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나 어떡해……

- 성태숙(구로파랑새나눔터지역아동센터)

아침마다 눈이 번쩍 떠진다. 통합진보당 사태와 관련하여 뭐 새로운 소식이라도 있나 싶어서다.당원도 아닌 주제에 흘끗거리는 것조차 자격이 있을까 싶은 마음도 있지만 그래도 평생 소신으로 ‘진보’를 삼아 왔기에 구경할 자격 정도는 있겠지 하고 혼자 허락을 구해 버렸다. 이제부터 쇼 타임!

진보통합당 사태에서 눈길을 돌리기 어려운 것은 이처럼 꼭꼭 싸맨 과부의 속곳을 들쳐보는 듯 한 짜릿한 관음증적 만족감을 떨쳐버리기 힘든 까닭이다. 거기다 그 동안 쌓인 약간의 불만도 이런 관음증에 불을 붙인다.

올해 진보정치는 지레 한 물 간 것 같다. 한숨이 나오면서도 이건 다 너희 때문이야 하고 돌을 던질 상대가 있다고 생각하니 약간 안도하는 것 같아 이것 봐라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까닭인가? 맨 정신에도 괜히 전화를 걸어진다. 상대는 민주노동당 구의원 후보자로 나섰다 연거푸 근소한 차로 고배를 마신 지역아동센터에서 일하는 동네 사람이다.

횡설수설하는 말귀를 잡아보려 애썼지만 부글거리던 생각들은 기포처럼 빵빵 터져 나오기 바쁘다. ‘나, 살면서 우리 동네에서 한나라당 사람들은 본 적 별로 없어, 내가 만난 한나라당 사람들은 바로 니들이나 다름없어. 니들끼리 이미 다 알고 있고, 니들끼리 의논하고, 니들끼리 결정해놓고 나오라마라 하고, 니들은 구청 욕 맨 날 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 다 알고 사업 다 받아먹고 말이야……’아이 이러지 말걸, 쪽 팔리게스리…..‘니들 경기동부연합이지?’하고 막지막으로 몰아세웠더니 평소에도 심성 곱고 예의바른 이 사람은 전화귀 저족에서도 공손하게 한 손으로 전화기를 바치고 있을 법한 목소리로 ‘정말 외롭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하고 쓸쓸해한다. 참 머쓱해지는 순간이다.

그런데 한 이틀 뒤 갑자기 우리 동네 진보통합당의 수장으로 있는 여성분이 텔레비전에서 당권파 비대위의 집행위원장인가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아이씨, 아이씨….. 괜히 숨이 할딱거려졌다. 기도 센 동네에 살면서 그 동안 사람들하고 잘 어울려 살지도 못한 주제가 이런 민감한 때 전화를 걸었으면 빈 말이나마 위로의 말이라도 할 것이지, 어따 대고 술도 안 마시는 주제가 취객이나 할 법한 소리만 골라서 그리 찍찍 내뱉었단 말이냐 후회가 막심이다. ‘역시 당권파였던 거야……’

이런저런 쓸 데 없는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마음을 심난하게 한다. 나 같은 사람은 6.25때라도 태어났으면 이 쪽 저 쪽에서 다 총맞기 바빴겠다 싶으니 등에서 식은땀이 다 죽 흐른다. 겁은 많아서 엄청 혼자 쪼는 거다. 이제부터 신심으로 빌어야 한다. 다시는 쓸데없이 꼭지가 돌지 않도록 말이다. 그래서 ‘야 니네 당권파 맞으면서, 경기동부 맞으면서 왜 아닌 척 했어? 내 말이 그리 허접해 보여, 응?’하는 전화를 맨 정신에 걸지 않도록 말이다.

