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다만 일주일을 하루씩 잘 살아내겠다” – 윙 인문학 아카데미의 최정은, 이수영과의 대담

- 고병권(수유너머R)

사회복지법인 윙(w-ing.or.kr)은 탈성매매여성들의 자활공동체다. 1953년 ‘데레사모자원’이라는 이름으로 첫발을 내딛은 이래, 1960년대 ‘은성원’을 거쳐 지금의 ‘윙’까지 60년 가까이 여성복지 및 자활사업을 수행해왔다. 내 개인적으로 ‘윙’을 만난 건 2008년 겨울 수유너머에서 열린 ‘현장인문학’ 워크숍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였다. 수유너머가 구로파랑새공부방 그리고 노들야학과 관계를 맺기 시작할 즈음, 우리보다 먼저 현장인문학의 경험을 쌓고 있던 단체들과 ‘현장’과 ‘인문학’을 화두 삼아 워크숍을 열었다. 윙은 2006년부터 ‘윙-인문학아카데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때 최정은 대표가 쓴 ‘빵보다 장미’라는 표현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온갖 자활프로그램들을 해보았지만 결국에 깨닫게 된 것은 ‘빵’을 던지는 것으로 자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오히려 ‘장미’로 상징되는 ‘앎‘ 내지 ‘인문학’이 더 필요하다는 외침을 담고 있는 글이었다.

당시 ‘평화인문학’이라는 이름을 건 교도소 재소자들을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에 막 첫 발을 내딛었던 나는 그 글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사회에서 추방된 이들에게 도덕적 훈계와 일자리 자격증을 던진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나는 그때 정말 현장에서 필요한 것은 자신을 추방한 세계를 바로보고 또한 거기서 추방된 자신을 보고, 그 둘을 모두 바꿀 강한 ‘눈’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이곳저곳을 떠돌다 다시 현장인문학에 눈을 돌리면서, 나는 몇 년 전 내게 새로운 눈을 갖게 했던 이들 중 하나였던 ‘윙’을 찾았다. 지난 몇 년간 거기서 진행한 현장인문학의 실험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특히 2009년부터 수유너머의 일부 그룹이 ‘수유너머 길’을 만들어 윙과 결합했고, 재작년에는 ‘수유너머’라는 이름을 떼고 ‘인문팩토리 길(roadfactory.kr)’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윙 안에 들어가 함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는데, 그것이 어떤 결과를 낳았을지 무척 궁금했다. 그래서 윙에서 진행한 현장인문학이라는 주제로 ‘윙’의 최정은 대표와 ‘인문팩토리 길’의 이수영 선생을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아래 고(고병권), 이(이수영), 최(최정은))

2011년 10월에 있었던 워크숍 "여성, 자활, 쉼터"

2011년 10월에 있었던 워크숍 "여성, 자활, 쉼터"

1. 윙 인문학 아카데미, ‘이 곳의 언어’

고: 먼저 최정은 대표께서 윙 인문학 아카데미의 지난 6년을 스케치하듯 회고해주실 수 있을까요?

최: 우리가 인문학을 만나게 된 건 2006년입니다. 초기에는 교양강좌 듣듯이 강사선생님들을 초대해서 인문학 강좌를 열었지요. 도움이 안 된 건 아니지만 삶의 변화가 일어난 것도 아니고 조금 답답한 면이 있었죠. 그런데 결정적 계기가 2008년 12월 찾아왔어요. 수유너머에서 현장인문학 워크숍을 하게 되면서 새로운 만남이 이루어졌죠. 그리고 다음해인 2009년 6월에 현장인문학을 윙에 와서 해보겠다고 이수영 선생이 왔고요(‘수유너머 길’). 사실 돌이켜보면 그때도 좌충우돌,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어요. 어떻든 그래도 현장인문학을 꾸준히 했죠. 그러다 작년 2011년 5월, 공식적으로 수유너머 이름을 떼고, ‘인문팩토리 길’이라는 연구실을 만든 겁니다. 저희 윙 안에 공간이 생겨서 연구실도 아예 이 안으로 들어온 거죠.

이: 최정은 선생, 처음에 한겨레에서 어느 분이 쓴 ‘빵과 장미’라는 칼럼에 꽂혔다고 하더라고요. 뭔가 꽂히긴 했는데 ‘장미’가 정확히 뭔지는 모호했을 겁니다. 저희랑 함께 하면서 달라졌습니다. 제가 그동안의 강의를 살펴보니, 하이데거랑 레비나스랑, … 사실 중요한 철학자들이기는 하지만 그게 현장의 고유한 문제들, 현장에 고유한 인간의 문제에서 주제를 만들어낸 게 아니죠. 강사가 공부한 걸 가지고 와서 강의한 것에 가깝다고 할까요.

고: 그러니까 현장의 문제의식, 현장에서 나온 어떤 문제의식을 가지고 강의한 게 아니라는 말씀이네요. 하지만 ‘인문팩토리 길’에서도 니체, 스피노자 등을 했는데요. 어떤 차이가 있는 거죠? 현장에서 스피노자나 니체가 요구되었다고 할 수 있나요?

최: 엄청나죠!

고: 엄청나다는 게 뭐죠?

