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반시대

진보 내부의 민주주의와 진보적 성찰성 -조희연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소장 인터뷰(2)-

- 정정훈(수유너머N)

통합진보당 사태, 그리고 진보 내부의 민주주의

정 : 이미 언론지상에서 통합진보당 사태에 대한 무수한 논의들이 오갔다. 선생님도 관련된 글을 몇편 기고하시고 토론회에도 참석하신 걸로 안다. 결국 질문은 이런 것이다. 진보진영 내부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 그것이 단지 기존 권력이 장악하고 있는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에 충실하다는 것 이상의 차별성은 없는 것일까? 그것이 아니라면 기존의 절차적, 형식적 민주주의는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따를 필요가 없는 것일까?

조 : 나의 고민도 민주주의를 경제환원주의적으로 패기해 버리는 것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도구화하는 것에도 반대한다. 하지만 역으로 현 상황을 보면 또 다른 극단으로 가는 느낌이 있다. 민주주의적 절차를 중시해야 하지만 또 그것이 과잉 절대화되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특히 두 가지의 문제가 중요하다. 우선 기존의 부르주아적인 절차의 과잉 절대화와 폭력이라는 것의 과잉 절대화가 있다. 전자와 관련해서 부르주아적인 민주주의 절차를 완전히 준수해야만 한다는 분위기가 있다. 당권파의 경선부정이라던가 몰염치스러운 면들을 비판하다 보니, 또 그쪽에서 그것을 승복하지 않다보니까 이 국면이 선거 자유주의자/정당 자유주의자와 변혁주의자가 동맹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렸다. 의도치 않은 동맹이 형성된 것이다. 우리가 동맹할 수도 있지만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급진주의자의 입장으로서 맞는 것 같다. 쉐보르스키와 같은 정치학자는 사회주의 정당마저도 제도 내에서는 개량화 된다거나 선거정당화하는 딜레마에 대해서 우려한 적이 있는데, 나는 통진당 사태가 이런 경향을 가속화시키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특히나 통합진보당이 제도정당이기 때문에 급진성과 변혁적 경향이 취약한 점이 있는데 이 취약점이 더 강화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더 절차가 강조되는, 절차가 절대화되는 경향을 가속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하나의 딜레마다.
다음으로는 폭력이다. 우리학교에서 토론회할 때, 일본의 좌파 사상이나 좌파 운동을 연구하는 어떤 일본인 교수에게 일본에서는 이런 폭력적인 것이 많냐고 물어봤는데, 그는 통진당 사태에서 드러난 폭력은 일본 좌파운동의 역사에서는 폭력의 축에도 못 낀다고 하더라. 그래서 따옴표 친 “폭력”이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정도가 폭력이면 폭력이 아닌 것이 뭐가 있나. 이런 것은 폭력 중에도 못 낀다고 얘기할 수 있다. 그런 면으로 지젝식으로 ‘전체주의가 어쨌다고, 파시즘이 어쨌다고’와 같은 어법에 어떤 합리적 핵심이 있다고 얘기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국면에서 그런 얘기를 하면 돌 맞는다. 어쨌든 폭력 자체를 물신화한다고 할까, 통진당 사태를 폭력이라는 문제로만 환원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중앙위원회의 사태가 폭력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리들의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열정이 폭력적으로 낙인화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출현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경선 부정 같은 것처럼 부르주아 기성세력의 눈에서 볼 때도 우리가 고개를 들 수 없는, 부도덕하게 비춰질 수밖에 없는, 후진적으로 비춰질 수밖에 없는 행위를 하는 집단으로 우리가 투영되고 있는 이 상황이 오히려 문제가 되어야 하지 않나.
폭력적이라고 매도되면서 화염병 들고 전두환 독재정권과 싸울 때를 생각해보면 대중들이 폭력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통진당 중앙위에서 벌어졌던 사태를 대중이 폭력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에 우리가 처해 있는 것이다. 물론 명백히 당권파에 문제가 심각하게 있고, 따옴표 친 “폭력”적 행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대중들의 감각으로 볼 때 부르주아적인 도덕성의 기준도 뛰어넘지 못했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성찰해야 할 지점이다. 빨리 이 국면을 탈출해야 한다. 당권파, 비당권파의 대립구도도 빨리 종결해야 한다. 당권파는 욕을 먹더라도 일단 1라운드를 매듭짓고 2단계로 가야 한다. 6월 29일 전당대회 자체도 1라운드의 연속성 상에서 전당대회가 열리면 안 될 것 같다. 빨리 1라운드를 일정하게 매듭짓고 싸우는 게 맞다고 본다. 우리들의 급진적인 열정과 전투적 투쟁도 시대를 앞서가는 희생이 되지 않을 때는 그것은 폭력으로 낙인화 될 수 있고, 그것은 대중들에 의해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오히려 이 구도의 출현에 대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정 : 통진당 사태를 보면서 진보정치를 추구하는 이들 사이에 입장이 좀 나뉘는 것 같다. 길게는 2008년 민노동당 분당, 짧게는 이번 통진당 사태로 인해 진보정치의 1기는 끝났으니 통진당을 폐기하고 제로 베이스에서 진보정치운동을 다시 시작하자는 통진당 폐기론과 통진당을 이 기회에 전면적으로 쇄신하여 통진당을 기초로 진보정치운동을 다시 시작하자는 통진당 재활용론이 그것이다. 제 생각에 선생님은 재활용론에 가까우신 것 같은데?

