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배움의 현장을 구성하는 기술

- 기픈옹달(수유너머 R)

0. 소외

5월 18일 금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피곤하다. 몇 시간이나 떠들었는데 공허한 허공에 말을 뱉어놓은 것 같다. 씨앗을 심듯, 그렇게 알찬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결국은 요원한 희망일 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당황해서는 나중엔 대체 무슨 이야기를 떠들고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이르기까지 했다. 생각해보니 토끼전의 다른 주인공이 거북이 아니라 별주부라 불리는 자라라는 사실을 이야기하느라 진을 뺀 것이었다. 거북이가 아니라 ‘자라’라구!!!

역시나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비단 이번 주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지난주는 조금 나았지만 그 전 주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두 주전, 역시나 허공에 내뱉듯 그렇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종이에 이렇게 적었다. ‘선생은 언제 소외되는가.’ ‘소외되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등등.

낯선 이방인으로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은 참 고단한 일이다. 친구들은 온 몸으로 따분함을 표현한다. 구부정한 어깨며, 책상에 미끄러지듯 기대어 앉은 꼴이며…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친구까지.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고 생각하며 그저 시간을 축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바람처럼 시간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수업 시간이 끝나곤 아이들은 썰물 빠지듯, 순식간에 사라진다. 올 때는 그토록 드문드문 오더니, 돌아가는 길은 바람 같다. 텅 빈 공간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피곤하다.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몸은 피곤하고. 마음은 공허하다. 머릿속에서는 벌써 ‘대체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지?’라는 질문을 수십 번도 더 던지고 있다.

배움의 공간에서 선생의 역할을 맡은 이가 소외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그것을 단지 무시당한다는 뜻으로 생각하면 위험하다. 만약 그렇다면 소외당하지 않기 위해 권위와 위엄을 몸에 둘러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방패막이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즉, 여기서 소외당한다는 것은 배움의 공간에서 배움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며, 다르게 말하면 그 현장에서 배움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1. 무능력

빈곤청소년과 인문학을 한다고 이야기를 하면 누군가는 이렇게 말한다. 힘들겠지만 참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그런 일을 하면서 보람을 느낄 거라고. 천만의 말씀. 그런 식의 ‘의미 있음’이 나에게 ‘의미 없음’이 된 지 오래다. ‘보람찬 봉사활동’으로 이 활동을 부르고 싶지 않다. 이것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부르는 순간 나는 내 삶의 일부를 ‘희생’해서 저들을 돕는 따듯한 손길이 된다.

사실 여기에는 일종의 ‘구원자의 비유’가 숨어있다.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무능한 자를 구해주는 그 도식. 이 배치에서 나는 지식의 전달을 요구받는다. 많이 공부했으니 그 많은 지식을 누군가에게 나눠주어야 한다. 유식한 자는 무지한 자를 앎으로 이끈다. 마치 구원자가 길 잃은 양을 빛으로 인도하듯. 교육을 통해 삶이 바뀌리라고 말한다. 빈곤에서 무기력에서 그들을 건져낼 수 있다고 말이다.

‘인문고전’이라는 해괴한 말을 만들어낸 이지성은 이렇게 말한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하고 학습의지를 잃었던 아이들이 전국 저소득층 공부방 대상 학습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에게 논어의 ‘인(仁)과 예(禮)’를 얘기하며 왕따에서 리더로 변화했다”(중앙일보 2012년 1월 25일) ‘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책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는 고전을 통한 인문학을 배우면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리더가 된다는 말을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학습의지가 없던 친구들이 자발적으로 공부를 하고, 덩달아 성적까지 높아졌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까지 말한다. 인문고전을 읽으면 천재의 두뇌를 만들 수 있다고.

이런 척도에서 보자면 지난 5년간, 빈곤청소년과의 만남은 모두 허투루 돌아갈 일이다. 몇 년간 함께 공부한 친구들은 여전히 책보다 PC방을 더 사랑한다. 공부하자면 여전히 손사래를 치며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를 할 것이다. 성적이 좋아졌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천재의 두뇌를 닮았다고 할 만큼 지능이 높아졌다고 하기도 어렵다.

어떻게 보면 나를 피곤하게 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몇 년을 함께 공부했지만 ㄷㄱ는 여전히 담배를 피우고, ㅅㅎ는 여전히 만화책과 PC방에 빠져있다. ㅁㅇ이와 ㅁㄱ이는 여전히 경계성이라는 영역에 머물러 있고, ㅈㅎ나 ㅇㅎ는 여전히 책 읽기도 버거워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ㅁㅎ는 속옷 회사에 취직했다고 하고, 법대에 가고 싶다는 ㅁㅇ의 꿈은 여전히 이루기 힘들어 보인다. 지난 몇 년간의 수업은 이들의 삶에서 무엇을 바꾸었을까?