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나는 현장에 대해서 잘 몰랐지만, 일단 들어와서 보니, 내가 본 ‘친구들’(참고로 이곳에서는 탈성매매 여성들을 ‘친구들’이라고 부른다.)은 신체적으로 너무 무기력해보였어요. 운동을 전혀 하지 않으니 몸집도 지나치게 크고 무엇보다 신경질적이고 우울함을 많이 보이고. 그런데 거기에 대해 플라톤의 동굴이니 레비나스의 윤리니 하는 것이 과연 먹힐까… 제가 보기에는 무거운 신체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제가 공부했던 게 스피노자나 니체여서 그런가, 제게는 신체 문제가 더 눈에 띄었던 것 같습니다. 신체를 움직이고 신체와 함께 하는 인문학이랄까, 어떻든 ‘신체의 능동이 정신의 능동’이랄까. 현재의 윙의 인문학은 이 부분에 대해서 확실히 해두려고 노력합니다.

고: 그러니까 설사 스피노자의 용어를 썼다해도 그것은 차라리 이곳의 언어라는 거죠?

이: 사실 제가 느낀 건 막연한 거고요. 실제로 최정은 선생은 그 언어에 대해 나보다 더 크게 절감했어요. 이 언어가 주는 어떤 것이 자기 감각과 맞아떨어진 거죠. 여기 현장에 오래 있었어도 현장에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해요. 친구들은 마구 들낙날락하고 실무자들은 많이 버티면 2년. 모두가 금방 도망쳐버리죠.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현장을 장악했던 건 기독교 담론이에요. 헌신, 봉사. 이런 담론이 장악하고 있는데 이게 사람들이 오래 버틸 수 있는 것들이 아니거든요. 이런 상황에서 최정은 선생은 그 언어(스피노자와 니체의 언어)에 크게 반응한 거죠.

최: 저는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해온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사회복지 마인드가 없었던 것 같아요. 나는 여기 친구들이 하나도 불쌍하지 않은데, 많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연민이나 동정을 보내야지 굉장히 자질히 풍부한 사회복지사인 것처럼 평가받고, 조금 강하게 대하면 (뭔가 자질이 없는 걸로 평가받았죠). 사실 제가 조금 그런 스타일인데 고립감을 많이 느꼈어요. 전, 그런 동정이나 연민의 마인드로, 헌신적으로 한다 해도 별다른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것에 자괴감도 크게 느꼈어요. 사실 저희 기관이 2005년도까지는 전국에서 예산도 제일 많이 받고 규모도 크니까 해보고 싶은 것 다해봤어요. 그래도 비전이 없었다고 할까. 우리가 뭘하고 있는 걸까. 노숙인 인문학 하는 분들이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빵보다 장미’라고 했을 때, 저는 그 장미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장미를 잡고 싶다는 생각을 강하게 했어요. 그래서 철학 공부를 해야겠다, 무조건. 그런 생각을 했죠. 하지만 내가 대학교양철학 한 것 밖에 없는데 뭘 알겠어요. 강사분들이 짜온 것 그대로 한 거죠. 솔직하게 그때 우리, 그리고 저의 수준이 딱 거기였어요. 교양강좌 듣듯이 그렇게 듣고 있었는데. (이수영) 선생이 딱 오셔가지고, 신체를 보시고 놀라면서 계속 그 이야기를 집요하게 하시고, 모든 걸 다 바꾸어야 되는 거였어요. 바꾸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거였어요.

고: 뭔가 위로하고 봉사하는 거 하고는 차원이 다른 접근이었군요.

최: 그런 게 안 통하는 거죠. 제 개인의 삶에서도 아주 큰 전환기를 맞이 했어요. 이전에는 나는 왜 자질이 없을까, 영성이 없을까. 게다가 실무자들 자주 바뀌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왜 능력이 없는 걸까. 그랬고요. 우리 친구들 대하는 것도 다 내 피해의식 속에 있었는데. 선생님 덕에 니체를 알게 되고 공부하다보니 그게 내 피해의식이었던 거고. 어쩌면 제가 건강하게 살고 있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죠.

고: 중요한 말씀인 것 같은데요. 말씀을 정리해보자면, 그동안은 어떤 헌신이랄까 그런 게 중요했는데. 여기 친구들 그렇게 불쌍한 친구들 아니다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게 불쌍히 여기고 연민을 보이는 사람들이야말로 친구들을 불쌍한 존재로, 그런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떤 나약한 존재로, 어떤 위계의식 속에서 본달까, 그런 점에서 헌신을 말하는 분들이야말로 친구들을 보살펴야 할 존재로 격하시키고 있다고 보신 거죠? 그런데 참 묘한 게, 거기에 반대하는, 다시 말해 친구들을 그런 존재로 봐서는 안 된다고 믿는 분들이,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친구들이 바뀌어야 한다고, 친구들에게 강한 요구를 집요하고 제기하시는 거네요. 보살핌이 어떤 의미에서는 친구들을 그대로 둔다는 의미에서 방치이고, 보살핌에 반대하는 것이 다른 의미에서 동료에 대한 존중인 건가요? 어떻든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 윙 인문학 아카데미를 보면 2006년부터 두 번 정도 특징적인 변화가 있는 것 같은데요. 2006년에 시작해서 처음에는 교양강좌 스타일로. 강사를 외부에서 모셔와서 교양식으로, 그리고 2009년 윙과 직접 결합한 연구자 공동체(수유너머 길)와 함께 인문학 프로그램을 열었고, 2011년에는 아예 연구공동체가 윙 안으로 들어와 하나의 공동체를 함께 꾸렸고.