조 : 통합진보당이 전국민적인 매도 대상이 되고 논란 대상이 되니까 역으로 인지도는 더 늘어나버린 것 같다. 역으로 진보 정치 내에서 통합진보당이 갖는 대표성은 더 늘어난 것 같다. 페이모스(famous)가 아니라 노터리어스(notorious)이기는 하지만.(웃음) 역설적으로 보면 통합진보당이 현재 높은 인지도를 지지도로 전환시킬 가능성도 생겨난 지점이 있는 것 같다.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통진당 사태로 인해서, 진보 좌파 정치세력이 결국 원내정당이 못 되된 상화에서 결과적으론 진보 우파 정당을 진보정치에서 완전히 배제하고 진보 정치를 사고할 수 없는 상황이 이미 되어버린 것이다. 국민들은 이미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진보신당이 지식인 내에서조차 상당히 주변화 된 이유가 거기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제가 이야기하는 게 뭐냐면 ‘노터리어스’하다는 것과 ‘페이머스’하다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이다. 언제나 동전의 양면인 것 같다. 제가 맨날 농담처럼, 서울신학대학이 신학대학에서 가장 유명한 이유는 수능 시험지 도난사건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대중들은 자신이 왜 서울신학대학을 기억하는 지를 나중에는 잊어버리고 이미지만 남는다는 식의 제가 약간의 농담도 하고 그러는데, 어쨌든 그 지점에 딜레마가 하나가 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 문제는 같이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은데, 김세균 선생 같은 분들은 통진당은 자유주의 정당,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급진 진보세력의 연합정당이라 이야기하는데, 저는 그 의미가 매우 중요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미 이른바 진보정치세력이 자유주의정치세력과 한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로인한 그 화학적 변화과정을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통진당 당권파의 전횡에 대항하는 과정에서 반NL 동맹을 형성되는데 그것이 자유주의 세력과 PD파 연합이 되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로의 영향력은 단지 정세적 파트너쉽의 수준을 넘어서 화학적 수준에서 상호침투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동맹의 효과로 PD파의 성격이 화학적 변화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다.
또 다른 고민은, NL과 PD의 관계문제이다. 양자를 분리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고민이다. 가령 박현채 선생은 민족경제론에서 결국 NL과 PD가 함께 가야한다는 문제의식을 보였었다. 김세균, 손호철 선생과 진보교연을 통해서 진보정당통합 운동을 함께 했던 이유도 그런 문제의식의 선상에서 였다. NL과 PD를 분리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NL과 PD를 재통합하려는 이 운동이 역설적으로 작금의 통합진보당 사태로 귀결되었다.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말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 거냐. 자, 이번 사태가 좌파 정치 운동의 큰 두 흐름은 즉 민족해방파 내지는 반미자주파와 PD파 혹은 평등파이다. NL파는 기본적으로 반제민족해방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고, PD파는 기본적으로 전후 포스트 식민주의적인 자본주의 모순에 대한 대항세력이다. 전자는 급진민족주의 세력이고, 후자는 노동자계급 급진주의 세력인데 이 두 흐름이 분리되는 순간, NL은 현재적 자산이 될 수 없고, PD는 역사를 잃어버린 세력이 된다는 위기의식이 나에게 있다. 분리 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번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NL은, 말하자면 대중적인 지지로부터 현저하게 괴리되는 상황이 처해 버리고, PD는 원래 그 한계가 굉장히 엘리트주의적이어서 대중적 기반이 약한데 더욱 왜소해져 버렸다.
