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강만필

농사 일지 세 번째. 지금 우백당은…

- 김융희

요즘 농사꾼들, 마음 고생이 심합니다. 오랜 가믐으로 전답이 매말라 작물들이 타들어 갑니다. 작물을 관리하는 농사꾼의 지켜보는 마음도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비를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은 작물의 고통과 조금도 다를 봐 없습니다. 그 애타는 마음을 도시인들은 얼마나 이해할까 싶기도 합니다. 전철의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 시민들, 대중 목욕탕에서 펑펑 쏟아지는 물을 아낌없이 쓰고 있는 도시인들을 보면서, 슬쩍 마음이 상하기도 합니다.

강물도 말랐습니다. 장포의 마른 흙을 만져보니 푸석한 먼지가 되어 바람에 날립니다. 아직은 먹는 물을 공급하는 샘물이 마르질 않아 작물과 나눠먹고 있지만, 갈수록 샘물이 줄어 공급이 딸립니다. 부족한 수분을 위한 작물들의 적응과 대처도 다양합니다. 평소의 여유를 즐기는 작물의 대처가 더 힘들어 보입니다. 특히 물을 좋와하는 오이의 고통이 심해 마른 잎이 자주 눈에 띕니다. 물로 인한 치열한 생존경쟁 앞에 의연한 잡초들이 얄미워 보입니다. 우리들도 풍요로움 보담 약간의 부족함이 탄탄한 삶에 도움이 되리란 생각을 합니다.

시들한 작물에, 무성한 잡초들. 자연과 함께하며 작물을 가꾸는 농사꾼은 그들에게서 생명의 진리와 삶의 진실을 보고 느끼게 됩니다. 가을에 무우, 배추를 심기위해 비워둔 땅에 무성한 잡초들, 저들은 왜, 어떻게 가믐도 잘 타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빈 땅이 모두 잡초가 무성한 것이 아닌, 듬성 듬성입니다. 이유가 궁금해 자세히 살폈더니, 빈 곳에는 시들은 잡초가 띄엄 띄엄 있었으며, 무성한 잡초는 무리져 함께 뒤엉켜 있습니다. 아, 그랬구나 싶어 수긍이 갑니다. 홀로 버틴 잡초는 결국 시들어 말랐습니다.

홀로 외롭게 버틴 잡초는 자기의 한 몸을 버틸 수분을 지키는 것이 버겁고 불가능했지만, 무리져 같이 자라고 있는 잡초들은 공동으로 함께 수분을 지키며 적은 것을 나누며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함께 나누며 공동 대처의 현명한 지혜를 발휘하고 있는 잡초들이 기특하게 느껴집니다. 한정된 수량을 여럿이 나누면 더 많은 수분의 량이 필요하게 되어 훨씬 불리하려니 생각했던 것은 평소 나의 이기적 발상인 것이었습니다. 나누면 줄어들고 함께 살면 불리하리란 내 이기적 속내가 하찮은 잡초만큼도 못했었다는 생각에 나는 부끄럽습니다.

이것도 나의 어리석은 짖일련지요? 우리 집엔 산뽕이 여러 그루 있습니다. 일부러 심지 않지만, 스스로 부근에서 자꾸 번지는 것입니다. 봄이면 부드러운 뽕잎도 딸 수 있으며, 지금은 오디가 열려 가지마다 새까맣습니다. 지금 오디를 따러 많은 도시 사람들이 모여 들며, 산에는 벌써 떨어지고 없더라는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집 오디는 따지 않는 체, 모두 그냥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다래등 산나물들은 물론, 나물과 차로 이용되는 뽕잎도 따지 않아 그데롭니다. 가믐에 열심히 물을 주면서 애써 작물을 기르면서, 좋은 먹거리들을 이처럼 모두 방치하고 있는 내가 많이 어리석지요?