최: 2008년 12월이 우리에게는 정말 중요했어요. 우리에게는 정말 전환기였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 친구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갔어요. 그 전에는 그런 데 그렇게 간 적이 없었는데 말이에요. 그날 발표를 하면 내가 앞에서 우리 성매매여성이다고 전에는 그렇게 말한 적도 없었고… 모든 게 처음이었어요. 그날 돌아오는 길에, 친구들이 그래요. 대표님, 뭔지, 뭐라고 해야할지, 가슴이, 가슴이 벅차요. 어떤 친구는 내가 쓴 글을 다시 보고 울었다고. 어떻든 그날 큰 힘이 받았어요. 그리고 그날 발표를 했을 때 뒤의 몇몇 분들이 제 글에서, 니체 느낌이 난다고… 니체를 읽은 적도 없는데. 그자리에 있던 박남희 선생님도 그랬고. 제대로 알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는데.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귀에 박히도록 듣게 된 것. 이후에 와서 봤지요. 니체를 보고… 나중에 이수영 선생까지와서 공부를 한 거죠.

고: 사실 묘하네요. 노들야학의 유미 샘도 제게 니체 강의를 제안하며 비슷한 말씀을 하셨어요. 니체가 장애인들에게 잘 맞을 것 같다고. 근데 사실 니체는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소수자들, 장애인들의 마음을 상하게 할 많은 말을 하거든요. 그런데도 니첵 필요하다고 느끼다니요.

최: 제 생각에 윙에는 니체가 말하는 인간형, 대지의 질병으로서의 인간형들이 다 있어요. 저부터가 그렇고, 실무자들, 친구들 다 말이죠. 예전에는 이게 제도 탓인가, 정책 탓인가, 도대체 무슨 탓인가, 그랬어요. 그러다 이제는 천천히 우리를 들여다보는 거죠. 인간에 대한 거는 니체한테 참 많이 배웠어요.

고: 제 기억에 2008년 겨울의 토론은 어찌보면 많은 이들이 윙에게 배운 기회였는데요. 그 워크샵 자리가 왜 윙한테 그렇게 큰 전환기였다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최: 제 안에 몇 년 간 있던 것이 정리가 된 것 같아요.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게, 박정애 원장님에게 원장님 나 원고 써야하는데 인문학 성과가 뭔 것 같아요 했더니, 바로 대표님 변한 거요. 그러는 거에요(웃음)

2. 공동체 일상으로 들어온 인문학자

고: 자 그럼 그렇게 2009년으로 왔고요. 이제 수유너머 길이 윙 안으로 들어왔는데 어떤 차이가 있던 건가요, 이수영 선생님?

이: 2009년에는 (상도동에 있는 ‘수유너머 길’로) 여기 친구들이 공부하러 왔죠. 인문학하고 밥먹고 돌아가고 등산하는 금요일함께 하고… 이런 방식의 공부를 처음 계획하고 조직하고 실행하는 단계였는데, 사실 최정은 샘이 신념은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잘 모르고 있고, 나는 니체는 알지만 현장에 대해서 잘 모르고, 친구들은 신체적으로 저항을 하고… 인문학 시간에 보면 모두 다 졸아요… 이런 게 바로 저항이죠(웃음). 실무자들은 격렬히 저항했고. 여기 지금 남아 있는 실무자들 아무도 없어요. 모두 떠났죠. 알고 보면 내가 다 쫓아낸 셈이 되었는데. 지금은 실무자들이 다 바뀌었어요. 지금 이 실무자들도 어찌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분위기가 바뀐 상황에서 들어온 거고. 이제는 인문학 공부를 함께 하는 게 자연스러운 걸로 알고 시작하는 거죠. 그 당시에는 실무자들의 텃새랄까, 그런 게 있었죠.

고: 그때는 윙과 관계를 맺으며 바깥에 있었고, 지금은 안에 들어온 거죠?

이: 지금은 뭐랄까, 친구들하고 실무자들하고, 이 연구하는 자들의 최소한의 공통의 리듬이랄까, 뭔가 그런 게 형성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고: 여기서 일상을 함께 하기 때문인가요?

최: 일상을 함께 하는 것, 밥도 같이 먹고, …

이: 수유너머처럼…

고: 하지만 수유너머와 다른 점도 있는 것 같은데요. 여기는 연구자들도 있지만, 다른 활동을 하는 분들도 있고… 사실 저희도 현장인문학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함께 일상을 나누는 일을 하지는 않고 있거든요. 공부를 함께 하지만, 일상을 공유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는 거하고, 현장인문학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만나는 거하고. 뭔가 큰 차이가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2008년 12월, 그리고 2009년으로 넘어오면서 이전과는 큰 차이를 경험하셨다고 하셨는데, 이제 일상을 공유하는, 그러니까 작년부터 뭔가 차이를 또 느끼세요?