정말 인문학이라는 것이, 고전을 읽는 다는 것이 ‘구원’에 비유할 만큼 전지전능한 것인가? 이지성이 말한 것처럼 보통 아이를 천재로 만들 수 있는 비법이 숨어 있는 것일까? 지난 몇 년간의 경험은 ‘희망’을 이야기할 만큼 유의미한 변화를 만들어냈기 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가르쳐준 시간이었다. 지식의 무능력함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고 해야 하나?

2. 배움

질문을 바꿔보자. 과연 그 현장에 선생으로 참여한 나는 어땠는가? 보람대신 기쁨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이때 기쁨(說/悅)이란 공자가 말했듯 배움에 뒤따르는 것이다. 즉, 유의미한 변화를 통한 보람 대신 배움을 통한 기쁨이 있었다는 말이다. 과연 나는 무엇을 배웠는가?

첫 수업에서였던가, ㅁㅅ는 수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렇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손이 아파 못쓰겠어요.’ 공책을 봤더니 고작 한 글자를 써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한 글자를 써놓고 불평이냐고 타박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ㅁㅅ의 말은 진실을 담고 있었다. 손이 아파 글을 쓸 수 없는 연약한 신체, ㅁㅅ는 자신의 문제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연필을 쥐는 것조차 쉽지 않은 연약한 신체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에게 공부란 자신의 연약한 신체를 단련시켜 나가는 과정이었다. 손에 굳은살을 박아 넣는 과정.

ㅅㅎ는 늘 구부정한 아이였다. 구부정한 등을 펴려면 아프다며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다. 게다가 도통 알아보기 힘들도록 글씨가 엉망이었다. 매 수업시간 마다 등을 펴라는 말이 ㅅㅎ 귀에 꽂혔다. 제대로 글을 쓰지 않는다는 이유로 2~3번은 물론이거니와 많으면 5~6번까지 다시 쓰는 일도 있었다. 놀랍게도 반복할수록 나아졌다. 등을 펴고 바르게 앉는 것은 물론, 글씨도 정갈하게 바뀌었다. 반복이란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

ㅁㄱ이와 ㅁㅇ이는 이른바 ‘경계성’이라고 부르는 친구들이다. 또래에 비해 이해하는 능력이 살짝 부족하다. ㅈㅎ와 ㅇㅎ는 또래에 비해 읽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 하지만 이들과 함께 공부한다고 해서 무슨 큰 불편함이 있지 않았다. 적어도 함께 읽고 쓰는 공부에서는 이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하는 친구들이었다. 지능과 성실함은 무관하다.

ㅌㅇ이와 ㄱㅅ이 역시 일종의 장애가 있는 친구들이다. 읽고 쓰는 데 있어서는 다른 친구들 보다 떨어질지 모르지만 이 둘은 비범한 능력의 소유자이다. ㄱㅅ이는 교우관계에 있어서만은 꽤 뛰어나다. 사람들 사이의 힘의 배치를 파악하고 적당히 처신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ㅌㅇ이는 눈치가 빠르다. 어느 순간 사라졌다가 어느 새 다시 나타나고는 한다. ㅌㅇ이가 사라지면 ㅌㅇ이가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지능의 척도가 말하지 않는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중고등학생과 <로미오와 줄리엣>을 읽었다. 끝나는 시간까지 로미오는 남자 주인공이며, 줄리엣은 여자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줘야 했다. 그것도 한 달 내내. 텍스트를 읽지 않은 까닭도 있겠지만 이들은 삶 자체가 분절이다. 기억하기 보다는 반응하기. 이 때문에 이들은 순식간에 말을 잡아채는 능력을 갖고 있다. 시를 지어보면 아는데, 익숙한 낡은 언어 대신 자신을 표현하는 다른 말을 발굴해내데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글에선 삶이 묻어 있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체취가 묻어 있다. 말은 관념을 형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삶의 연장이다.

3. 스승

<무지한 스승>에서 랑시에르는 유식한 자가 무지한 자를 일깨우는 그 낡은 방법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스승의 행위란 곧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식한 자가 자신의 지식을 무지한 자에게 쉽게 설명해 주는 것, 이것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그러나 랑시에르는 거기에 함정이 있다고 말한다. 설명자, 유식한 스승은 결코 무지한 자를 유식하게 만들 수 없다고. 그것이야 말로 바보 만들기라고.

