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특집

데리다와 메시아적인 것

- 최진호

1. 데리다, 형용모순의 세계

데리다는 [마르크스 유령들]에서 ‘햄릿’을 등장시켜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나있다’ (Time is out of joint)는 말을 반복해서 상기시킨다. 사실 우리는 미래를 예측가능하길 바라고 예측에 따라 행동하지만, 데리다에 의하면 이런 예측은 불가능하다. 시간의 이음매가 어긋나 있는 한 미래를 예측하려는 체계화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에, 미래의 시간이 우리에게 열릴 수 있다고 말한다. 예측불가능성의 가능성이라고 할까? 이처럼 일견 형용모순처럼 보이는세계를 따라가다 보면 이 형용모순의 세계를 아우르는 삶의 양상들과 만나게 된다고 데리다는 말한다. 데리다 자신은 이 형용모순의 세계를 줄타기 하며 건넌다. 그는 이 세계와 관련한 자신의 언어를 은유적이기보다 수행적이라고 말한다. 즉 삶이나 현실과 유린된 언어가 아니라 삶의 실재 모습을 드러내는 언어라는 것이다. 자신의 표현은 은유가 아니며 실재의 삶을 드러내려는 글쓰기 전략이라는 것. 나는 이번 글에서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을 통해 데리다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를 다시 전유해 드러내고 싶다.

2. 메시아적인 것과 메시아주의

데리다에게 메시아적인 것은 혁명론과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메시아주의-혁명과 메시아적인 것-혁명은 대립한다. 먼저 메시아주의는 역사의 목적을 도입하는 행위다. 메시아주의는 역사의 목표나 방향이 정해져 있고 그 앞을 향하는 사람들의 이념이다. 이 이념의 지평선으로 현실의 삶을 옮기고자 하는 것이다. 메시아주의자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은 실체화된다. 메시아는 항상 미래의 어느 순간에 만나게 될 것이며, 우리는 과거의 짐을 지고 현재를 밀고 미래의 세계로 나가야 한다. 메시아주의자에게 지금의 현실은 적어도 과거 보다 더 나은 것이며, 미래보다는 조금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이 결여와 완성의 시간들이 선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메시아주의-혁명은 유토피아적 혁명이 가능하다.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게 해야 할 공간으로써 유토피아. 유토피아적 혁명은 시간의 실체화와 시간에 대한 은유적 형상을 통해 가능하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은 목적론적이기 보다는 종말론적이다.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적인 것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 과거 현재, 미래가 바꿀 수 없는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시간은 말 그대로 거꾸로 흐른다. 현재의 사건이 과거로 흘러 과거를 바꾸어 내기도 한다. 가령 아버지의 유령이 도래한 순간, 햄릿은 자신이 태어난 의미를 깨닫게 되고 복수라는 미래의 책임을 떠맡는다. 즉 어긋나 있는 시간의 이음매 사이로 일종의 메시아적인 것의 출현한 순간, 당연하게 여겨왔던 시간은 종말을 고한다. 과거의 의미가 새롭게 규정됨으로써 말이다. 시간을 사물화함으로써 시간을 축정가능하게 만들어버린 부르주아의 시간관과는 달리 데리다는 시간에 단절을 도입한다. 관성적 시간 속에서 이음매가 어긋나 있음을 보지 못하는 것과 달리, 메시아적 시간은 이 관성을 잘라낸다. 따라서 메시아적 시간은 종말론적이다.
데리다는 메시아적인 것을 도입함으로서 시간에 불연속을 도입한다. 어떤 목적을 향해서 나가거나 혹은 선적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메시아적인 것과의 만남은 이 어긋남을 받아들이는 순간이며 이 속에서 새롭게 시공이 창조되는 관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와 같이 볼 때, 이 어긋남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에야, 이 어긋남 속에서 펼쳐지는 ‘실재(實在)’의 세계가 열린다.
그렇다면 데리다에게 메시아주의는 나쁜 것, 메시아적인 것은 좋은 것이라고 나누어 볼 수 있을까? 이러한 구분은 메시아주의가 혁명의 실체화라고 비판받았던 것과 유사하다. 계측불가능한 것을 계측가능한 것으로 다시 환원하는 셈이다. 따라서 이런 이분법의 도식은 기각되어야 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메시아적인 것은 메시아주의의 형태로만 드러날 수밖에 없다. 가령 [법의 힘]에서 지적했듯이 신의 폭력을 우리가 직접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의 폭력은 계산 불가능하기에 우리의 앎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코 이것을 ‘그 자체로’ 인식하지 못하며, 다만 그 ‘결과들’ 속에서 인식할 뿐이다. 이 결과들은 ‘비교불가능’하다. 이것들은 어떤 개념적 일반성에도, 어떤 규정적 판단에도 접합하지 않다. 신화적 폭력, 곧 법, 곧 역사적으로 결정 가능한 것의 영역에서만 확실성이나 규정적인 인식이 존재할 뿐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비교불가능한 효과들 속에서가 아니라면, 신의 폭력이 아니라 오직 신화적 폭력만이 그 자체로 확실하게 인식될 수 있다.”([법의 힘], 121) 즉 메시아주의는 메시아적인 것이 오염된 형태다. “환원불가능한 복수성으로 스스로를 제시하는” 메시아적인 것 혹은 해체적 담론은 “불순하고 오염적이고 협상적이고 서출적이며 폭력적인 방식으로 결정 및 결정불가능한 것의 모든 계보에 참여”한다. 따라서 메시아적인 것은 메시아주의에 항상 전미래적으로 출현하다. 메시아주의가 드러날 때 항상 메시아적인 것이 앞에 기입되어 있다. 항상 ‘법’ 앞에 ‘정의’가 기입되어 있듯이, 메시아적인 것은 드러나지 않지만 메시아적인 것을 통해 드러난다. 따라서 메시아적인 것은 항상 해체이며 유령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3. 메시아적인 것과 유령론

