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향연

자기배려와 우정(2)

- 최진호

1. 타자배려와 자기배려

모든 우정은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 비록 그것이 이득으로부터 시작하기는 하지만……
(에피쿠로스, 「단장」ⅩⅩⅢ)

에피쿠로스는 항상 우정을 유용성과 관련시켜 이야기했다. ([자기배려와 우정(1)]). 푸코의 설명에 따르면 에피쿠로스는 친구가 존재함으로서 실제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도움에서 가질 수 있다는 확신과 신뢰, 즉 친구들이 우리가 그들에게 보내는 우정에 화답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 그 자체가 행복을 보장해주는 요소라고 파악했다. 친구들과 우정에 부여하는 신뢰 속에서 즐거움과 동요의 부재를 확보할 수 있다는 것. 이 경우 우정은 자기 자신이나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원칙임을 알 수 있다. 우정은 자기 배려를 위한 하나의 장치이다. 즉 우정이라는 장치를 통해 자기배려를 행한다. 타자배려가 곧 자기배려라는 사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역사적 사실 하나를 추가해보자. 에피쿠로스가 BC 307~306년 아테네에 정착한 다음 정원이자 학교를 열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정원에는 그의 제자부터 여성부터 노예, 창부등 각종의 인간군상들이 모여들었다. 삶의 현장이 배움의 장소로, 아니 배움의 장소가 삶의 현장이었다고 할까. 에피쿠로스는 유용하지도 않고 심지어 사회적 추문을 유발해 그 자신에게 손해를 끼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했다. 유용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들과 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 유용하지 않기에 애초 우정은 시작불가능할 터이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그들과 만났고 이 관계를 즐겼다. 그렇다면 이 우정을 찬미한 사상가는 그의 말과 달리 유용성에서 우정을 시작하지 않았던 것이었을까? 즉 에피쿠로스는 자기에게 어떤 이익도 없는 타자배려, 즉 자기배려 없는 타자배려의 실천자였던 것일까?

2. 원자론과 우정론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킨다는 목적을 이룰 수 있게 하는 모든 것은 자연적인 선이다.(「중요한 가르침」ⅩⅣ)

자신의 이웃들로부터 안전을 가장 잘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가장 확실한 안전의 보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웃들과 아주 즐겁게 산다. 그리고 완전한 친밀감을 누린 후에 친구가 먼저 세상을 떠나더라도 그 친구가 동정의 대상인 양 슬퍼하지 않는다.(「중요한 가르침」ⅩⅬ)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타자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지키는 것은 자연에 따르는 것이다. 안전은 아마도 타자와의 거리를 통해 확보할 수 있다. 이 거리가 지켜지는 한 우리는 온전히 자기를 배려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즉 우발적인 사건, 외부와의 예측불가능한 만남이 없다면 나의 의도대로 가장 순수한 안전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연의 원리상으로 변화는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전을 지킬 수 있으며, 이 안전을 잘 확보한 사람은 이웃들과 즐겁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 두려움과 같은 불쾌(不快)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 사물의 운행의 원리에 대한 앎이 필요하다. 이것이 에피쿠로스의 자연학이자 원자론이다. 그는 인간의 고통과 욕망의 한계 역시 자연학의 문제이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삶도 계속 변화한다. 원자들이 영원히 운동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삶의 변화는 정해진 법칙에 의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가령 원자론자 데모크리토스는 원자들의 직하 운동을 통해서 사물의 변화를 설명했다. 그러나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이럴 경우 실재의 현상, 즉 규정할 수 없는 사건이 넘쳐나는 실재를 설명할 수 없다. 원자들이 동일한 속도로 낙하하고 앞의 원자를 뒤의 원자가, 혹은 옆의 원자가 마주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는 다면 변화 없는 삶이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실재는 예측불가능한 사건의 연속이다. 이 사건은 운동은 원자들의 편위운동, 즉 클리나멘(clinamen)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클리나멘은 접선으로부터 이탈하는 곡선의 미분각이다. 원자가 직선으로 갑자기 벗어난다는 것!

