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

데리다의 정치

- 정정훈(수유너머N)


“마지막으로 저는 우리가, 참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소속이 없는 지성인들로서, 그가 ‘새로운 국제주의’라고 불렀던 것의 출현에 기여하고자 시도했던 그 모든 상황들을 기억합니다. 우리가 항상 분석과 역사적 참조에 있어 전적으로 동의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여기 또 다른 많은 분들과 함께, 종종 데리다의 주도로, 우리는, 대중의 폭력을 야기하고 그것을 되받아 배양하는 국가와 시장 주권들의 지배력에 대한 다형적이고 다극적인 저항을 구성함에 있어 지성인들과 예술가들이 고유한 역할을 갖는다는 확신을 공유했던 것입니다.”

2004년 10월 9일 췌장암으로 사망한 데리다를 기리며 작성한 추도사에서 발리바르는 ‘데리다의 정치’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흔히 데리다의 정치는 <맑스의 유령들>로 대표되며 정치적 선회라고 불리는 후기 작업들에 집약된 것으로 말해집니다. “얀 후스 연대의 한복판에서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역적’ 지성인들에 대한 원조에서 시작해서, ‘외국인들’에 대한 공안정치와 낙인에 반대하여 유럽에서 피신권을 방어한 일을 지나, 그리고 팔레스타인 인민의 권리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갈등에서 적대자들의 화해를 위한 입장을 표명한 일” 등과 같이 데리다가 현실의 정치적 문제에 대해 개입한 발리바르의 언급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그는 분명 실천적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를 역사가 이른 최종단계라고 선언하며 더 이상의 어떤 변화도 불가능하다며 자본주의의 영원성을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항으로서 정치적 저작들을 쓰고 현실에 개입하기 이전 시기부터 데리다는 분명 정치적 사상가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스스로 밝히듯이 해체란 ‘정의의 이념’, 혹은 ‘불가능한 것으로서의 정의’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의 말대로 정의가 ‘타자의 도래함’이라면 정의에 대한 문제의식은 그가 서구 존재론의 ‘현전의 형이상학’과 ‘음성중심주의’를 비판하며 해체하던 초기시절부터 항상 의식하던 바였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갖 부임한 데리다의 강의를 수강하던 발리바르는 그의 초창기 문제설정을 다음과 같이 기억합니다. “그는 곧바로 가장 어려운 곳으로 갔습니다. 증명 가능성의 조건들이라는 질문-이를 형식적 보증이라는 문제로부터 시간 속에서의 재생산이라는 문제(‘흔적’ 이라는 그의 위대한 테마를 예상하는)로 이행하게 만들면서- 이나 기록/글쓰기의 활동과 사고와 물질성 간의 연결이라는 질문 말입니다.” 초기 데리다의 질문은 우리가 흔히 ‘정치’라고 부르는 제도적이고 행동적인 영역 이전에 이미 작동하는 또 다른 정치의 영역에서 작업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사유의 방식이라는 정치적 영역 말입니다. 텍스트의 세계를 탐사하며 그 질서가 결코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지 않고 그 질서의 ‘이음매가 어긋나있다’는 사실을 규명하는 초기 데리다의 해체 작업으로부터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항하여 새로운 인터네셔널을 주창하는 후기 데리다의 작업까지 그는 일관되게 정치를 사유해 왔던 것은 아닐까요? 데리다의 해체 작업은 정치 이전의 정치를 실행하는 사유의 정치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위클리 수유너머>의 이번 호 동시대 반시대는 ‘시대를 거스런 사상가’로서 데리다를 다룹니다. 소위 ‘정치적 선회’ 내지는 ‘윤리적 선회’로 불리는 실천적 문제와 결부된 그의 저작들에 대한 논의들이 다루어집니다만 그의 정치학이 단지 소제적 차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소제를 다루는 사유의 방식에서부터 작동하고 있음을 이번 글들은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데리다의 정치가 어떻게 시대를 거스리고 있는지 읽어봐 주십시오.

그리고 이번 호부터 <수유너머 위클리>의 해외 칼럼에 새로운 필자가 합류합니다. 한국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서울에서 유학 중인 일본인 ‘카케모토’씨입니다. 우리에게 이곳은 해외가 아니지만 그에게 이곳은 엄연한 해외겠지요. 하지만 동시에 그가 떠나온 그의 고국도 지금은 그에게 국내는 아닌 상황입니다. 이런 애매한 위치에서 바라보는 ‘세계’와 ‘삶’에 대한 그의 이야기들이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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