최: 들어와서 힘든 것도 있죠. 너무 이수영 선생한테 미안한 게, 연구자인데, 너무 미세한 것까지, 너무 깊숙하게 우리 문제들을 보이게 되니까… 너무 신경쓰지 말아야 할 것까지 쓰게 하니까. ‘수유너머길’에서 우리가 현장인문학을 할 때는, 서당식으로 했어요. 그때부터 이것저것 많은 실험을 했고, 2010년에도 그랬고. 2011년 본격적으로 여기와서 강의를 할 때는 처음으로 수영샘이 ppt를 사용해서 강의를 했죠. 그 전하고는 정말 달라졌죠. (웃음) 그냥 강의안 나눠주는 거하고는 다르죠. (수영샘으로서는) 대단히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고 할까.(웃음) 저는 선생님 높이 사는 게, 스스로를 계속 깨가며 하는 게 대단한 거죠. 작년 평가하면서, 올해는 일상에서 책을 잡고 공부를 하는 데 중점을 두자 해서. 그 전에 강좌를 듣는 것에 머물렀다면, 이제는 직접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면서 … 앎의 힘, 앎의 희열(죄송한 표현지만 ^^), 그런 걸 느껴보자 했지요. 올해부터는 미리 발제도 하고 시험도 봐요. 수요일 수업인데, 화요일까지 내용을 요약 정리해서 제출해야 해요. 그러면 이수영 선생이 펜으로 일일이 체크를 해주세요. 다 피드백을 하죠. 시험도 보죠. 중간에는 오픈북으로 바꾸었죠. 근데 그것도 쉬운 것도 아니지만, 그런데 그런 것에 재미가 들렸어요. 세 명 정도가 정리한 글을 발표를 하고 선생님이 설명도 하고…. 올해 놀란 게,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질문을 하기 시작하고… 마구 물어보고… 그리고 숙제를 제 시간에 내고. 빨간펜으로 선생님이 정성스레 쓴 것, 그걸 보고…

고: 일상의 시간들이 그야말로 공부로 전환이 되었군요.

최: 사실 그 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일들이 있었지요. 이렇게 공부를 해가면서 작년부터 우리가 공동체에 대한 생각들을 준비해왔어요. 물론 오래 전부터 저는 공동체로 가야한다는 생각을 해왔어요. 그런데 제가 좀 앎이 짧아서 입밖으로 내놓을 수가 없었지요. 공동체에 대해서 뭘 공부를 안 해봐서. 그런데 선생님과 공부를 하면서, 제가 공동체 공동체 하도 하니까 그래서 그랬는지 몰랐는데, 선생님이 스피노자를 하셨죠. 공동체에 대해 함께 공부를 해오면서, 저희에게 윤리가 만들어진 거죠.

고: 그 윤리란 게 어떤 겁니까. 예를 드신다면….

최: 첫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둘째 약속을 잘 지킨다. 셋째 핑계를 대지 않는다.

고: 뭐랄까, 참 빡세게 들리는데요(웃음).

최: 네, 그래서 언젠가 수녀님들이 몇 분 오셨는데, 자기들보다 더 센 것 같다고(웃음).

이: 그 윤리도 그냥 만들어졌다기보다는, 깊이 들어가보면, 친구들의 삶과 깊이 관계가 되어 있어요. 친구들의 삶에는 항상 핑계될 준비가 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어요. 왜 늦었어요 하고 물으면 온갖 핑계들을 대지요. 수유너머에서는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하나면 족했는데… (웃음)

고: 사실 과거 수유너머에 대한 반발일까, 저희쪽에서는 간혹 윤리라는 말을 꺼내면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도 있어요. 우리는 주방장 쪽에서 새롭게 윤리 문제가 제기되었지요. 역시 윤리는 활동을 하는 사람, 일을 맡은 사람쪽에서 나오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뭔가 부딪히고 하면서… 일단 시작은 냉장고에 간식같은 걸 대충 넣어놓고 가는 것에 문제제기를 했고, 다음에 술마시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고. 확실히 윤리는 몸에서 나오나봐요, 머리쪽이 아닌 것 같아요.

최: 아까 (인터뷰 전에 고병권 선생님이) 발달장애인분들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거기서 우리 앎의 한계랄까, 문제랄까 하는 걸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하셨는데 여기도 정말 그래요. 여기도 지적장애를 가진 친구들 많아요. 좀 똘똘하다 싶어도 능력을 쓰지 않으니까요. 그래서 그 능력을 끌어내고 싶은데, 이 수업만으로는 힘들어서 저희가 목요일에는 공부가 힘든 친구들을 위해 함께 송독하는 시간을 가져요. 함께 책읽는 시간… 그리고 금요일에는 함께 등산하고…

2011년 5월 제주도에 있었던 '여성자활네트워크'와 '인문팩토리 길' 공부모임

2011년 5월 제주도에 있었던 '여성자활네트워크'와 '인문팩토리 길' 공부모임

3. 아픔은 계속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르게 와야 한다

고: 곳곳에 공부가 배치되어 있군요. 이제, 공부방법에 대해서 묻고 싶어요. 책을 읽고 진도를 나가는 식인가요?

이: 일단 책이 있으니 챕터별로 읽어나갑니다. 많으면 1주일에 5-60쪽? 책 판형이 작아서 실제 분량은 많지 않아요. 모든 참여자들은 요약숙제를 내고 발제는 돌아가면서 맡죠. 요약하고 인상깊은 구절, 그 이유를 쓰라고 하죠.

고: 인상깊은 구절을 쓴다고 하셨는데, 어떤가요? 느낌이 조금 다를 것 같은데. 자기한테 와닿는 걸 쓰는 거죠?