그런데 그 어리석음이 어쩐지 나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오히려 나는 안타까워 한심입니다. 계절마다 주위의 많은 분들에게 권했습니다. 봄철이면 산나물을 소개했고, 쑥이며, 민들레, 고들빼기를, 요즘같음 오디를 비롯한 비름도 알렸습니다. 우리 집엔 밤나무도 몇 그루 있어 밤을 줍기도 합니다. 지금 밤꽃이 피고 있습니다. 가을이면 기른 작물들, 무배추로 김장을 권했습니다. 뽕잎차는 물론 쑥, 칡과 같은 야생차를 함께 만드는 재미는 물론, 손수 만든 차를 온 가족이 두고 즐기면 건강에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에 별로 호응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바쁜 일상에 짬이 나질 않는 것입니다. 정말 요즘 사람들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나와 우리 가족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산나물을 지키며, 밤을 아무나 줍지 말라고 합니다. 민들레씨는 바람을 타고 4km를 상승하며 100km를 넘게 나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우리 집에서 자란 민들레가 남의 집 꽃씨일 수도 있는데, 나는 우리 집 민들레를 아무도 못 케게 합니다. 심지어 쑥도 못 뜯게 합니다. 물론 나는 버려두고 그냥 지나치면서 말입니다. 때로는 지키며 말리면서 약간의 시비도 경험했습니다.

이처럼 우리 집 먹거리를 알리고 초대하면 모두들 부담감을 갖고, 거절도 합니다. 대개가 그렇습니다. 또 여러분들께서 바쁜 일상을 살고 있는 것을 나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알면서도 그리 생각하며, 나의 바보같은 짖을 계속 반복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모두 나에게 있습니다. 알면서 지키지 못한 짖은 나를 내가 화나게 합니다. 그러면서 계속 반복된 체로 우리 집 “우백당”은 있습니다. 이같은 바보 짖을 진즉부터 기회만 있으면 알리며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바보 짖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백당”의 당주로써 나는 우백당을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바쁜 삶을 충분히 앎며 이해합니다. 또 정중한 초대도 귀찮해 함을 잘 앎니다. 그러기에 조금치도 무리하게 권하진 않습니다. 소식을 전하고 알리는 것일 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닙니다. ‘Do or not do’의 선택은 여러분의 자의입니다. 물론 영업적 저의는 전혀입니다. 그렇기에 이처럼 뻔뻔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의 저의를 자꾸 의심하는 이들이 있어 나를 비참하게 합니다. 분명 내 편에 서서 나를 위한 행위는 맞습니다. 그리고 맘몬의 시대에 대가없는 제공은 잘 못된 일이요 어리석은 짖임을 나는 앎니다.

내 짖이 모두 이런 범위 안에 있음도 고백합니다. 내가 알고 고백하면서 그럼에도 불굴(不屈)함은 나의 셈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이익을 챙긴다, 그런데 그 자기 이익을 챙긴 것중에는 남의 이익 챙김에 도움을 주는 것도 있다. 그것을 상생의 길이라며, 이는 사회생활에 필요한 좋은 일로 여기더라”는 생각입니다. 언젠가 했던 말입니다만, 내가 함께 했던 매월 있는 등산팀에게 우리 집쪽을 권했다가 묵살당한 경험은 나를 서글프게 합니다. 집 주위에 괜찮은 등산 코스도 있고, 마침 나눌 작물도 있었는데. 그래서 였던,,,

어떤 부담? 신세질 것 없다! 뭐 이런 사소하고 치졸기도 느껴지는 그런 것들에 대한 나의 반발심이나 무모한 호기부림도 없지 않습니다. 농사 일지가 지나친 비약을 했습니다. 또 그 사소한 비약이 지루합니다. 어떻든 금년에는 명차의 달인을 모시고 여러 가까운 이웃들과 함께 우리 ‘뽕잎차’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뻐세진 뽕잎에 오디까지 모두 지고없는 뽕나무를 지켜보면서, 놓친 아쉬움과 더불어 산촌 일지를 이만 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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