원자들은 영원히 운동한다. 원자들 중 어떤 것은 아래로 곧장 떨어지고 어떤 것들은 비스듬히 떨어지고 다른 것들은 충돌해서 위로 튕긴다. 그리고 튕겨나간 것들 중 어떤 것들은 서로 멀리 떨어지게 되는 반면, 어떤 것들은 다른 원자들과 엉키거나 주위를 둘러싼 원자들에 갇혀서, 한곳에 정지해서 진동한다.(「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56~57)

원자들이 비스듬히 떨어지기에 다른 것들과 충돌은 불가피하다. 이 원자들의 단단하기에 다른 것에 충돌한다고 하더라도 부서지지 않고 다른 원자들에 의해 멈출 때까지 운동한다. 물론 이 원자가 멈추어 설 때, 다른 원자는 편위운동을 시작하기 마련이다. 원자들의 무한 충돌이 일어난다. 말하자면 우리의 삶은 우발적인 사건에 노출되어 있으며,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곳에서 뜻밖의 마주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이 감각의 차원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은 원자들의 복합체임에 유의하자. 왜냐하면 원자는 감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우리는 원자가 감각 대상들보다 훨씬 작다고 설정했다”). 차라리 원자는 사유되어야 할 대상이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물체들을 사고에 의해 관조할 때 한계점은 일차적 단위로서 원자들의 크기-원자가 크건 작건 상관없이-를 측정해준다). 분리될 수 있는 것들이 감각적 최소치로 구성되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분리 불가능한 원자는 사고의 최소 구성치라는 것. 따라서 에피쿠로스가 제자인 퓌토클레스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우주는 물체들 somata과 감각되지 않는 것 anaphes physis(허공)으로 구성된다. 또는 구성요소들stoicheia은 더 이상 나누어지지 않는다.” 맑스는 somata와 anaphes physisf를 ‘신체적인 것(körperlich)과 ’비신체적인 것(leeren)‘으로 구분한 다음, 신체적인 것은 다시 복합체와 분할불가능한 요소로 나누어 이해한다. 이 경우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사실상 원자들의 복합체임을 알 수 있다.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을 확대할 때 우정 혹은 연대의 필연성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어떤 관계 안에 놓여 있으며, 이 관계 안에서만 사유의 대상이 된다. 그 자체로 혼자 존재하는 개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복합체, 공동체를 관통해야만 개체의 특성이 드러날 수 있다.

그런데 에피쿠로스의 원자들은 무한하게 결합하지 않는다. 또 원자들의 모양도 하나가 아니다. 그래서 상관없는 원자가 상관없는 원자와 만날 수 없다. 가령 물이 얼음이 되는 것은 원자 자체의 성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얼음은, 둥근 입자의 물이 밀려나가고 이미 물 안에 있던 삼각형의 입자들이 함께 모여서, 만들어진다. 또는 밖으로부터 들어온 삼각형 모양의 물 입자가 함께 모여서 둥근 물 입자를 몰아내고 물을 응고시킬 수도 있다.” 이 말을 확장하면 복합체는 동일한 입자들의 집합체이거나 다른 입자들 무리들로 이루어진 집합체이다. 물론 두 경우 모두 다른 입자들의 충돌은 불가피하다.
에피쿠로스 정원 역시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는 에피쿠로스가 시대나 신분의 한계를 뛰어넘어 모든 이들을 동일하게 파악했다고 보는 것. 따라서 그의 정원에 모인 사람들은 동일한 사람들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동일성이 영속화되기는 어렵다. 매번 규정할 수 없는 원자들이 복합체로 들어온다. 그리고 복합체의 조성은 바뀐다. 같은 형태의 원자가 충돌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충돌 이전에 원자들이 맺고 있던 결합이 새로운 물리력의 유입과 함께 새롭게 재규정된다. 고로 동일성을 유지할 복합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 오히려 에피쿠로스는 동일화나 절대적 무차별성, 공동체 유지에 관심을 가지는 대신 자신의 정원에 자신의 공동체를 해체할 다른 이들을 받아들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원자들의 충돌이 필연이라고 할 때, 자성(自性)을 가진 복합체에 다른 원자들의 유입은 복합체의 해체를 촉진한다. 이런 의미에서 에피쿠로스의 정원에 모인 친구들은 복합체의 해체를 내장한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과의 관계 맺은 항상 해체적 관계 맺음일 수밖에 없다. 이 해체적 관계 맺음을 에피쿠로스는 우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개체의 안전은 자연과 사태에 대한 사려깊은(phronimos) 앎을 통해 확보된다. 복합체 해체의 필연을 수용하는 것이 규정할 수 없는 사태 속에서 안전을 확보하는 첫 번째 원리인 것이다. 복합체의 해체를 내장한 우정, 그리고 공동체를 해체하는 우정. 더 나가 이 우정을 통해 복합체의 해체를 필연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왜냐하면 복합체의 해체 역시 ‘특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해된 것은 감각이 없기 때문이고, 감각이 없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해체될 수밖에 없음, 이 우정의 도래 앞에 해체에 대한 두려움을 사라지고 해체를 받아들이게 된다. 말하자면 타자배려를 통해 자기해체를 배운다. 자기해체는 자연과 삶의 원리이다. 따라서 자기해체는 자기배려이다.