이: 지식인들하고는 다른 것 같아요. 여기 근처에 있는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는데 그 친구도 함께 해요. 세미나를 하다 들어왔는데. 질문하는 방식이 전형적으로 대학생 같죠. (웃음) 그런데 여기 친구들은 매개 같은 게 없어요. 느낌이 중요해요. 이 친구들한테는 그 구절들이 딱 자기한테 꽂히나 봐요. 그런데 왜 인상 깊은지는 설명을 못해요. 중언부언하고. 그런데 또 재밌는 것은 인상깊은 구절이 대개 비슷해요.

고: 그런데 그것들이 아까 말한 대학생 친구하고는 많이 다르다는 거죠? 여기 친구들끼리는 비슷한데, 지식인이라거나 어떻든 학교 공부를 많이 해온 사람들하고는 다르다는 거죠?

이: 다르죠. 인상깊은 구절이 한 10개 있으면 한 2개 정도를 반씩 나눠 쓰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쪽 친구들이 반응하는 거하고 다른 사람들이 반응하는 게 딱 달라요. 자기 삶의 절박함이 어떤 공통성으로 있는 것 같아요.

최: 병에 대해서 이수영샘이 책에 쓴 부분, 특히 거기를 다룰 때 반응이 컸죠. 많이 아파본 사람은 그 삶이 더나아지지는 않아도 심오해질 수 있다는 구절. 나만 제일 아프고 제일 불행했다고. 아픈 것만 생각했는데, 이 책에서는 그 아픔이 그냥 아픈 게 아니고 더 깊어지는 거고… 아픔이란 게 그냥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올 거라는 것. 하지만 과거에 자기가 아팠던 부분에 대해서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 지금까지 사회복지사들이 해준 것은 그냥 희망이었죠. 희망을 가져라. 희망을 가져야 한다. 그런 식이었어요.

고: 두 분 선생님이 극복되어야 한다고 본 건, 바로 고통이나 아픔을, 여기 있는 것을 정면으로 보게 하지 않고, 그냥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이 있다는 그런 접근법인 거죠?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의 의미가 달라질 때까지 그것을 정면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

최: 우리는 계속 희망도 덧없다, 앞으로 고통도 더 있을 거다 말하는 거죠. 다만 우리는 그 고통이 그대로 덧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렇게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을 말하죠.

고: 매주 수업하고 등산하고 … 계속하는 거죠?

최: 등산하고, 매장지키는 사람들은 격주로 하고, 나머지는 매주 하죠.

고: 매주 빠지지 않고 등산을 하는 것. 그 중요성을 실감하세요? 어떤 점에서 책읽기보다, 꾸준히 등산을 한다는 것, 그게 더 중요해 보이기도 한데…

최: 정말 등산은 중요해요.

이: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무조건 간다.

고: 그게 정말 중요하죠.

최: 예전에는 비가 조금만 와도 내일 등산가요? 하는 말이 참 많았는데. 이제는 폭우가 쏟아져도 간다 하는 원칙이 서니까요. (웃음)

고: 저희 수유너머R에서도 현장인문학 프로그램을 진행중인데요. 거기서 특히 십대 친구들과 인문학 프로그램을 하는 동료가 있는데. 이런 고민을 토로하더군요. 최근에 어떤 지역에서 기업이 후원하는, 가난한 십대 친구들을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을 맡게 되었나봐요. 그런데 아마 거기 친구들이 수업 준비도 하지 않고 수업 시간에도 아주 산만한가봐요. 그럼 강의를 하는 저희 동료가 야단을 치게 되는데, 그게 안 받아들여지는 거죠. 아이들 뿐만이 아니라 그 프로그램을 주관하는 사람들에게 말이죠. 재단쪽에서는 아이들에게 재밌게 해주기를 바란답니다. 그런데 제 동료는 스스로 난 엔터테어너로 온 게 아니고 공부를 함께 하러 왔고, 배움은 근기(根氣)를 키우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두 분 표현을 빌면 ‘눈이 오나 비가 오나’를 배우는 게 배움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난 앞에서 쇼를 할 생각이 없다, 뭐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아무래도 점점 무서운 선생으로 비춰지고, 그렇게 되고 말았죠. 원하지 않았지만… 스텝들과 충돌이 잦아지다보니, 자문하게 되는 거죠. 난 여기서 도대체 뭐하는 건가 하는… 듣기 싫어하는 친구들에게, 게다가 내가 원치 않는 방식으로 강의를 해야 한다면, 내가 굳이 여기 있어야 하는…

이: 사실 내가 바로 그 재미없고 무서운 선생이었습니다. (웃음) 사실 윙과 거기는 조건이 조금 다르죠. 여기는 유혹의 조건이 있어요. 일자리라고 하는. 싫으면 다른 일자리를 구해야하겠죠. 그런데 여기 있어보면 이곳이 좀 괜찮아요. 일자리도 있고 공부도 할 수 있고 사는 것도 좀 산뜻하고. 뭐 공부가 좋은 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고. 바로 그런 조건에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등산이 있는 거라, 억지로 생짜로 공부를 하게 하는 것과는 조금 다르죠.

최: 수유너머R 멤버 이야기 공감 가는 게 있어요. 사실 여기가 그랬거든요. 여기 수영샘이 그런 사람이었어요. 그때 실무자들 말도 못하게 저항했고, 유일하게 믿어준 사람은 저 혼자였죠. 저는 인문학 맛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을 끌고 가야했고 그런 게 있었죠. 처음에는 정말 엄한 선생이었고 엄하기만 한 선생이었죠. 지금은 변했지만. (웃음)

고: 무엇이 변했고 또 무엇이 변하게 한 거죠?