도리어 그는 지능의 평등을 주장하며 설명자 대신 무지한 스승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에 떠오르는 자연스런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스승은 대체 왜 필요하다는 것인가? 모든 지능이 평등하다면 누가 누구에게 배우는 일이 없어야 할 것 아닌가? 랑시에르는 이렇게 말한다. ‘스승은 질문한다. 그는 말을 명령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에 대해 무지하던 또는 스스로를 단념하던 지능의 발현을 명령한다. 그는 이 지능이 하는 일이 주의 깊게 이루어지는지, 이 말이 강제를 피하기 위해 아무거나 되는 대로 말하지는 않는지 검증한다.’(64쪽)

다르게 말하면 스승이란 ‘강제하는 자’이자 ‘검증하는 자’이다. 스승이 보는 것은 주의 깊은지, 즉 성실함의 문제이다. 다르게 말하면 스승이란 성실하도록 강제하는 자이며, 성실함을 추동하는 자이다. 랑시에르는 이것을 욕구와 의지의 문제로 풀이한다. ‘욕구가 멈추는 곳에서 지능은 쉰다. 더 강한 어떤 의지가 그의 소리를 들리게 만들고 계속하라고 말하지 않는 한 말이다. 네가 무엇을 했는지를 보아라. 그리고 모든 것에 동일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너 자신이 너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면서 네가 이미 쓴 동일한 지능을 적용한다면 네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아라.’(104쪼4)

말을 바꿔야 한다. 지식, 앎, 교육이라는 말 대신 배움이라는 말로. 지난 몇 년간의 활동이 무엇을 가르쳤는가, 무엇을 알려주었는가, 어떤 지식을 전해 주었는가라고 묻는다면 말하기 힘들다. 도리어 가르침은 실패하고, 알려주는 것은 까먹기 일쑤다. 참여한 선생, 나에게 무엇을 가르쳤는가라고 묻지 않고 무엇을 배웠느냐고 물었던 것처럼 참여한 그 친구들에게도 무엇을 알았는가, 어떤 지식을 얻었는가를 묻기보다는 무엇을 배웠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러나 랑시에르가 말하는 것처럼 이 배움에는 적지 않는 노고가 필요하다. 다르게 말하자면 그가 말한 무지한 스승이란 곧 지식을 전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의지를 강제하는 자’이다. 학생이 자신의 의지를 쉼 없이 발현하고 있는가를 점검하고 검증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쉼 없이 반복해서 읽게 하고, 쓰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허리를 곧추 세우고, 큰 목소리로 읽으라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오롯이 자신의 신체를 써서 텍스트를 만날 때 배움이 일어난다. 따라서 이 배움의 현장을 일차적으로 책임지는 선생의 역할은 학생들이 자신의 힘으로 텍스트를 만나도록 만드는 일이다. 의지를 강제하는 다양한 기술을 개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교육 담론의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는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이 ‘의지를 강제하는 기술’을 무시해버리는 데 있다. 즐거운 교실, 행복한 배움 등등은 학생이 자발적으로 배움의 현장에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지만 사실 그것은 시작점만을 말해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 욕구가 발심發心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맞겠지만 항심恒心 마저 그 욕구가 책임지는 경우는 드물다.

랑시에르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욕구 때문이라기보다는 의지의 문제 아니던가. 물론 이 의지를 키워가는 기술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근기根氣, 뿌리 기운을 길러가는 일이다. 전통적인 공부법이 근기를 키우는 데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청소년으로 돌아오면, 대부분의 청소년들은 의지보다 욕구가 앞선다. 욕구는 엄청나게 큰데 의지는 보잘 것 없이 작다. 청소년의 다양한 문제들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도 대부분 배움을 욕구의 차원에서만 논의할 뿐이다. 학생의 의무, 성실함과 꾸준함은 그렇게 간과된다.

처음 이야기했던 문제로 돌아가자. 소외감을 느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왜 배움의 현장이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했던 걸까? 설명자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 아닐까? 말의 성찬으로 그들의 귀를 채우려 했기 때문이 아닌가. 의지를 강제하기 보다는 욕구를 촉발하려 했기 때문에. 함께 배움의 현장을 만들어가려 하기 보다는 선생은 가르치려하며, 학생은 듣고 보려고만 했기에.

응답 1개

  1. 결을 따라말하길

    저도 학생을 가리키면서 이론과 현실의 괴리에서 가랑이가 찢어질 듯한 당혹과 무감각이 저의 마음같습니다. 무엇보다 오랫만에 사람냄새 나는 글을 보아 나도 모르게 읽고 또 읽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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