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허영에 빠지지 않으려면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애덤 스미스는 평정심(tranquility) 즉 고요한 마음을 잃어버리는 이유가 ‘허영'(vanity) 때문이래. 남의 눈이 없는 무인도에서 산다면, 몸을 가릴 옷, 비를 막아줄 집, 그리고 건강을 유지할 만한 음식만으로도 우리는 평온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해질 수 있대. 하지만 우리는 많은 눈을 의식하면서 남들에게 칭찬이나 감탄, 존경을 얻고 싶어서 필요 이상으로 부나 권력, 지위를 추구하고 있대. 그러나 이 사회적인 재화를 혼자만 독점할 수는 없지. 그래서 언제나 자기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나를 불만스럽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어. 허영 때문에 잔잔하고 고요했던 마음이 일렁거리면서 불행해지지.

허영은 마치 숫컷 공작이 깃털을 펼쳐 그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하듯이 남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자기의 부나 권력이나 지위를 부풀려 보여주는 거야. 허영은 매슬로우가 말한 네 번째 욕구 단계인 자존감을 만족시키려고 가진 것들을 부풀려서 남들에게 잘 보이려고 애쓰는 거야. 허영은 자기의 소유물을 과시하여 자기의 능력을 실제 이상으로 증명하고 싶어서 생기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허영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남들이 그의 능력을 알아주면 행복하고 알아주지 않으면 불행한 사람들이야. 그들의 행복의 기준은 자기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의 평가에 달려있어. 허영에 빠져서 자존심이 잔뜩 부풀어 있는 사람들은 진선미에 대한 경험의 가능성을 실현하여 자기를 완성하는데서 오는 한층 더 높은 그리고 마지막 단계의 만족감과 행복을 아직은 모르는 사람들일 거야.

그렇다면 홍아야, 어찌해야 우리가 허영에 빠지지 않겠니. 홍아야, 우리는 아예 남들이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자. 남들의 관심을 끌어 잘 보이려고 우리를 부풀릴 필요가 없단다. 남들에게 칭찬을 듣거나 험담을 듣거나 정말로 그게 무의미하기 때문이야. 남들이 좋아하거나 싫어하거나 그건 다 자기들이 만든 우리의 이미지들이야. 남들이 아는 우리의 겉모습을 가지고 제멋대로 그려낸 것이지. 어떻게 우리를 속속들이 다 알고 좋아하거나 싫어할 수 있겠어.

게다가 남들이나 청중들은 원래 입맛이 아주 변덕스러워.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겉모습을 가지고 그들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 즐기다가 그 이미지와 다른 속 모습이 조금씩 들어나면 실망하게 마련이니까. 우리는 변덕스러운 남들이나 청중들이 알아준다고 행복해 하거나 알아주지 않는다고 불행해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단다. 이 변덕쟁이들이 알아준다고 우쭐하게 되면 그들과 우리가 공모하여 부풀린 우리의 이미지가 꺼질 때 그들이 먼저 실망하고 우리도 그들에게 환멸을 느낄 거야. 남들에게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으려면 아예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아야 돼.

공자님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아야 군자(인격자)라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단다. 우리가 남에게 조그만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면 그럴 수 있는 나를 내가 알아주는 자부심은 가지는 것으로 만족해야 돼. 남들에게 칭찬받으려고 도움 준 것은 아니었잖아.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고 하고 있는 나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부심을 가지려고 도움을 준 거야. 긍정적인 자신감을 자부심이라고 한다면 부정적인 자신감을 자만심이라고 하지. 우리는 부풀렸거나 빗나간 자만심을 다 버리고 자부심만 가지자. 아니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홍아야, 그렇지? 우리는 내가 나를 알아주니까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결코 외롭지 않아. 그렇지?

하버지는 진정한 영광은 다 하느님의 것이니 내가 훔쳐갖지 않겠다는 결심을 지키며 살았단다. 예외가 있다면 자식들에게 내가 사랑했다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란 것뿐이란다. 그래도 자식들에게 공치사 받으려고 떠벌리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단다. 우리는 남들을 대할 때 더 잘 보여서 칭찬이나 감탄이나 존경을 받을 생각은 아예 말자. 그 대신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도록 무엇을 어떻게 도울까만 생각하자. 그리고 그러한 나를 내가 알아주자.

5-2)걱정 물리치기
홍아야, 하버지가 엄마와 삼촌에게 들려주었던 걱정을 내던지는 방법 너도 들어볼래.