이: 뛰쳐나간 친구들도 많고, 실무자들도 나 때문에 나간 경우도 많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내 스스로를 바꾸어야겠다고 생각했죠. 전체 리듬을 형성해야 하는데 내가 너무 선각자처럼 리드하려고 했던 것 아닌가. 처음에는 뛰쳐나간 친구들이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친구들이 그렇게 뛰쳐나갔던 그 이유들을 더 알려고 하고 …

고: 텍스트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예전에는 페미니즘 공부도 했고 여기에 계신 분들이 아무래도 여성분들이니까, 그리고 지금 현실 문제에 더 밀착한 텍스트를 공부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런 경우와 지금처럼 현실 문제와 조금 거리를 둔 인문학 텍스트, 가령 여기서 니체와 스피노자를 읽으셔다고 했는데, 이런 텍스트를 택하는 경우. 이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세요?

최: 글쎄요, 당시 페미니즘 텍스트를 공부했었는데, 그건 저희 친구들의 요구 때문이었다고 생각은 안 들고요. 제 생각이었던 거죠. 그런데 니체나 스피노자를 공부하면서,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다보니 지금으로서는 다른 텍스트, 가령 페미니즘을 지금 꼭 읽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우스개소리입니다만, 관련 단체들이 저희 단체에서 ‘여성’이라는 이름을 떼라고 말하기도 하죠(웃음). 우리가 너무 자신들과 다르게 해나가니까요.

이: 제가 그쪽을 잘 모르는 것도 사실이고요. (웃음)

최: 사실 그래서 공격을 많이 받기도 했어요. 실무자들한테도 공격받았고. 하지만 저는 다른 차원의 문제들에 더 주목을 했었고 그쪽으로 가려는 성향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이수영 선생님이 수업 방식에 많은 변화를 줘가며 실제로 바뀌어가고도 있었고요. 어떻게 하면 친구들에게 다가가고, 함께 주고받는 수업을 할까를 정말 고민하는 게 느껴졌어요. 게다가 길 연구실이 우리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면서 서로 부딪히면서 함께 하는 법을 찾는, 정말 많은 노력을 했어요. 그게 쌓여서, 지금은 아주 자유로운 선생님이 되셨어요. 무서운 역할을 이제 제 몫이 되었죠.

4. 답은 없다, 다만 문제를 드러낼 뿐

고: 작년 10월 토론회 이야기를 좀 듣고 싶어요. 제가 미국에서 있을 때 아주 강한 인상을 받았거든요. 토론회 주제로만 보면 특별한 건 아니죠. 사실 그런 토론회들은 많이 있으니까요. 그런 인상적이었던 것은 정리방식이었습니다. ‘풀지못한 숙제들’이라고 했던가요. 풀지 못한 숙제들을 7가지 정도 적어놓으셨던데, 사실 그 어떤 것도 답을 구하기 힘든 것들이었어요. 답이 없는 건지도 모르죠. 그런데 그걸 독특하다고 제가 느낀 건, ‘현장인문학’이라는 게, 인문학이 현장에서 도대체 어떤 역할을 하는 걸까, 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했다고 할까요. 인문학은 현장에 답을 줄 수가 없다, 다만 문제를 드러내게 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저 개인적으로 현장인문학의 의미를 되묻게 되는데, 현장에서 충돌하면서 인문학은 문제를 드러낸다는 것. 게다가 몇 문제들은 그 현장만이 아니라 그 어디에도 적용해도 발견되는 문제들이었거든요. 그때 어떠셨어요?

최: 사실 현장의 활동가들은 인문학자들에 대한 앎의 어떤 열등감이 있죠. 그런데 항상 우리 현장의 문제들을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마침 선생님이 계시니까 이때 한 번 해보자 하는 생각을 한 거죠. 정리를 했는데 정말 힘들고 고통스러웠죠.

고: 최정은 대표님과 박정혜 원장님, 현장에서 활동하시는 두 분이 글을 발표하셨는데요. 어떻게 보면 현장인문학에는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 윙에 대해 말해보자면 인문학자들이 있고, 활동가들이 있고, ‘친구들’이 있지요. 인문학자와 친구들이 만날 때, 그 가운데 자리에 활동가가 있습니다. 활동가의 존재는 매우 독특하다고 생각합니다. 둘을 매개하지만 또한 둘을 함께 취하지요. 활동가가 직접 논문을 써서 발표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수영 선생이 아니라 말이지요.