어젯밤 문득 진보란 무엇이고 보수란 무엇인가 하는 개념을 제대로 알고나 있는 것인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건 순전히 공부방 어떤 애 집 때문이다. 하도 청소를 안 하고 살아서 무슨 텔레비전에 나오는 ‘쓰레기 집’을 방불케 할 만큼 더럽게 해놓고 사는 집이다. 지난 토요일 아이들 몇과 그 집 청소를 해주느라 생고생을 한 뒤부터다. 어젯밤 아이들 수영을 마치고 데리고 오다 그 집에 두면 좋을 것만 같은 책장을 길에서 발견하고, 그걸 아이들과 낑낑거리며 갖다 주다가 ‘나는 아무래도 진보주의자가 아닌 게비여’하는 생각이 퍼뜩 든 것이다. 아니, 무슨 놈의 진보주의자가 그리 가족을 끔찍하게 여기는가 말이다. 잘 모르지만 이렇게 가족 같은 기존의 제도를 끔찍이 여기는 것이 과연 진보주의자가 해도 되는 일인가 하는 의문이 새삼 들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일평생 가장 중요한 정체성으로 진보주의자라는 것을 삼아 왔는데 이마저도 많이 틀린 것이면 늘그막에 정말 고생이다 싶은 생각이 들어 책장을 들고 오는 내내 한숨이 절로 났다.

그러다가 예전에 우연히 읽은 한 전기소설이 생각이 미쳤다. ‘경성 트로이카’라는 제목의 전기소설로 그 책은 일제 강점기에 활약했던 유명한 그야말로 민족민주혁명전사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주인공의 혁명 조직의 강령을 보면 전 국민의료보험제 수립이나 근로기준법 준수 및 국민연금제 실시 등과 같이 현재의 복지 분야에서 논의될 법한 내용들을 많이 수록되어 있던 것이다.그런 것을 보면 진보주의자라는 개념도 무언가 방향성을 가지긴 하지만 절대적 기착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 역사와 사회 속에서 좌표로서의 경향성을 지니는 개념인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언뜻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조금 찝찝한 생각을 떨쳐버리기 힘든 징후들이 곳곳에 보인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보수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이 실은 수구꼴통들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일종의 불편한 진실이다. 한데 그들이 보수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면 진보를 자처했던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이 차오르는 것이다. ‘혹시?’하는 의문이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리곤 팔에 소름이 쫙 돋는다. 무엇 때문인지 겁도 많은 주제에,전통주의적인 것을 매우 선호하는 분야도 많은 주제에, 보수란 말을 이리도 끔찍이도 싫어하게 되었더란 말이냐?

어쨌거나 색깔론 논쟁이 나오면서 내 관음증도 시들해졌다. 이것은 전적으로 사십대 여성이라는 개인적 특성에서 기인하는 바일지도 모르겠으나, 가장 이해하기 쉬운 야동을 예를 들어보면 남녀가 서로를 유혹해 옷을 벗기 딱 그전까지만 야동의 진정한 순간은 그 빛을 발한다고 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딱 그 때까지만 짜릿하고 흥분되지 정작 둘이 다 벗고 난 다음에는 하는 일도 몇 가지 안되고 볼 만한 것도 별것 없게 된다. 도저히 집중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이것저것으로 신경은 마구 분산된다. 왜냐면 화면 안에서는 단순 체육활동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동안 확실히 좀 답답한 면이 있어 이런 변화에라도 기대되는 바가 있었는데, 이렇게 색깔론으로 몰아가니 그냥 김이 팍 샌다. 새누리당은 뚱뚱하고 기름기 번들거리는 늙은 남자가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것 같고 그 앞에선 진보통합당은 피부도 거무튀튀하고 머릿결도 푸석푸석한데다 이도 좀 뻐드렁하고 화장도 별로인 못 생기고 촌스런 외국 여배우 같다. 거기다 민주통합당은 별 볼일 없고 맥 빠져 보이는 중년 남자가 보기 싫은 삼각 구도를 이루고 있는 포르노 한편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이런 포르노를 보고 있으면 ‘이것들이 사람을 뭘로 보고, 어디 와서…….’ 이런 소리가 절로 난다. 정말 오랜만에 맘 먹고 보는 건데, 심신을 다해 기를 모아서 보는 건데……. 하는 한탄이 절로 나온다. 그런 배우를 기용해 그런 뻔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는 그 감독이 오히려 감탄스러울 뿐이다. 그런데 지금 이 포르노의 감독과 같은 짓을 우리 국민 실은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내가 이런 한탄을 할 수밖에 ‘나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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