첫째로 아직 오지 않은 일이 잘못될까봐 앞당겨 걱정하지 말랬단다. 미래에 입시나 취업이나 연애 결혼 등 아주 중대한 어떤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하고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자고 그랬어. 그 일이 잘 풀리도록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손 놓고 걱정만 하고 앉아있는 사람을 얼마나 어리석다고 해야 하겠니.

걱정이 필요한 단 한 가지 이유는 지금 이 순간 하고 있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야. 그러니까 그 미래 일을 위해 지금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면 쓸데없는 걱정이니 말자는 거야. 이 평범한 지혜를 익혔다면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만 걱정할 뿐이야.

홍아야, 하버지가 고 3 시절에 대학 입시에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돼서 공부가 제대로 안 되던 하버지의 어리석음이 생각난다. 그렇게 걱정하다가 그 순간이 닥치니까 더욱 떨려서 시험을 망친 어리석음을 하버지는 평생 잊지 못한단다. 그런데 네 엄마는 수능에서 평소의 어떤 모의고사 성적보다 훨씬 더 좋은 성적이 나왔어. 시험 볼 때 그냥 덤덤했대. 같은 나이라면 엄마가 마음을 다스려 성숙한 정도가 하버지보다 훨씬 나았었구나. 홍아야, 너도 엄마 닮아서 큰 일이 닥쳐도 떨리거나 흔들리지 않겠지?

둘째로 이미 지나간 일의 괴로움을 다시 꺼내어 쓰디쓴 맛을 보려고 되씹지 말자고 했단다. 특히 지나간 그 일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다면 그 일로 나를 자책하거나 남을 원망하지 말자고도 했단다. 이미 최악의 상황은 지났는데도 그 사건의 괴로움을 되씹다가 그 일로 받은 정신적인 충격이나 상처가 점점 커지는 경우가 있단다.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쩌나 하고 상상할 때마다 불안해지고 두려워지고 미워지는 부정적인 경험들이 크게 굳어졌으리라.

그렇다면 걱정하는 쪽으로만 작동되는 우리의 경험체계를 해체하고 긍정적인 것으로 재구성할 한 번의 커다란 계기가 필요하리라. 그러려면 아무리 어린 시절의 경험이라도 걱정을 만들어내는 그 사건을 떠올려야 돼.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편안해지기 위해서 그 사건의 관련자를 용서를 해야 돼. 보복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그도 행복하기를 바라야 돼. 행복하기까지는 바라지는 못할망정 불행하기를 바라서는 안 돼. 그건 아직도 우리가 용서의 반대 감정인 원망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니까.

또 하나, 그 사건과 관련자를 반면교사로 삼고 그 사건의 부정적인 측면을 뒤집어서 긍정적인 가치나 의미를 찾아내야 돼. 그래야 그 사건이 떠오를 때마다 긍정적인 가치나 의미를 되새길 수 있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사건에서 생기는 부정적인 감정들과 특히 그 사건의 관련자에 대한 미움이나 원한에서 해방될 수 있어. 그리고 이렇게 걱정거리인 매듭을 하나씩 풀어갈 때마다 우리는 지혜로와져서 지혜로운 만큼 행복해질 수 있어. 우리의 홍아도 슬기로우니까 행복해질 수 있지?

셋째 지금 여기에 들이닥친 걱정거리의 해결책이 있다면 있으니까 걱정할 것 없고 없다면 없으니까 걱정할 것이 없다고 일렀단다. 해결방법이 있다면 해결방법을 찾고 해결과정을 계획할 때 한번만 단 한번만 크게 걱정하자. 그 이후에는 일정에 따라 그날 또는 그 순간에 해야 될 일을 잘 할 내는 것만 걱정하자. 할 수만 있으면 걱정을 자디잘게 쪼개어 적게 만들자는 거야.

아무리 머리를 쥐어 짜내도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는 일이라면 버둥거려봐야 소용없으니 괴롭게 걱정하는 헛수고까지 할 필요가 없단다. 이를테면 불치의 암같이 해결 방법이 없다면 걱정거리의 최악의 결과가 어떤 것일지 추리·상상해보고 그것까지를 담담하게 받아들이자.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를 미리 받아들이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한지 아니?

최선을 다했지만 최악의 결과가 목숨을 내놓는 것이라면 목숨 그까짓 꺼 휙 던져버리자. 까지 꺼 죽기 밖에 더하겠니. 갈 길이 이미 정해져 있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는데 결심까지 할 필요가 없어. 지금 이 순간 덤덤하게 미리 던져버리자. 그리고 나는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한 순간이라도 편안히 쉬면서 새로운 여행을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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