최: 그 글을 쓸 때 저희가 10년동안 운영해오던 쉼터 문을 닫았어요. 그걸 닫게 한 것도 인문학이었죠. 그 쉼터라는 공간이 우리를 너무나 무력하게 하고, 친구들은 그 안에서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 하고, 무기력한 신체 그대로만 남아 있으려 하죠. 그리고 복지사들에게는 헌신과 희생만이 요구되고. 목자와 양떼처럼. 결정적으로 어떤 친구가 있었죠. 몸도 좋지 않은데다 너무 과체중이었죠. 그런데 누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거의 방치하듯 말이죠. 제가 그 친구를 등산도 보내려하고 뭐든 어떻게 해보려고 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그때 확실히 느꼈어요. 우리가 쉼터로 할 수 있는 게 없구나 하고. 그래서 ‘쉼’이라는 기능은 우리 쪽에 있는 그룹홈 같은 걸로 돌리고 여기는 일하고 활동을 하는 공간으로 바꾸어야게다고 결심을 했어요. 그러면서 그동안 우리가 쉼터에서 해왔던 일들을 선생님과 함께 정리를 해보았죠. 그래서 ‘가족주의’, 가족로망스, 게토, 연민… 그런 것들을 발견한 거에요. ‘쉼터체제’라고 할까요? 그냥 연민의 주사만 놓는 거죠. 여기는 위안받아야하고 쉬어야 하고 그런… 근데 저희는 윙이라는 쉼터하나만 변한다고 바뀌질 않아요. 왜냐하면 여기 쉼터가 아니어도 다른 쉼터들이 있으니 그쪽으로 옮기면 되거든요. 그래서 여기저기 쉼터들을 전전하는 사람들이 생기죠. 제가 개별 쉼터가 아니라 ‘쉼터 체제’의 문제라고 느끼는 게 바로 이 대목입니다. 쉼터를 정리하면서, 우리 개념으로 정리해보자 하는 생각을 했죠. 저 개인적으로 ‘자활’에 대해서 정리해봐야겠다고 생각을 했고. 그래서 빨간펜 지적을 받아가며 한두어달 욕먹어가며 열심히 써보았어요.

이: 쉼터를 없앤건 윙에서도 사건이지만, 전체 쉼터 정책에 대해서도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제가 본 바로는 쉼터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요. 한쪽에는 아예 눌러 앉는 친구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조금 뭔가 귀찮게 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어느 쪽도 쉼터에서 뭘 해볼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눌러앉는 것에 의해서도, 옮기는 것에 의해서도, 쉼터는 모두 무력화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쉼터는 어느 쪽이든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죠. 여기 있는 실무자들이 할 수 있는 건 봉사, 헌신, 인내 밖에 없어요.

최: 엄마 역할만을 하는 거죠.

이: 그런 점에서 쉼터를 없앤 건 그것에 대한 중요한 문제제기라고 봅니다. 쉼터체제라는 말은 우리가 처음 사용한 것 같은데… 사실 여기서 보면 쉼터가 어떤 활력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활력을 떨어뜨리고 뭔가를 해보려는 활동가들도 거기서 영향을 받아 무너지는 경우가 많아요.

고: 개별 쉼터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제도와 정책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군요.

최: 저는 저 나름의 발표 준비를 하면서 정말 많은 걸 배워왔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밥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정말 여러 일상에서 자활 문제를 보게 된 거죠. 이수영 선생이 집요하게 우리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하고, 임수덕 선생이 우리 길에서 공부할 때 1년을 밥을 해준 걸 알게 되었어요. 여기서는 밥하는 분이 있어서 그걸 몰랐는데 길에 공부를 하러 가서 생각해보니, 우리가 그냥 받아먹고만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사실 저도 마찬가지였어요. 엄마의 정신으로 접근했다고 할까. 정말 저는 집에서 얘들 뭔가 해서 먹이면 그걸 여기와서도 똑같이 해 먹였어요. 뭔가 미안해가지고. 우리가 내놓은 소위 엄마표 밥상은 사실 ‘너희가 언제 이란 밥을 먹어보겠어’ 하는 연민의 마음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지금 돌아보면 그게 바로 가족 로망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태도였다는 걸 알게 되었죠. 이제 자연스럽게 쉼터를 정리하면서 저희 스스로가 밥을 해서 먹게 바꾸었죠. 우리 스스로 밥을 해먹겠다는 것. 처음에는 제가 주방 매니저를 맡았고 이후에는 친구들이 했죠. 이게 정말로 윙에서 큰 변화라고 생각해요. 주방에서부터.

이: 작년 발표 문제로 돌아가보면, 사실 2010년에 내가 먼저 발표를 했어요. 전체 활동가들 앞에서. 그리고 작년에는 활동가들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이 두 분 활동가가 발표를 한 거죠. 실제 현장의 활동가와 담론 충돌을 해본 거죠. 실제로 작년 발표에서는 두 사람이 전체 활동가들로부터 공박을 당하는 구조였죠.

최: 그때 방탄조끼 입고 나오라고들 했어요. (웃음)

