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민주주의 없는 민주주의

- 고병권(수유너머R)

소위 ‘통합진보당(통진당) 사태’가 일어나기 얼마 전 ‘경기동부연합’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그 말이 생소했던 나는 수업에 함께 했던 대학원생들에게 ‘경기도 동쪽’이 어디를 가리키는 건지, 거기에 학생운동이나 노동운동이 세력을 형성할 어떤 기반이 있는지를 물었다. 물음 자체가 내 무지에 대한 폭로였다. 어떻든 그들의 친절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나는 진보당 내부의 세력관계가 골치 아플 정도로 복잡하고, 과거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부터 내려오던 관행들이 생각보다 심각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물론 내가 들은 이야기나 짐작한 내용이 얼마나 사실에 부합하는지를, 특히 지금처럼 여론몰이가 심할 때는, 확신할 수 없다.

내가 뭔가 이야기를 꺼내고 싶은 쪽은 통진당 내부의 사정이 아니라 통진당 사태를 둘러싸고 벌어진 민주주의 논쟁이다. 사실 논쟁이랄 것도 없고,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가해진 당권파에 대한 심판, 그리고 이에 대한 당권파의 항변(심판이 민주적 절차를 지키지 않고 있다는 흥미로운 항변!), 진보세력에 대한 ‘민주주의자들’의 비난과 훈계가 있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민주주의자들’의 비난과 훈계에서, 지난 5월 12일 중앙위원회에서 자행된 당권파의 폭력 만큼이나 충격을 받았고 또 그만큼의 퇴행을 보았다.

통진당 폭력사태가 발생한지 얼마지 않아 어느 대학에서 통진당 사태를 어떻게 볼지에 대한 긴급 토론회가 열렸다. 사람들은 자리를 가득 메웠고 긴장감마저 감돌았다. 발표자들과 청중의 공감 아래 당권파의 비민주성에 대한 고발이 이루어졌지만 솔직히 거기서 제시된 민주주의론은 좀처럼 공감하기 힘든 것이었다.

한 발표자는 민주주의란 다수가 표를 통해 대표를 정하고 그들이 내린 결정에 승복해야하는데 당권파들은 운영위원회나 중앙위원회의 결정을 거부했다고 했다. 또 민주주의란 한 세력이 권력을 잡은 뒤에는 또 다른 세력이 권력을 잡는 식으로 권력교체가 일어나야 하는데 통진당에서는 당권파가 계속 당권을 잡았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그가 제시한 형식적 원칙들에서 나는 중앙위원회의 결정이 (당시 당권파가 요구한) 당원총투표보다 더 민주적이라고 말할 근거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 교체가 자주 일어난다는 말은 수긍할 수 있지만(그것은 민주주의 자체가 갖는 무근거성 내지 개방성과 관련이 있다), 역으로 민주주의를 위해서 다수파가 소수파에게 권력을 인위적으로 넘기는 예는 보지 못했다. 그런데 내 생각에 정말 중요한 질문 하나가 방청석에서 던져졌다. 그럼 지금까지 날치기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단상을 점거했던 야당의 시도는 비민주적이었는가, 그리고 앞으로 새누리당이 표결을 요구하면 그대로 응하고 거기에 승복할 것인가. 그것이 민주주의인가. 불행히도 나는 그 흥미로운 질문에 대한 답변을 그 날의 발표자들에게 들을 수 없었다.

한 발표자는 이번 사태는 ‘상식’과 ‘몰상식’의 문제라며, 이제 한국의 진보세력도 민주주의관을 ‘글로벌스탠더드’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상식? 글로벌스탠더드? 도대체 그게 어느 나라에서 통용되는 기준일까.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작년 ‘미국에는 민주주의가 없다’며 ‘참된 민주주의’를 요구했던 미국인들이 떠올랐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 미국 대중들이 정치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통로는 한국보다 훨씬 작은 것 같다. 부시의 아들 부시가 대통령이 되고 클린턴의 부인 클린턴이 대선에 출마하기는 쉬워도 말이다. 기업과 주류 언론(언론 자체가 기업화되어 있지만)의 로비와 보도영향력이 사실상 정치적 이슈를 좌우하는 상황. 미국인들이 ‘기업주의’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요구한다고 말하는 이유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이게 어디 미국만의 문제인가). 내가 그나마 ‘미국의 민주주의’, 즉 미국 ‘데모스의 힘’을 본 것은 아큐파이 운동 속에서였다.

머리끄덩이나 멱살을 잡는 일은 없어도 민중에 대한 배제가 체계화 되어 있고, 몰상식한 뒷거래가 적을진 몰라도(과연?) 뇌물 자체가 로비라는 이름으로 제도화되고 합법화된 정치. ‘글로벌스탠더드’라는 말을 들으면서 참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지난 몇 년간, 특히 점거운동 이후, 세계의 민중들이 싸운 것은 선진 민주주의의 ‘글로벌스탠더드’를 세계적으로 확장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민주화 운동은 역으로 중동이나 아프리카 쪽에서 유럽과 미국쪽으로 확대되었다. 내 생각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글로벌스탠더드’가 아니라 ‘글로벌 민주주의’다.

마치 중고등학교 사회수업시간을 연상시키는 수많은 발언들. 어느 신문은 사설에서, 목적이 옳다고 절차와 방법을 무시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라고 말하고, 어떤 학자는 민주주의적 절차는 단순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표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학자는 민주주의를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누어 한국 사회가 ‘형식적 민주주의’를 달성한 것처럼 오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모두가 ‘질서’ 민주주의자로 둔갑한 느낌이었다.

