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책꽂이

[5호] 유쾌한 건달 씨의 파란만장 인생사

- 기픈옹달(수유너머 R)

달맞이의 책꽂이

유쾌한 건달 씨의 파란만장 인생사
<신기하고 새롭고 멋지고 기막힌> 김기정 글 / 이지은 그림 / 창비

난 백수다. 가끔은 문필하청업자 노릇도 한다. 둘째 놈은 하루가 멀다 하고 해리포터를 찜쪄 먹을 수 있는 대작을 터뜨려서 인생이 한 방이라는 걸 보여주라고 성화지만, 그건 너무나 먼 세상의 이야기라……. 그냥 산다. 설렁설렁 건들건들. 마흔을 훌쩍 넘겨 깨달은 건, 살아 보니 내 욕심껏 세상은 살아지는 게 아니라는 것. 그러니 그저 오늘을 열심히 사는 게 제일이라는 거, 어제랑 다른 내가 되려고 애쓰다 보면 죽을 때 조금 가벼울 수 있겠거니 하는 거……. 그 정도가 전부다. 재수 없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도, 무릎 진탕 깨져 피가 철철 흘러도 한바탕 목 놓아 울어버리고 나서 또 금세 손 털고 일어나야 된다는 거, 죽어라 용쓴 뒤 뒤돌아 울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는 게 훨씬 정직하다는 걸 알아버렸으니 그냥 그렇게 살려고 애쓴다. 그런데 참 잘 안 된다. 팩하고, 쌩하고, 울컥하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내 맘을 내가 모르는 채 살아간다.

이 책은 그 옛날 무지하게 촉망받던, 훌륭한 사람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던 한 남자의 이야기다. 부모의 엄청난 바람을 뒤로 하고 건달이 되어버린 늙은 청년의 이야기. 사람들은 그를 빈둥빈둥 ‘건달 씨’라 부른다. 의사, 택시 운전사, 발명가, 마술사, 요리사, 대학교수, 가수에 벌목꾼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으나 지금은 놀고 있는 게 분명한 우리의 건달 씨! 사람들에게 그는 한심한 백수, 희망이라곤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허접한 인생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일을 벌인다. 일 좀 하라는 이웃 할머니의 타박에 허리를 굽실굽실, 머리를 긁적긁적거리던 찌질남, 지지리 궁상남인 그가 학교 앞에 가게를 차린다.

전직 요리사였던 건달 씨, 드디어 뭔가 보여주기 시작한다. 지금껏 그 누구도 맛본 적이 없는 신기하고, 새롭고, 멋지고, 기막힌 엄지 빵으로 아이들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단 한 개로! 아이들은 맛있고 기분 좋은 기운에 취해 꿈을 꾸듯 행복해 한다. 그 다음날은 전직 발명가답게 불면 기분이 좋아지는 요술 풍선을 선보인다. 짜증, 화, 슬픔, 심심함을 알록달록한 풍선에 모두 넣어 버린 아이들은 웃음을 되찾는다. 그 다음날은 뭐든 곱빼기로 튀겨 주는, 겁나게 신나는 뻥튀기 기계를 들고 나타난다. 아이들은 점점 더 건달 씨에게 매료되고, 건달 씨는 아이들에게 뭔가 해 준다는 것만으로 마냥 즐겁게 신나고 유쾌하다. 건들건들 빈둥빈둥 건달 씨는 이제 꿈처럼 달뜬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이 책은 발랄한 문체로 초반부터 독자를 사로잡는다. ‘아이들이 읽는 동화에 웬 건달 이야기람?’ 싶은 우려를 단번에 날려 보내는 건, 눈물겹도록 절박한 건달 씨의 애원이다.

“제발 날 좀 가만두세요!”

수학 문제집 좀 풀라고, 영어 단어 몇 개 더 외우라고, 될성부르지 않은 아이들과는 애당초 눈도 마주치지 말라고, 학원을 네 집처럼 여기라고, 그래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그래야 엄마 아빠의 뜻을 따르는 기특한 사람이라고 닦달하는 부모에게 있는 대로 시달리는 아이들 눈에는 건달 씨의 반란이 남 같지 않을 것이다. 공부랑은 담을 쌓고 싶어 하는 둘째에게 석 달에 한 번쯤(정말 그 정도밖에 안 되건만) ‘공…….’ 이야기를 꺼내건만, 녀석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기겁을 한다. “스톱! 난, 나야!” 잘났어, 정말!