그런데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 물론 내 의견은 토론에 붙혀져야 할 필요가 있다. 왜 PD파가 대중적 기반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것일까? 심지어 김문수나 이재오와 같은 일부는 보수정당으로 투항했을까? 그것은 PD파의 내재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 보면 전후 한국자본주의의 막강한 흡인력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한국의 자본, 시장 세력의 강고함이 PD의 취약한 대중기반과 연결되어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 급진주의가 말하자면 그 어떤 병목 지점을 넘지 못하는 상황, 즉 이번 선거에서 노동자 밀집지역에서의 분열, 그리고 지지를 잃어버린 상황이 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가 뭐냐면 NL과 PD가 분리되고, PD 내부의 분열 속에서, 결국은 노동자 계급 급진주의를 표방했던 노동정치세력이 노동 대중과 분리되는, 즉 굳건한 대중적 기반을 갖지 못한다는 말은, 그 귀결이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시사한다는 것이다. 그 귀결이 향후 어떤 정치적 궤적을 그릴지에 대해 우려스러운 지점이 있다.
내 이야기가 추상적이기는 하다. 왜냐면 한국 진보운동의 성격자체가 애매하니까 그렇다. 그래서 이번 사건을 조금 성찰적으로 보면서 말하자면, 좌파 정치세력, 진보 정치세력의 재구성에 방안들을 찾아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하면, 이번 통진당 사태가 모든 진보적 가능성을 봉쇄시킨 사건이 되어가는 것 같다는 점이다. 아마도 통진당내 진보세력이 자유주의 세력과 ‘이혼’하는 것이지 싶다. 자유주의와 이혼해서 다시 진보좌파세력과 재결합하는 가능성. 그런데 아까 말한 바와 같이 평등파가 반NL 전선 과정에서 너무 자유주의 세력과 화학적으로 결합되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이 자유주의와의 이혼의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통진당 사태를 고민할 때는 그런 딜레마가 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NL은 어쨌든 대중적으로 매도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어버렸다. 이 상황 속에서 NL세력과 PD세력의 감정의 골은 더 깊어져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고 아까 얘기했던 것처럼 대중의 눈에는 진보정치에 대한 통합진보당의 대표성은 ‘노터리어스’하게 더 커져 버린 상황이다. 개인적으로 전망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다 못해서 NL, PD 재통합 운동을 하자고 할 때는 그래도 희망이 보였다. 지금은 모든 경로가 봉쇄된 것 같은 상황이다.
결국 유일한 방안은 진보좌파 세력이 재결집을 해서 10-20년을 앞을 보고 준비하는 것이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지금처럼 최소화한 진보 우파정당이 그 진보 좌파정당과 통합의 필요성을 느낄 정도로 성장을 하는 것밖에 없다고 본다. 진보 좌파정당의 독자적 성장을 위해서는 결국 녹색주의 세력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하는 지점이 관건적인 것 같다. 하지만 녹색정당의 진보성을 좌파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사실 진보 좌파 정치 세력일수록 생태주의적 감수성이 약하다. 이것도 현재 진보정치운동에 내재하는 딜레마이다.
결과적으로 소수자 사회 세력이 더 쉽게 정치적으로 대표되고, 제도정치 공간 내에서 연합이 가능한 제도를 만들고, 녹색정치 세력은 지금은 어렵지만 10-20년을 보고 성장하고, 진보 좌파 세력도 어렵지만 10-20년을 보고 독자적으로 성장하는 것. 그나마 기성정치에 대한 대중의 불신이 원채 크니까 장외 정치 세력의 성장의 공간은 있다고 본다. 아래로부터 시도되는 운동이 필요할 것이다.

