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매듭을 푸는 수행자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막연한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미움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필요한 그러나 불쾌한 또는 고통스러운 감정들이야. 이는 마치 몸의 통증이 병이나 상처가 더 악화되기 전에 빨리 치료하라고 경보를 울리는 것과 같단다. 이들은 더 나쁜 일이 닥치기 전에 피해를 막아 나를 보호하려는 감정들이므로 생존에 반드시 필요한 감정들이야.

그러나 최악의 상황이 지났는데도 자꾸 증폭된다면 이는 불안을 불안해하고 두려움을 두려워하며 미움을 미워하도록 작동되는 경험체계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야. 이 불쾌한 감정들은 실제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야. 아니, 감정은 감정이라서 언제나 실제와 비례할 수가 없어. 그렇다는 것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뜻이니까 우리는 부정적인 감정을 쓸어내고 긍정적인 감정을 키워서 우리의 경험체계를 바꿀 수도 있어. 만약에 그럴 수 있다면 그런 노력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부르자. 아마 우리는 수행을 한 만큼 행복해질 것이다.

무언가 계속해서 우리의 기분을 잡치게 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그렇게 만드는지 그걸 찾아내자. 그걸 외면하면 무의식 속에서 우리가 그것에 계속하여 쫓겨 다니므로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자꾸 커지게 될 게다. 우리를 쫓는 그것을 자의식 위로 불러내기 위해 자의식의 우리가 무의식의 우리에게 ‘너 왜, 뭘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미워하냐?’고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돼.

우리를 쫓고 있는 감정이 어떤 감정이고 그 김정을 촉발시킨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를 떠올리자. 그것을 무의식에서 자의식으로 위로 떠올릴 수 있다면 우리는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성숙을 스스로에게 증명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 성찰은 오랫동안 수행한 고수만 가능하니까. 그러니까 우리를 쫓고 있는 저 부정적인 감정들을 외면하지 말고 그 감정들이 드러나는 방식 즉 그 증상들에 주목하자. 그리고 그 증상들 너머에 그 감정을 촉발시킨 한 사건을 떠올리자. 할 수만 있다면 그 사건을 구체적으로 떠올리자.

만약에 우리가 무의식의 정탐에서 우리를 쫓던 부정적인 감정이 어떤 감정이고 그 감정을 촉발시킨 사건이 어떤 사건인지를 찾아낼 수 있다면 부정적인 감정을 물리치는 방법도 찾을 수 있을 거야. 치료 방법은 부정적인 감정의 증상을 완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부정적인 감정을 쓸어내고 그 자리를 긍정적인 감정으로 채우는 거야. 즉 불안이나 두려움이나 미움을 증폭시키는 그 사건이 원인으로 작용하지 못하도록 경험체계를 바꾸어 놓아야 돼. 그러려면 그 사건의 관련자를 용서하고 그 부정적인 사건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와 의미를 지닌 사건으로 재해석하고 재평가하는 거야.

그 사건의 관련자가 우리 자신이든 남이든 다 용서하자. 누구나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야. 일부러 우릴 괴롭히려고 그랬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도 잘 알고 있어. 누가 도둑질을 했다면 그가 살아남을 마지막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지 일부러 우리가 미워서 괴롭히려고 그랬던 것은 아닐 거야. 도둑질이 그의 마지막 생존 방법이라면 우리에게는 옳지 않으나 그에게 옳단다. 굶어 죽는 것보다 조금만 나누어 먹고 함께 살아보자는 그의 생각과 행동을 입장을 바꿔 생각한다면 누가 나쁘다고 탓할 수 있겠어.

또 다른 예로 만약 누가 우리에게 해코지를 했다면 그렇게라도 갚아줘야 그의 마음이 후련해질 것 같아서였을 거야. 그렇다면 그러고 싶도록 빌미를 준 우리 자신을 반성하고 그를 용서하자. 우리가 누군가에게 용서를 받으려면 우리도 누군가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린 알고 있잖니.

