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칼럼

이 길이 맞는 걸까? : Savior siblings

- 남창훈(면역학자)

JOHN D MCHUGH / 2006 AFP

JOHN D MCHUGH / 2006 AFP

4년 전 BBC에 뜬 기사 하나가 눈에 들어 왔다. 영국 국회에서 두 가지 주제와 관련된 투표를 했다는 소식이다. 그 하나가 인수(Human-Animal) 혼성 배아의 허용과 관련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형제 구조자 (Savior siblings)와 관련된 시술을 금지하려는 개정 법안을 기각하는 투표였다. 인수 혼성 배아에 대한 논의는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할 생각이다. 기사를 보며 생각에 잠겼던 주제는 형제 구조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요지는 간단하다. 예를 들어 골수암에 걸렸거나 선천적 기형 등으로 특정 장기의 비가역적 손상이 진행된 형제를 위해서 부모가 그 자녀의 치료를 보조할 목적으로 새로운 자녀를 갖고자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경우 기존 자녀와 새로 잉태할 자녀 사이에 HLA (Human Leukocyte Antigen) 일치 여부가 핵심적인 문제가 된다. 이것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경우 이식과 같은 시술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술을 위해서 새 자녀를 갖고자 할 때는 반드시 IVF (In Vitro Fertilization) 즉 시험관 수정을 통해 자녀를 잉태해야 한다. 시험관 내에서 수정이 이뤄진 배아 중 그 배아의 HLA가 아픈 형제의 그것과 일치하는 배아를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도에 대해 영국 보수당과 생명 관련 시민단체에서 이를 금지시키는 개정 법안을 상정했다가 결국 영국 국회에서 기각된 것이 사건의 요지이다.

이 주제를 두고 생각하다 세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1. 맞춤형 배아 즉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가지고 수정된 배아 중 어떤 특정 배아를 고르는 행위가 타당한가?
2. 하나의 어떤 전인격체를 치료를 목적으로 잉태하는 것은 타당한가?
3. 신체에 대한 자결권을 부모나 타인이 배타적으로 독점하는 것이 타당한가? 새로 태어난 자녀의 자결권은 어디까지 보호받을 수 있는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이 의결에 참가하여 기각에 찬성하는 표를 던진 사람들의 주장은 간결하다. “현재의 의료 기술 수준에 비춰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데 윤리적인 이유만으로 그 가능성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골수 이식이나 다양한 이식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현실에 비춰볼 때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신체 적합성을 갖춘 공여자가 없어 죽을 수밖에 없는 자녀를 둔 부모의 입장에서 허용 가능한 다른 자녀의 희생을 통해 치료를 할 수 있다면 그런 주장을 할 수도 있겠구나 생각된다. 하지만 앞서 던진 세 가지 질문에 대해 그 누구도 쉽사리 ‘타당하다’고 답을 할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나는 이러한 딜레마의 배후에 한 가지 철학적 문제가 숨겨져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생명을 도구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발달한 현대 의료 기술과 세포 생물학, 분자 생물학, 발생학 그리고 면역학의 수준이 바로 이러한 질문이 가능하도록 하는 현실적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 우리의 일상 곳곳에 이 물음은 똬리를 틀고 있다. 이것은 머릿속 상상이나 공상 과학 영화에서나 떠돌던 질문들이 이제 우리의 침대 맡이나 탁자 앞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대상의 극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아주 상징적인 사건이 영국의 국회의사당에서 있었던 것이다.

생명을 도구로 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낄거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는 다분히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이미 이전 세기 말미부터 Biotechnology (BT)는 이 질문에 대해 그렇다는 답변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잘 알고 많이 들어 본 GMO (Genetically Modified Organism)가 대표적인 예이다. 우리는 생체를 유전자 수준에서 다양하게 변형시키고 그 결과 여러 유익을 얻고자 애를 쓰고 있다. 대장균, 효모, 쥐, 토끼, 돼지, 젖소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많은 종류의 생체들이 이러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어지고 있다. 생명의 활용 (The use of Life)이 광범위하게 이뤄지고 있는 시대 한 복판에 우리가 서 있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생체가 여기서 예외가 될 수 없다는 주장이 얼마 전부터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휴먼 게놈 프로젝트를 가장 먼저 마친 그래그 벤터가 시도한 인간 게놈 유전자 특허라 할 수 있다. 생체의 유전자에 대한 특허는 1980년 미국에서 최초의 인가를 받은 이후 아주 광범위하게 출원되고 인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그 벤터는 이 흐름의 정점에서 인체 정보에 대한 일종의 소유권 등기를 요구했었던 것이다. 그 까닭은 간단하다. 그 정보를 활용하여 생체를 통한 이윤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황우석이 한국 사회에서 한 대 각광을 받았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생명공학을 통해 어마어마한 규모의 국부를 창출할 수 있다는 논리의 이면에는 ‘생명을 이윤 창출의 도구로 본다’라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있었다. 우리 중 다수는 이 전제에 동의를 했었던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살면서 “생명을 도구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지니거나, 답을 회피한다면 그것은 그가 우리 시대를 크게 오해하고 있거나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일 따름이다.

조금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무엇이 현실인지 하는 것을 말할 때는 주관적 판단보다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해야만 한다. 인지했건 그렇지 못했건 간에 우리는 지금 생명을 도구로 보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관점에 대한 치열한 성찰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는 점이다. 나는 무엇이 옳다는 식으로 이 문제를 접근하는 것을 피하고자 한다. 나는 솔직히 “생명을 도구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깊은 의혹과 우려가 깃든 답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단지 의혹과 우려에 생각이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부족하고 무기력할 따름이다. 우리는 이미 생명을 도구로 보는 시대 한복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생명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때다. 급격한 진보가 이뤄지고 있다고 낙관과 부푼 기대에 빠져 있다면 그것은 현실을 너무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너무나 순진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진보의 이면에 우리는 급격히 늘어만 가는 질문들이 도사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질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던져졌지만 매번 쉽게 잊혀져 왔다. 이제 그 질문들을 하나 둘씩 꺼내 들고 답을 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질문도 그 중 아주 좋은 한 예가 될 것이다. 영국 국회의원 180명 중 118명이 형제 구조자 관련 법안 개정에 반대를 표명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같은 경우에 어떤 견해를 표명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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