운동의 정치로만 충분한가?

정 : 현재 유행하는 저항이론이나 좌파이론들 가운데 대안적 제도를 구성하는 문제 보다는 기존 제도의 해체에서 민주주의와 혁명의 본원적 의미를 찾는 입장들이 많다. 이런 관점들은 대부분 정당을 비롯한 대의정치체제나 제도정치에 대해서 회의적이다. 이와 같은 탈제도적 민주주의, 혹은 사건과 운동의 민주주의를 어떻게 보시나?

조 : 탈제도화적 동력으로써의 민주주의를 사고하는 게 딜레마도 적고, 편한 방법인 것 같다. 실제 급진민주주의라는 것은 결국 기존의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경계를 계속 해체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급진적 확장을 이야기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정 단계의 민주주의를 해체해서 재구성하는 새로운 제도화된 민주주의가 어차피 출현하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단계에 있어서 재제도화된 민주주의도 어차피 기존 권력에 식민화되기 때문에 새롭게 탈제도적 해체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급진민주주의에 맞다. 그러나 재제도화된 민주주의가 그나마 기존의 제도화된 민주주의와 다른 작동 방식을 갖는다고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탈제도화를 거친 이후 재제도화된 민주주의는 그 이전과는 다르지 않겠는가?
그 점에서 제도성 자체가 언제나 우리에게 딜레마인 것 같다. 궁극적으로 탈제도적 민주주의론은 국가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맑스주의에 대한 아나키즘적 급진적 매력과 상통하는 것 같다. 아무리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건 간에, 혁명이 제도화되는 순간 딜레마는 출현한다. 그런 점에서 제도화와 탈제도화의 긴장 관계 속에서 민주화를 사고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영원히 제도권 외부에 있을 사람이 있고, 제도권 내부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무리 혁명주의자도 제도화되는 순간 제도화의 딜레마에 봉착하게 되는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도 마찬가지 같다.
이론적으로는, 민주주의나 시민권이나 부르주아적 권리를 급진적인 입장에서 그 존재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정치의 외피이다는 식으로 기각해버리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첫 번째, 부르주아적 권리, 시민권, 민주주의 등 우리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은 1차적으로 계급적, 사회적 투쟁을 통해서 쟁취한 획득물이다. 민주주의도 전근대적 지배에 대해서 시민혁명으로 상징되는 민중적 투쟁을 통해서 인민에 의해 강제된 것이다. 민주주의가 강제되어 실현되었을 때는 기존 지배세력은 어떻게 대응하는가. 민주주의와 같은 계급적 사회적 투쟁을 통해서 강제되고 획득된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면서 내부로부터 식민화 한다. 역사는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양면성을 갖는 것 같다. 즉 계급적 사회적 투쟁을 통한 획득물, 진보적인 문명적 가치, 진보적인 문명적 제도들은 한편에서 보면 획득물이라는 성격을 갖는 반면에 다른 한편에는 부단히 현실 권력에 의해서 내부로부터 식민화된다. 기존의 권력들이 그걸 현실로 인정하고 그걸 자신과 모순되지 않게 관리하려고 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제도는 특히 진보적인 문명적 제도는 양면성을 갖는다, 부단히 허구화되지만 동시에 허구적인 것으로만 파악될 수 없는 운동에 의한 획득물로서의 성격이 있다. 즉 그러한 일정하게 진보성을 내재한 제도들은 지배 양식 속에서 그것과 부단히 일정한 긴장을 가지면서 작동한다. 그 양면성을 봐야 하지 않을까?
두 번째는 지배세력에 의한 식민화에 대립하는 탈식민화의 어떤 힘, 위협, 압력이 있어야 민주주의나 정당이 제구실을 한다는 이야기를 아까 했었는데, 결국은 이명박 정부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계급적, 사회적 투쟁을 통해서 87년에 민주주의를 획득했고 직선제 민주주의를 획득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보여주는 것은 진보적 운동에 의해 강제된 그 제도조차도 지속적인 계급적, 사회적 투쟁의 효과가 있어야 그 제도의 진보적 측면이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 운동이 강제한 제도의 진보성은 현재의 사회적 투쟁의 효과 속에서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획득물이란 성격하고 효과라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 효과가 없으면 제도의 허우대는 멀쩡한데, 혹은 형식은 동일한데 실제로는 그 민주성이나 진보성은 후퇴되고 공동화되고 허구화된다는 것을 이명박 정부가 보여주는 것 같다. 그래서 모든 제도, 심지어는 정당민주주의, 선거, 시민권, 각종 다양한 시민적 정치적 권리, 심지어는 사회경제적 권리조차도 그렇게 양면적인 것으로 봐야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회적, 계급적 투쟁의 확장에 따라서 그 효과가 달라지면 그 권리도 좀 확장되는 그런 과정이라는 것이다.