나 역시 민주주의를 ‘형식적 민주주의’와 ‘실질적 민주주의’로 나누는 것에 반대하지만, 그것은 ‘형식적 민주주의’가 여전히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도 아니고, 민주주의의 기본이 ‘절차와 방법’에 있다고 믿기 때문도 아니다. 민주주의에 관한한 순수한 실질을 상정하는 것이 허구적인 만큼이나 민주주의에 (도달해야 할) 순수한 형식과 절차가 있다는 생각도 허구적이다. 스스로를 민주주의라고 칭하는 정치체를 비롯해서 모든 정치체들은 고유의 이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형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형식이 결여되어 있다’는 말은 내게는 이상하게 들린다. 나는 오히려 지금의 정치체가 어떤 형식을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통해 드러난 우리의 민주주의관(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통념)이 어떤 것인지, 그것에 고유한 무능과 폭력, 배제가 어떤 것인지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다시 묻는 일에 관심이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는 그 절차와 방법, 형식의 폭력성을 문제삼지 않게 되면,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기본이 그런 것들의 수호에 있다고 확신하게 되면, 우리는 민주주의와 공안이 구분 불가능한 지점에 이르는 걸 보게 될 것이다(검찰 공안부가 통진당 사태에 개입하는 것은 내게 하나의 귀결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6월 초 통진당의 당기위원회에서 이석기와 김재연 두 사람을 제명하기로 결정했을 때, 두 사람이 “당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당대표들에 의해) 훼손됐다”고 항변했다는 사실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당권파를 꾸짖는 수많은 ‘민주주의 선생들’은 이들이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특히 목표를 위해 민주주의의 ‘절차나 수단’의 가치를 무시했다고 공격했는데,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징계가 민주주의, 특히 ‘절차적 민주주의’를 준수하지 않는다고 항변했으니 말이다. 통진당의 비상대책위원회가 당이 처한 ‘예외 상황’을 이유로 많은 절차적 과정들이 생략한다는 느낌을 주는 건 사실이다. 사실은 ‘비상대책위원회’라는 것 자체가 (새누리당에서도 그랬지만) ‘민주주의의 선생들’이 믿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외상황’ 내지 ‘긴급상황’을 이유로 기본적인 권리나 절차, 규칙들을 생략할 비상대권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통진당의 당권파를 변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가 읽고 들은 게 맞다면 그들은 정말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공격했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사람들이 ‘민주주의의 파괴자’로서 당권파의 생얼을 본 것처럼 거품을 문 5월 12일 중앙위원회 폭력 사태가 아니다. 국회에서 단상점거하고 해머로 문을 부수고 멱살잡이에 주먹질로 콧대가 부러지는 일을 많이 봐서 그런지, 물론 권장할 풍경은 아니지만, 당원끼리 행사되는 폭력에 혀를 찼을 뿐 충격까지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당권파와 관련해서 정말 충격을 받았던 것은 그들이 민주주의 규칙을 어길 때가 아니라 그것을 이용할 때였다. 가령 ‘용산지구당 접수 사건’ 같은 것이, 5월 12일의 단상점거나 의사진행방해, 몸싸움보다 더 충격적이었다. 대규모 당적 이동을 시켜 대의원 선거를 장악하려 했던 것. 설사 그들이 규칙과 절차를 준수해서 했다 하더라도(용산 사건은 그것마저 의심스럽지만), 그것은 권력다툼을 위한 정치엘리트들의 정치공학이지, 내가 아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데모스의 힘’이라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민주주의를 보자면 말이다. 데모스의 힘은 없고 엘리트들의 정치공학적 역량만이 드러난 것이다. 그리고 이런 정치공학은 통진당의 탄생 자체에도 해당하는 것이고, 넓게 보면 야권연대에서도 간혹 보이는 모습이다. 민주당이나 새누리당은 말할 것도 없고. 결국 내가 통진당 사태에서 느낀 민주주의에 대한 절망은, ‘그들도 똑같다’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민주주의론자에게 크게 실망한 적이 있다. 그는 시민들을 제대로 대의하지 않는 정치 엘리트들을 꾸짖고 있었지만, 그의 민주주의론은 칭찬도 반성도 질책도 결국 엘리트에게만 적용될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갖고 있었다. 시민을 혹은 민중을 위한 정치를 염원한다고 하지만 이론 안에 민중의 자리는 없는 민주주의론. 민중을 위한 것 같지만 민중은 아무런 적극적 역할도 할 수 없는 민주주의론. 한마디로 민중배제적 민주주의론. 그런데 이제는 진보정당에서도 그런 ‘민중을 배제하는 민중 지향 정치’를 본 것 같아 참 씁쓸하다. 진보정당 마저도 현장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점차 다른 엘리트들과의 권력 게임에서 승리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으니. 난 그들이 게임의 규칙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보다 더 절망스러운 면모를 거기서 발견한다.

그나저나 걱정이다. 내게 민주주의 강좌를 청했던 어느 인권단체에서 보낸 글을 살펴보니,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얼마나 민주주의를 요구했고 실천했는지’ 검토해보자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좋은 말이고 꼭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행여 그것이 우리는 얼마나 다수결에 승복했고, 우리는 얼마나 절차와 제도에 있어 투명했고, 우리 사회 규칙들을 평화롭게 준수했는지를 점검하는 일이라면, 그만 두라고 말하고 싶다. 차라리 당신들이 소수자들로서 난입하고 점거하고 절규했던 일들이 백배 천배 민주주의에 가까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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