5. 현장의 날카로움, 현장의 절실함

고: 사실 2010년 이수영 선생님 글, 너무 감탄을 하며 읽었어요. 뭐랄까 현장에서 개념이 탄생한다고 할까. 너무 좋아서 제가 출판을 하자고 제안을 했지요. 거절을 당했지만(웃음). 물론 작년 최정은 선생님과 박정애 선생님 글도 참 좋았구요. 개념들이 명료해지는 면도 있고 또 실제 그 속에서 어떤 구체적 행동이나 조치들이 이루어지니까 놀랍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이제 두 분께 한 가지씩 여쭈어보고 싶어요. 조금 모호할 수도 있고 너무 큰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잘 답변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웃음) 먼저 최정은 선생님께. 제가 현장인문학 게시판을 보니까 최정은 선생이 이렇게 쓰셨더라구요. 현장인문학을 통해 ‘현장만이 촉발할 수 있는 사유의 날카로움’ 그리고 ‘현장에 얼마나 인문학이 필요로 했는지’를 깨달았다고, 인문학아카데미를 회고하면서 쓰셨더라구요. 거기 부연설명을 해주실 수 있습니까? 사실 이 질문은 2007년에 처음 뵈었을 때도 제가 여쭈었던 것 같아요. 현장인문학에 나설 때마다 어쩌면 계속 반복할 수밖에 없는 질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여쭙겠습니다. ‘현장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인문학’, 그리고 반대로 ‘인문학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현장’, 이 두 가지에 대해 어떤 말씀을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최: 저는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 하나하나가 정말 버라이어티 했어요. 늘 생각해야했고 늘 결단해야했죠. 그러면서 늘 어떤 갈구가 있었죠. 이건 현장에서만 느끼고 만들 수 있는 문제다 하고 느끼는 뭔가가 있어요. 저는 일상에서 정말 수도 없이 느꼈거든요. 그런 것들을 제가 언어화하지 못했던 한계, 그걸 이제 인문학자를 만나면서 그게 개념으로 탄생되어가는 과정을 함께 한다고 해야하나… 그래서인지 정말 놀라웠어요. 인문학과 현장이 정말 함께 해야 하는 구나를 그러면서 느꼈지요. 이제는 우리가 가야할 길이랄까, 다른 삶의 가능성이랄까 하는 게 조금 보여요. 옛날에는 윙으로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되고 싶은 것도 많고 갖고 싶은 것도 많았죠. 그런 게 엄청나게 많았는데 지금은 뭐 그런 게 없어요. 목표가 없어요. 그 대신 일주일 하루하루만 제대로 살아가다보면 만들어지겠지 하는 그런 생각. 너무 추상적인가(웃음). 솔직히 그래요! 일상을 살아내는 게 정말 중요하고 의미있어요.

고: 이수영 선생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던져보고 싶어요. 어쩌면 앞서 최선생님께 던졌던 말도 그렇고, 지금 이수영 선생에게 던지는 질문도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이수영 선생도 올해 인문학 아카데미를 계획하는 글에서 이 아카데미의 어떤 의미랄까 하는 이야기를 하셨더라고요. 가난하고 소외되었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아마도 듣고 싶어하지 않은 데도 앉아 있는 이들에게 현장에서 인문학을 말하고자 하는 이가 뭔가를 호소할 말이 있다면, 그런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만약에 ‘가난한 이가 왜 인문학을 더 공부해야 하느냐’고 묻는다면 이수영 선생은 어떤 답을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 글쎄요, 제가 답을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너무 큰 질문이에요(웃음). 예전에 ‘빵과 장미’라는 말을 했는데, 빵은 뭐고 장미는 뭔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고병권씨는 인문학은 문제를 드러내고 제기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글쎄요, 조금 비슷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장이 갖고 있는 판타지, 환상 같은 걸 봅니다. 그게 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친구들에 대해 그동안 정부나 기관에서는 뭐를 해주면 되나 하는 생각으로 접근한 것 같아요. 뭔가 결핍된 것을 찾죠. 가만히 보니 ‘주거권’이 없네 하고는 주거권을 주는 식으로. 그런데 그런 게 빵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친구들에게 주거권주고, 직장줘도, 도망가죠. 왜 그럴까요. 그런 이차적 권리랄까, 제도적 권리랄까, 물론 그것들도 정말 중요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현장에서 더 선결 문제가 있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장미 아닌가 싶습니다. 친구들도 이런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가난해. 우리는 결손 가정이야. 나는 성매매를 했어. 이런 간난신고 등을 통해 어떤 결핍의 감정을 가져요. 그래서 정상적인 가정을 위해 나는 뭔가가 필요해, 바로 그것들을 메워주는 게 ‘빵’이라는 것 같아요. 그런데 여기 있는 실무자들도 비슷한데요. 무슨 매뉴얼이라도 있는지 모두가 똑같이 행동해요. 복지사가 된다는 게 그런 건지 몰라도. 그런데 실제 여기 친구들 보면 그 매뉴얼대로 되지를 않아요. 그러면 매뉴얼을 바꿔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된다는 거죠. 얼마전 친구들이 제게 선물을 주었어요. 그런데 거기 표현이 저 친구들이 평소에 쓰지 않았던, 도저히 쓸 수 없던 표현들이 담겨 있었어요. 인문학이 조금씩 들어간다는 걸 느꼈어요. 저는 중요한 걸 느꼈습니다. 우리는 가난하지만, 그 가난을 극복하는 데 있어 환상을 가지면 안 돼죠. 가난이나 성매매가 삶의 큰 결핍이라고 느끼는 것, 그걸 극복해야만 하는 때가 있어요.

고: 그걸 큰 결핍으로 느끼면서 더 가난해진다는 거죠?

이: 네 그런 면이 있어요. 그런 걸 뚫고 들어가는 것, 그게 인문학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를 가두는 환상을 깨닫는 것. 그 점에서 친구들이 많이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답은 되지 않지만, 문제를 달리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최소한 여기 달리 사는 사람이 있다는 걸 보니까요. 여기서 밤 10시까지 공부를 하며 그렇게 살아가는(웃음), 어떻든 달리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는 걸 보는 거지요. 함께 주방에서 밥도 하고 그렇게 함께 살아가면서…

고: 그게 정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자는 시간이 아니라 깨어 있는 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 깨어 있는 시간을 함께 나눈다는 것.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 함께 밥도 하고 살아가면서 서로를 보니까요. 책을 읽기 전에 서로 사는 모습을 보니까. 함께 꾸리는 일상 안에 공부가 자리한다는 것. 정말 중요한 면인 것 같아요.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