정 : 결국 현실적 제도들이나 시스템등은 사회세력들의 운동에 비해서는 2차적이란 말씀이신가?

조 : 개인적으로 그런 생각이다.

진영 논리와 정의를 향한 광기, 그리고 진보적 성찰성

정 : 그 동안 좌파정치학은 적대의 정치를 많이 강조해 왔다. 요즘 ‘대세’의 지위에 오른 지젝도 적대를 매우 강조하며, 서구 급진민주주의의 대표급 이론가들인 라클라우나 무페 역시 적대의 문제를 자기 정치학의 중핵에 놓고 사고하지 않는가? 정치에서 전쟁모델을 좌파 역시 강력하게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치에 전쟁의 계기, 혹은 적대의 계기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다시 말해 좌파가 사유해야하는 것이 단지 적대 뿐은 아닌 것 같다. 나와 다른 타자와 더불어 공존하고 호혜적 관계를 맺기 위한 어떤 연대성의 정치, 혹은 우정의 정치라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나 싶은 것이다.

조 : 여러 쟁점이 있는 것 같다. 아주 심층적인 이론적 차원에서 보면 ‘수유너머’의 『코뮨주의』에서도 얘기하는 것이지만 적대정치학과 다른 우정의 정치학이 과연 가능하냐는 문제는가 있다. 부족하지만 ‘급진민주주의의 인간론적 기초’라는 제 글에서 쓴 것처럼, 인간의 본원적 사회적 관계의 성격에는 적대성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연대성도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공동체성이라고 표현해도 좋을만한 것들이 있다. ‘우정의 정치학’의 근거들이 인간의 본원적 사회적 관계 속에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분명히 희소한 자원을 둘러싸고 적대적 관계가 존재하고 맑스주의가 그것을 포착했지만, 다른 한편에는 인간은 자연의 위협 앞에서 함께하고 돕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는 지점이 있는 것 같다. 맑스주의가 적대의 정치학을 이야기했던 것은 더 높은 수준의 우정과 연대를 위해서 현존하는 적대의 차원을 극복하는 것이지 적대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기 위함이 아니지 않는가. 영원한 적대는 아닐 것이다.
사실은 좌파 담론도 그러한 측면이 있다. 실제 적대만 가지고 대중을 동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따져놓고 보면 희망을 가지고 동원한다. 적대, 고통, 분노를 넘어서는 어떤 긍정적인, 유토피아적인 희망적 상태를 가지고 대중이 동원되는 면이 있다. 어떤 점에서든, 언제나 좌파 세력이나 사회주의 세력은 급진적인 희망의 세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희망은 적대를 넘는 우정일 수도 있고 적대를 넘는 연대성을 실현한 상태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너무 자본주의의 적대, 모순을 강조하다 보니까 이게 절대화되어 버린 지점이 있지 않나 한다. 어쨌든 인간의 본원적 사회적 관계에서 적대성과 연대성을 동시에 봐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연대성이 현존 질서에서는 대개 지배의 자원으로 전환된다. 사실 안보도 그런 것이다. 외세에 대립하는 어떤 민족 공동의 연대성이라는 것이 있는 것이다. 공통분모, 공통성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저는 연대성이 지배의 자원이 아니라 저항의 자원으로 동원되는 데 대한 우리의 고민이 필요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두 번째로 전쟁 모델을 넘는 좌파 정치학이 가능할까. 장훈교 씨가 이야기해서 나도 고민하는 부분인데, 슈미트가 정의하는 정치의 본질, 즉 ‘적과 동지의 구분’이라는 발상을 넘어서는 지점을 사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달리 말하자면 적과 동지의 너머에 있는 혹은 중간적인 어떤 존재들을 말이다. 그것을 타자라고 얘기할 수도 있고 중간지대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은 그러한 지점을 적극적으로 포착하는 것이 슈미트의 정치학을 넘는 우리의 기여일 수 있다. 헤게모니로 이야기한다면 이 타자를 동지로 만드는 것일 수도 있고 중간지대를 동지로 만드는 것일 수 있다. 심지어 적과 동지의 경계도 헤게모니적 관점에서 보면 구성되는 것이다. 적도 최소한 적을 중립화시키고, 중간지대의 존재들을 최대한 동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그러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세 번째로는 급진민주주의와 연결시켜서 이 문제를 이야기하자면, 라클라우나 무페가 ‘자기 제한적 민주주의’라던가 ‘급진적 다원주의’, ‘쟁투적 다원주의’를 말할 때의 어떤 중요한 지점이 있는 것 같다. 좌파는 급진적 다원주의에 기반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적과의 관계에서도 일정 측면이 그런 요소가 있을 것 같고, 동지 내부에 있어서도 급진적 다원주의가 존중되고 원리가 되는 지점이 있을 것 같다.
특히 크게 보면 20세기 사회운동이라는 것이 네 가지 범주가 있는 것 같다. 민족운동, 계급운동, 신사회운동, 반세계화운동이다. 민족운동과 계급운동은 사실 상당히 다원성을 인정하지 않는 방향으로 작동해 왔다. 민족과 계급이라는 것이 절대화되는 순간 민족, 계급 내부에 있는 다양한 균열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한계를 돌파하려고 시도한 것이 신사회운동의 문제의식일 수도 있다. 다양한 삶의 운동이나 욕망의 운동들, 소수자 운동들이 그것을 담지하고 드러냈던 지점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좌파 운동 내에서 그러한 다원성을 우리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가야하지 않을까?