[마르크스 유령들]의 서문에서 추론할 수 있듯이 유령은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발생한다. 먼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보자.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일단 우리에게 육체적 능력의 지속이나, 생각의 지속 따위는 불가능하다. 생생불식하는 것이 인간의 존재 조건이기 때문이다. 삶은 변화의 연속이기에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배워야 한다는 당위적인 말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인간에게 필연적인 환상의 문제에서 시작하자. 내가 배움의 상황이 있음을 확연하게 자각하지 못할 때, 변화나 배움을 거부할 때 우리는 반복 속에서, 활동의 정지-죽음 속에서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삶에서 이 착각 혹은 환멸은 존재 조건에 가깝다. 중요한 것은 이 환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어떤 사람은 환멸을 마치 고정불변하는 것처럼 받아들인다. 따라서 이 고정불변하는 것이 흔들릴 때, 무서움 혹은 끔찍함을 느낀다. 무섭기에 회피해야 하고 끔찍하기에 눈을 감고 바라봐야 한다는 것. 그러나 어디 우리가 피하고 눈감는다고 해서 사건이 발생하지 않는가? 차라리 사건이 발생하기를 바라지 않는 욕망과 욕망을 만들어내는 장치들이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살아가기 위해서 이 환상을 환상인 채로 받아들이고 사건에 우리의 몸을 내 맡기는 것이 필요하다.
데리다의 작업은 이런 환(幻)이 환(幻)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데리다는 삶이 환(幻)임을 받아들이는 것이 사는 것인 동시에 사는 법을 배우는 윤리적 태도라고 말한다. 사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에 의하면 삶은 오로지 타자로부터, 그것도 절대적인 타자인 죽음과의 관계 속에서 배우는 것. 완전한 죽음은 배울 수 없고, 죽음을 배제한 삶도 배움이 불가능하기에, 삶과 죽음 사이에, 이 장소에서만 살아가는 법을, 환(幻)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법은 탄생한다. 이 경우 유령의 등장으로 인해 지금의 삶은 깨어지게 되는 데 그것은 과거의 의미가 변경됨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있는 시간의 연속성이 새롭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유령과의 마주침은 도래할 과거와의 만남이고 현재가 변형된다. 배움이라든가 열림이 삶과 죽음 사이에 발생하는 것이라면 이것을 실천가능하게 하는 것은 유령과의 마주침 속에서 이다. 유령과의 마주하게 될 때, 과거의 기원이 만들어지고, 삶의 의미가 완성된다. 그리고 삶이 열린다. 물론 역설적이지만 유령들은 과거의 흔적이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의 이음매가 연결되기에 시간은 종결된다. 왜냐하면 시간은 어긋나있는 것이 통상적인데, 이 시간이 연결되기에 시간은 종결된다.
다른 한편에서 사건을 가능하게 하는 유령론은 존재론과도 매우 유사해 보인다. 하이데거는 존재자의 침묵 속에서, 존재자들의 언어를 내려놓음을 통해, 일상의 언어에서 시선을 거둘 때, 침묵 속에서 존재가 드러난다고 말한다. 존재는 존재자에 대한 모든 척도가 사라진 침묵 속에서 드러난다. 물론 존재는 모든 존재들을 공통으로 묶어주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이런 공통성이 사라질 때 마주하게 되는 하나의 심연이다. 모든 규정이나 구별, 특성이 사라질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존재. 따라서 우리는 존재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떤 규정도 없고, 말할 방법도 찾지 못한 것에 대해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반명 유령은 곳곳에서 출몰한다. 유령의 출몰 속에서 사건의 기원이 설정되는데(가령 햄릿이 자신의 운명을 탄식하는 순간) 이 기원의 앞에 유령이 존재한다. 존재론에서 존재자의 언어를 내려놓을 때 존재가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면, 유령론에서 유령의 출몰에 눈을 돌리지 않는 한 우리는 유령들과 늘 마주하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 상황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간의 존재이해로, 현존재의 존재 이해 속을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데리다의 유령론은 유령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건의 장소인 경계 위의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동일하게 현재에 관심을 둔다고 하더라도, 존재론이 현재에 시선을 집중하는 방면, 유령론에서 시간은 비동시적이다.

