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뒤, 남은 사람들

1919년, 혁명을 꿈꾸던 청년들 ― 메이지대생 양주흡의 2․8과 3․1 (2)

- 권보드래

독하게 마음먹었다 흐지부지하고, 엉겁결에 말려들었다 싶었는데 인생이 달라지고― 사건과의 만남은 예측불허다. 3․1 운동도 그랬을 것으로 짐작된다. 7천이 넘는 사망자와 4만이 넘는 검거자 대부분은 준비 없이 이 사건과 마주친 경우였을 것이다. 10년 동안 쌓아온 불만, 평생을 눌러 온 울울한 사연이 있었겠지만 1919년 3월 1일이 닥치기 전 이 날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귀띔 받은 사람은 드물었다. 서울 시내 학생들과 몇몇 지방 기독교인들 정도가 계획을 숙지하고 있었는데, 그나마 “소리를 지르면 수업 중이라도 나오라.”는 전언 정도만 들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서울에서 3월 1일과 3월 5일이 지나고 『매일신보』가 이 사실을 다루기 시작한 후, 그리고 국상 때문에 상경했던 사람들이 전국 각지에 시위 소식을 퍼뜨리기 시작한 후론 ‘사건’을 기다리기 시작한 사람이 훨씬 많아졌겠지만, 역시 대부분은 원인과 경과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채 운동에 참여했다.

도쿄에서 2․8 독립선언 준비 과정을 목격하고 왔던 양주흡은 그러니까 드물게 사정에 소상했던 축이다. 그는 “한 손에는 칼을 들고 한 손에는 총을 들고서, 전진하여 우리 민족과 강토를 구제”하고 더불어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세계의 영구적 평화를 보지”해야 할 때임을 믿었다. 고민 끝에 귀향했다 서울을 향한 것도 봉기를 조직할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처음 계획에 접한 지 두 달 가깝도록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날카로움은 둔해지고 망설임은 깊어졌다. 마치 「만세전」의 주인공이 그러했듯 목적지가 아니라 여정이 더 중요해진 형국이었다. 게다가 여정은 점점 늘어났다. 부산에서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까지 올 때는 1주일 남짓이 걸렸지만, 고향에서 출발해 서울에 이르기까지는 근 2주가 걸렸다. 임박한 ‘혁명’을 점점 부담스럽게 여긴 까닭인지, 양주흡의 행보는 시위 현장에서도 살짝, 그러나 계속 어긋난다. 3월 1일 시위대가 지나간 후 서울역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4일엔 날짜를 잘못 맞췄고, 5일의 학생 시위 때는 이미 해산한 후에야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양주흡은 후일 체포된 후 점점 자신이 없어졌었다고 진술한다. 일본을 출발할 때만 해도 대중을 선동할 계획이었으나 막상 조선에 온 후에는 “내가 자진하여 소동을 부릴 용기를 잃고 타인이 소동을 일으키는 것을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3월 초까지는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검거 선풍에 둔감했던 것은 아니다. 시위가 지방 곳곳으로 번져 가는 사이 서울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잠잠해진 가운데 검속은 오히려 본격화되고 있었다. 일본서 돌아온 유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검속 대상이 될 수 있었다. 3월 10일 양주흡은 특별순사의 검속을 피해 여관을 나선다. 이후에도 오랫동안 잠잠했던 양주흡의 일기가 운동의 계절다운 전환을 보이는 것은 하순에 이르러서다. 양주흡은 3월 24일에는 안국동 전신주에 태극기를 그려 붙였다. 25일에는 밤 11시쯤 시내에서 만세를 불렀다. 등교 거부와 상점 철시가 계속되고 있었지만 서울 내 시위 자체는 소강 국면에 접어들었던 당시, 밤에 10여 명이 모여 만세 부른 후 해산했다는 기사가 간간이 보이는데, 아마 그런 대열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역설적으로 양주흡은 북청을 떠나 서울로 옴으로써 시위를 피할 수 있었던 셈이다. 3월 8일 2백 50여 명의 천도교도 및 학생들이 읍내에서 시위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3월 중순에는 북청군 전역에서 만세 운동이 잇따랐다. 충돌이 격렬하지는 않았으나 신창면에서는 2백여 군중이 헌병분견소로 몰려갔고, 한동안 잠잠하다 5월에는 평산면․가회면 사무소에 불을 지르는 사건이 있었다. 서울에서의 시위가 3월 5일 이후 수그러들었던 반면 지방에서는 3월 중순 이후 5월까지에 걸쳐 시위가 본격화되었던 것이다. 진압과 검거의 양상도 지방에서 훨씬 가혹했던 것으로 보인다. 3․1 운동 기간에 있었던 7천여 명의 희생은 모두 지방에서 생긴 일이었다. 서울에서도 어떤 여학생이 칼에 찔리는 광경을 봤다는 둥 예배당에 조선인들을 모아놓고 십자가에 매달았다는 둥 하는 소문이 있었지만, 소문을 확증할 만한 증거는 지금껏 공식화된 바 없다. 도쿄에서, 서울에서 학생들이 시작한 시위가 지금 기억하는 ‘3․1 운동’이 된 것은 지방에서의 양상을 통해서였다. 귀향한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한 사례가 없지 않았으나 대부분 지역에서의 시위는 현저히 자생적이었다.

그런 만큼 일부 지식 청년들이 꿈꾸었던 ‘혁명’이란 몽상에 가까운 것이었다고 해야겠다. 계급 문제에의 관심이나 약소민족 사이 연대를 위한 노력이 1910년대 중반부터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일각에서의 사정이었을 뿐, 막상 대중 봉기가 시작되었을 때 적절히 대처할 만한 주체는 형성되지 않았다. 양주흡은 3월 말 이후 길거리 검문이 삼엄해지고 “일본인 건달들이 한복을 입고서” 행인들을 구타하는 경색 국면을 목격하고는 중국행을 다시 꿈꾸기 시작한다. 집에 여비를 청구하고 기다리는 중 대전에선 2백여 명 군중이 학살되었다는 소식이, 수원에선 방화 학살 소식이 들려온다. 『독립신문』류 유인물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 조직 소식도 전해 온다. 중국을 향해 떠나고픈 마음이 더욱 들끓지만 집에선 회답이 없다. 양주흡은 “어느 곳도 착수할 곳이 없다(…) 이렇다면 차라리 죽는 것이 좋겠다”고 일기에 썼다. 막상 ‘혁명’의 현장에 맞닥뜨렸을 때 무력했으면서도 ‘혁명’이라는 추상에 대한 꿈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럴 수 있는 시절이었다. 보다 구체적인 결정과 투신이 요구됐던 것은 3․1 운동이 지나간 후다. 이즈음 양주흡은 뒤늦게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지만, 복역 후에는 일본으로 돌아가는 길을 택한다. 메이지대 법대를 졸업한 것이 1922년 4월, 이후 양주흡의 행적은 쉬이 보이지 않는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