그러나 남을 괴롭히는 것을 재미있어하는 용서할 수 없는 경우가 정말로 있단다. 정상적인 공감 능력을 가졌다면 남을 괴롭히려고 마음을 먹었을 때 자기가 먼저 괴로워야 되잖아. 그러나 이런 공감이 안 되는 사람들은 오히려 남을 괴롭히는 것이 재미있을 수도 분명히 있단다. 이런 사람들이 권력을 가지면 권력을 함부로 휘둘러서 많은 사람들을 죽거나 다치게 하고 두려워서 복종하게 만드는 권력의 재미를 맛보려고 할 경우야. 또 이런 부자가 자신의 부유함을 과시하려고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거나 더 못살게 만들려고 할 경우이고. 유명인이 무명인을 하찮게 여겨서 자기를 높이려는 하는 경우도 있을 거야.

이런 경우에 우리들은 그들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미워하고 그들이 그러지 못하도록 대항해야 한단다. 그러려면 약자들끼리 연대하여 힘을 모아야 돼. 힘을 어떻게 모으고 사용해야 할 건지 구체적인 방법은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황에 맞게 이 연대의 원칙을 응용하는 거야. 만약에 우리가 약자나 소수자의 괴로움에 공감한다면 우리는 그들과 함께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려고 우리의 연대의 힘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지혜를 찾을 수 있을 거야. 하버지는 젊은 시절에 사학 재단에서 부당하게 쫓겨난 선생님들과 공감과 연대로 투쟁하고 승리하는 과정에서 하버지 자신이 지혜로워지고 자신감이 생기는 커다란 성숙을 경험했단다.

자, 우리를 불안해하거나 두려워하거나 미워하게 만든 사건의 관련자를 용서하거나 응징했다면 이번에는 그 부정적인 사건에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긍정적인 가치와 의미를 찾을 차례야.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내 스승이 있다(三人行必有我師焉, 삼인행필유아사언).’고 공자님이 말씀하셨어. 또 노자의 도덕경에도 ‘선한 사람은 선하지 않은 사람의 스승이요, 선하지 않은 사람은 선한 사람의 거울(善人者 不善人之師, 不善人者 善人之資)’이라고 말했고. 좋은 것은 본받고 나쁜 것은 경계(조심)할 수 있으므로, 주위의 모든 사람이 나의 스승이 될 수 있다는 뜻이야.

특히 남의 잘못을 교훈 삼아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을 일러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 해. 남의 산에서는 걸리적거리는 쓸모없는 돌이지만 내가 가져다가 옥을 다듬으면 쓸모가 있다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하찮은 언행이나 허물과 실패까지도 나를 수양하는 데 쓸모가 있다는 말이야.

좀 더 적극적인 말을 찾자면 도리에 어긋난 남의 언행이 도리어 자신의 인격을 수양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를 이르는 말로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어. 반면교사는 부정적인 면 즉 악행을 저질러서 거꾸로 선행을 가르치는 교사라는 뜻이야. 우리가 그들의 사악하거나 어리석은 행동을 보면서 ‘나는 절대로 저러지 말아야지’ 하고 결심하게 만들므로 그들 또한 우리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는 거야. 우리는

우리가 무언가 찜찜해서 그 원인되는 사건을 떠올리고 관련자를 용서한 다음, 우리를 괴롭히던 그 괴로움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과 오히려 그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에게 공감하여 그 괴로움을 덜어주기로 우리는 결심했어. 그러면 이제는 그 사건의 관련자와 그리고 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과 헤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직 그것들이 남아있다면 내버려 두자. 그리고 그 사건의 결과가 잘못 전개되어 찾아올 최악의 상황이 무엇인지 떠올려보자. 아무리 잘못 돼도 죽기밖에 더하겠니. 어떤 결과든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해라. 우리의 선택의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회피하거나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우리를 더 불안하고 두렵고 밉게 만든다.

해결책 있다면 걱정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해결책이 없더라도 걱정할 필요가 없단다. 걱정해도 달라질 것이 없다면 쓸데없는 걱정이므로 아니한 만 못하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걱정할 일이 없단다.

이제 마지막으로 홍아야, 우리를 괴롭혔던 사건에서 우리가 겪었던 괴로움을 나에게나 남에게 다시는 강요하지 않는 것도 중요해. 그러나 우리를 괴롭혔던 사건에서 배울 더 중요한 덕목은 우리와 같은 괴로움에 빠진 사람에게 우리가 공감하여 그를 우리의 지혜로 건져내는 거야. 그럴 수 있어야 우리는 진정한 수행자가 되는 거야. 우리의 지혜는 우리가 그 괴로움을 물리쳤던 우리의 경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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