은 불가능의 영역에 있는 듯도 합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 개별성 안에서 대표될 수 없는 문제가 무시되어야 할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동건씨의 성 문제는 그것이 일반적이어서가 아니라 장애인의 성적 권리와 관련된 문제의 창고이기 때문에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부분이 많은 것 같아 보였습니다. 장애여성의 성문제까지 언급할 자신은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경험도 성찰도 없습니다. 장애남성의 성에 한정할 때, 그 문제의 복잡합은 남근중심적이지 않은 남성보다, 남근중심적 남성이 더 복잡해 보입니다. 하반신에 감각이 없어 신체의 다른 부위로 성감대가 옮겨간 남성의 경우 성매매 보다는 안마서비스를 통해 성욕을 해소할 수 있을 듯도 합니다. 그런데 성감대의 측면에서는 남근중심적 남성의 남근과 비남근중심적 남성의 특정 신체는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특정 신체를 자극하여 쾌감을 얻는다는 의미는 ‘안마’와 ‘성매매’가 동일하지만, 남근중심적 남성은 ‘성매매’이기 때문에 특별히 더욱 비난 받습니다. 이런 이유로 가장 ‘섹스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기 힘든 당사자가 바로 남근중심적 욕망을 가진 동건씨 같은 남성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이야기를 하나

저는 활동보조 노동자로서 글을 쓰길 원합니다. 하지만 장애인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으로서 장애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됩니다. 장애인의 활동에 대한 조건이 되어주는 노동의 특성상, 노동 이외의 조건들에 대해서 또한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장애인의 욕구를 채워주는 모든 조건들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활동보조 노동자로서의 고민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저는 활동보조인으로서 글을 쓴다고는 하지만 제 스스로가 무엇이라고 확실하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저는 이용자에게 활동보조를 해줄 때 활동보조인이며, 활동보조인은 어떤 행위의 주체가 아니며 아니어야 합니다. 항상 을의 지위에 있으며 있어야만 하는 특성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한 것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장애인이용자를 침묵하며 관찰하는 그 시점에 저의 노동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용자에 대한 가치 판단을 표현하지 말 것이 요구되면서도, 가치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활동보조일을 하기 이전에는 장애문제에 대한 인식이 전무했었습니다. 저는 공부도 해야하고 노동도 해야하고 제 노동에 대한 성찰도 해야합니다. 요즘 들어 저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당위보다는 제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더욱 궁금해 합니다. 저에게 요구되는 당위가 저에게 기대될 만한 것일 때 그 말은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제 스스로가 대상화의 문제를 넘어서는 의미 있는 성찰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그럼에도 글을 쓰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차라리 비판의 대상이 됨으로써 어떤 논의를 이끌어내는 발제자의 역할 같은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 때문입니다. 저는 아마도 대상화와 고백을 오가는 글을 계속 쓰게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많은 질책 바랍니다.

응답 1개

  1. kjhh1083@hanmale.co.kr말하길

    저는 장애 여성분과의 결혼을 원합니다 마음 착하시고 생활능력 있으신 여성 장애인 께서는 연락처 남겨 주세요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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