정 : 마지막 질문이다. 통진당 사태에서도 나타나듯이 진보정치도 진영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다. 심지어 우리 편이 잘못이 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잘못을 드러내는 것이 적을 이롭게 하기 때문에 우리 잘못은 덮어두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말이다. 대의, 혹은 보다 중요한 정의를 위해서는 우리의 문제는 사소한 것이다는 멘탈리티가 강하다. 그리고 이는 비단 통진당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이러한 경햐은 정의나 대의를 명분으로 일종의 광기가 될 수 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진보의 성찰성 내지는 진보적 성찰성은 매우 유의미한 과점인 것 같다. 진보적 성찰성의 의미에 대해서 좀 더 설명해주셨으면 한다.

조 : 진보나 정의의 이름으로 광기가 행사되는 것에 우리가 어떻게 거리를 둘까. 제가 그 지점에서 사용하는 개념은 진보적 성찰성, 좌파의 성찰성이다. 이 말 자체도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될 수 있고 적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다의성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에 투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보를 풍부화하기 위해서, 중간지대를 획득하기 위해서 진보적 성찰성 혹은 좌파적 성찰성을 고민해 볼 수 있다. 진보나 정의의 이름으로 광기를 행사하지 않기 위해서, 임지현 선생 식으로 이야기하면 우리 안의 파시즘을 성찰하기 위해서도 이런 부분들을 봐야 하지 않을까.
20세기는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막이 올랐는데 역설적으로 결국은 ‘야만적 사회주의냐 “문명화”된 자본주의냐’는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으로 막을 내린 것 같다. ‘문명화된’ 이라고 할 때는 따옴표를 붙여야 할 것이다. 자본주의의 일정한 변화와 개혁, 개량은 노동자 계급의 투쟁에 의해서 강제된 문명화다. 그러나 20세기 말은 비극적으로 이렇게 된 것이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진보적 성찰성의 프리즘이 좌파나 사회주의 내부에 있었더라면, 즉 타자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보는, 심지어 적대자의 눈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이 너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대신 자기의 눈으로 타자를 보았을 뿐이다. 어떻게 보면 식민주의자나 제국주의자가 식민지 민중을 보는 것과 유사하게, 사실은 자본주의로부터 해방된 사회주의자가 타자화시켜서 민중들을 봤던 것, 일종의 부르주아의 잔재에 찌들어서 타자화시켜서 봤던 것이다. 민중이 드러내는 체제에 대한 불만과 이반이 사회주의 체제의 모순을 비춰보는 거울일 수도 있었다. 자기를 포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풍부화하기 위해서. 변혁적 사고와 진보적 성찰성을 결합시킬 수는 없을까. 제가 얘기하면서도 이것은 모순적인 관계라는 생각이 들긴 든다.

정 : 장시간 고생하셨다. 개인적으로 오늘 인터뷰를 통해서 여러 가지 중요한 통찰을 얻은 것 같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조 : 나 역시 그 동안의 파편적 생각들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는 인터뷰였던 것 같다.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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