일생 동안 축복을 만들기 위해서 지혜가 필요로 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우정의 소유이다. (「중요한 가르침」ⅩⅩⅦ)

영원히 혹은 오랫동안 지속되는 무서움이란 없다고 용기를 준 판단은 제한된 조건 하에서는 우정을 통해 안전이 가장 잘 확보됨을 깨닫는다.(「중요한 가르침」ⅩⅩⅧ)

3. 불쾌와 자기배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정에 대한 회의는 계속 남을 수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우정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이 오해는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에피쿠로스의 관점에 의하면 헛된 생각은 충족되지 않고 고통을 가져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집착하는 생각이다. “자연의 정의는,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지 않고 해침에 당하지 않도록 지켜주려는 상호 이득의 협정이다.(「중요한 가르침」, ⅩⅩⅪ)” 관계의 해체는 사람들을 해치지도 않고 해침을 당하도록 하지 않는다. 그러나 계속 왜곡된 이미지는 만들어진다. 에피쿠로스는 이 문제를 자연학적 관점을 통해 해명한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이미지는 외부 대상이 아니라 외부 대상보다 조금 얇은 막이다. 이 영상들은 허공을 지나 놀라운 속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영상은 자신과 맞는 허공의 길을 쉽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상과 충돌하는 것이 있는가? 있다. “영상과 충돌해서 운동을 방해할 것이 아예 없거나 매우 적다.” 영상은 얇은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영상이 생각만큼 빨리 만들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외부 대상의 표면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원자가 흘러나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원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 때문에, 외부 대상의 크기가 감소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외부 대상으로 원자가 흘러나가는 만큼, 다른 원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런데 복합체가 외부 대상에게 원자를 내보낸다면 계속 원자들이 그 표면을 다시 메우고 있는 것이 아닐까? 복합체 안에서 원자들이 끊임없이 충돌하고 움직인다. 따라서 에피쿠로스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영상의 포착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지만 영상의 포착과 동일하지 않은 어떤 운동이 우리 안에서 산출되지 않는다면 오류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의견이 확증되지 않거나 반증되었을 경우, 오류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원리를 마음속에 명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감각이라는 분명한 증거에 기초한 판단 기준을 잃게 될 것이며 오류를 참이라고 고집함으로써 모든 것을 혼란에 빠트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헤로도토스에게 보내는 편지」62)

즉 영상은 왜곡된다. 우정에 대한 이미지의 왜곡 역시 복합체 혹은 개체 안에서 산출된 운동이며 필연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므로 허공을 지나 다가오는 찰나의 순간에 그 사물을 왜곡해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왜곡이 필연이라고 할 때, 왜곡 이전의 다른 느낌이 먼저 있다. 이 다른 느낌을 불쾌로 향할 때 왜곡이 발생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 왜곡된 느낌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에피쿠로스에게 “모든 선을 구별하는 기준”이 느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좋든 싫든 느낌의 존재를 통해서만 자기만족(autarkeia)로 돌아갈 수 있다. 즉 불쾌는 내부메커니즘을 점검하는 장치이다. 결국 타자의 도래, 우정의 출현은 우리 자신을 계속 점검하게 만든다.

4. 우정을 위한 모험

우정에 너무 적극적인 사람과 너무 머뭇거리는 사람은 모두 옳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우정을 위해서 모험을 해야 한다.(「단장」ⅩⅩⅧ)

우정은 규정불가능한 것과의 만남이기에 우리의 의지대로 구성되지 않는다. 우리의 의지대로 우정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도, 그렇다고 관계 맺기를 주저하는 것도 모두 맹목이다. 전자는 자기를 과신한다는 점에서, 후자는 자기의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점에서 타자배려가 생략되어 있다. 차라리 우정은 적극성과 주저함 사이의 모험이며 낯선 것과 마주침에서 오는 어떤 설레임일 것이다. 이 설레임은 타자와의 만남이며 자신에게서 타자를 산출하는 것이기도 하다. 해서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고결한 사람은 무엇보다도 현명함과 우정에 신경을 쓴다. 이들 중 전자는 사멸하는 선이고 후자는 불멸하는 선이다. (「단장」ⅬⅩⅩ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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