4. 메시아적인 것과 혁명의 시간

그렇다면 데리다는 왜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굳이 메시아적인 것을 들고 나오는가? 앞에서 말했듯이 혁명을 사유하기 위해서다. 메시아는 혁명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메시아적인 것과 유령론의 결합 속에서 혁명의 의미도 조금 바뀐다. 흔히 혁명의 시간은 결단의 시간이라고 이야기 된다. 존재론적 전회라든가 시간의 전회가 이루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아주 특별한 시간이자 응축된 시간이다. 대단한 시간이지만 데리다에게 혁명의 시간은 대단하면서 대단하지 않다. 어긋나 있는 시간의 이음매 사이로 유령이 출몰하듯, 우리에게 메시아적인 것은 늘 출몰하지 않는가. 혁명은 아주 작은 것이기도 하고 아주 큰 것이기도 하다. 혁명의 크기의 차이가 있을 만정 혁명의 강도는 동일하다.
아주 작은 순간에도 우리는 메시아적인 것과 만나고 아주 거대한 메시아적인 것과도 마주칠 수 있다. 어떤 유령이 등장할지 통제불가능하다. 그것은 불현듯 오며 늘 오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의도된 것은 현존재의 흔들림을 만들어낼 수 없기에 의도된 메시아적인 것은 불가능하다. 떨림이 가능한 것은 알고 있던 것의 예측할 수 없는 재등장이어야 한다. 메시아적인 것도 혁명의 이미지의 재등장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예측할 수 없는 재등장이며, 예측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회적이고 최종적인 등장이다.
시간의 이음매를 연결하는 것을 데리다는 ‘정의’라고 부른다. 시간의 이음매가 연결되지 않은 조건을 받아들임으로써 이 이음매를 연결하게 된다. 이 이음매의 연속을 혁명의 지속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혁명의 완성은 불가능하며 결여를 채워가는 식의 영구혁명론이 가능할까? 그러나 데리다에게 미완의 혁명은 없다. 매 사건은 종말이다. 이음매에 연결되면 다시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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