책을 읽는 내내,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건달 씨가 부러워 죽겠다. 아이들에게 행복과 웃음을 돌려주는 건달 씨도 부럽지만, 누군가에게 뭔가 해준다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신나고 유쾌하게 살 수 있는 건달 씨가 더 부럽다. 어슬렁어슬렁 수유를 들락거린 지 벌써 5년째건만, 난 아직도 머리와 입과 신체의 리듬이 따로 논다. 아직도 줄 때보다는 받을 때 입이 더 벌어지고, 주고 난 뒤에도 쉽게 잊어버리지 못하고 한 번쯤 짱구를 굴리니까. 담장 밑에 있는 패랭이꽃 한 송이, 어슬렁거리는 강아지 한 마리와도 인사를 나눌 줄 아는 건달 씨도 부럽다. 먹어도 먹어도 살 한 점 안 찌고 몸에만 좋은 과자, 읽어도 읽어도 또 읽고만 싶은 그림책, 입어도 입어도 싫증나지 않고 어쩌다 공중에 뜨기만 하는 깃털 옷, 쓰면 쓸수록 술술 일기가 잘 써지는 일기전용 만능연필……. 아이들 속내를 콕콕 짚어내는 건달 씨도 부럽다. 12빼기 9를 틀리고 와서 바보 멍청이라고 자책하는 도톨에게, 사탕봉지를 들고 와서 뺄셈을 알려주는 친절한 건달 씨는 더 부럽다(내 애가 그랬다면 즉각적으로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르니까. ‘너, 바보 멍청이 맞아!’)

정말 정말 부러운 건 건달 씨 때문에 손님을 뺏겼다고 생각한, 그래서 건달 씨를 사기꾼으로 고소까지 한 도치 씨 부부의 마음을 되돌린 진정성이다. 아이들에게 무엇이건 하나라도 더 팔아, 돈을 박박 긁어모을 생각에만 가득 차 있는 도치 씨와 박박 부인은 건달 씨가 자기네 가게 옆에 가게를 차리자 바짝 긴장한다. 그러다 미련한 건달 씨가 가게 문을 열고도 멀뚱멀뚱 시간만 보내자, 만만하게 보고 훈수까지 한다. “아이들은 신기하고, 새롭고, 멋지고, 기막힌 걸 좋아한다네.” 그러나 웬걸. 코딱지만한 건달 씨 가게쯤이야 하고 한껏 무시했다가 손님들을 왕창 빼앗기는 수모를 당한다. 도치 씨 부부의 변덕스러움은 얄밉다기보다 짠하다. 남이 혹여 제 것을 빼앗을까 잔뜩 긴장하고, 자기보다 조금 떨어진다 싶으면 동냥하듯 선의를 베풀다가도, 경쟁 상대가 될 듯 싶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떼어내려고 하는 저 지독한 이기주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서장과 교장선생님의 힘을 빌려 압박을 가하는 도치 씨 부부에게 건달 씨는 ‘신기하고, 새롭고, 멋지고, 기막힌’ 선물까지 한다. ‘날마다 신나는 가게’ 주인인 건달 씨와 ‘어제까정 신났던 가게(건달 씨가 아이들에게 한 번씩 보였던 신기한 물건들을 갖다 판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 주인인 도치 씨 부부는 그렇게 같이 행복하게 살아간다.

사람들은 그 뒤로 더는 건달 씨를 ‘건달 씨’라고 부르지 않았단다. 건달 씨는 이제 ‘건달 선생’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하나 얻었다. ‘훌륭한 사람’이라는 칭찬도 듣게 되었다니, 그 옛날에 비하면 출세를 한 셈이다. 그러나 건달 씨에게 가장 기막힌 선물은 ‘날마다 신나는 가게’ 주인이 되었다는 것일 게다. 마흔이 되어서야 세상에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는 것. 마흔이 넘어!

이 이야기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오는 것은 작가의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일 게다.

‘그래, 촉망받는 수재였으나 이야기가 더 좋아 작가로 변신했다고 했었어. 대학로 근처의 다락방에 칩거해 죽기 살기로 습작을 했던 시절이 있었다고도 했고. 지금은 아이들을 손수 키우면서 하고픈 이야기를 맘껏 토해내고 있다대.’

유머러스하고 감칠맛 나는 이야기 너머로 아마도 작가는 이렇게 속살거리고 있을게다.

‘바쁠 거 없어. 천천히 생각해 봐. 네가 정말 하고 싶은 게 뭔지.’

눈이 흩뿌리는 거리를 건들건들 걷는다. 참새 몇 마리가 오쫑쫑한 다리로 산책을 하다가, 둔탁한 내 걸음에 놀라 화들짝 날아간다. 건달 씨라면 분명 걸음을 멈추고,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을 게다. 이 추운 날, 쟤들에게 ‘신기하고, 새롭고, 멋지고, 기막힌 선물’이 무엇일지 고민 고민 했을 게다. 진정성이란 그런 것일 게다. 이심전심 전해지는 것, 건달 씨 마음을 내가 미루어 짐작하듯이, 내 눈빛 하나, 내 손짓 하나가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응답 4개

  1. 둥근머리말하길

    건들건들 걸으면서 이것저것 들춰보는 것이 엿보이는 글 같아요. 느리지만 놓치지 않는… 독자여서 참 기뻐요.

    • 박혜숙말하길

      여기서라도 이렇게 보니, 너무 좋네.
      김기정 샘 글 참 매력있어.
      유쾌한 글 속에 숨어 있는 재치, 송곳같은 시선. 아이스런 천연덕스러움.
      이 책 읽다 보니 정말 더 그런 생각이 들었어.
      조금은 건들건들, 슬렁슬렁 살고 싶다!

  2. 행인 3말하길

    보내주신 동화책 매이랑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를 특히 좋아하더군요. 항상 주는 걸 좋아하는 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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