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달라이라마의 행복론 (2)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3. 자비심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보는 달라이라마의 인간관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신경정신 과학자인 저자가 몇 가지 예를 들고 있어. 첫째로, 인간의 신체기관과 생리기관에 폭력을 위한 기관이 없다는 거야. 그러나 하버지의 생각으로는 저자가 유인원의 앞다리가 인간의 손으로 바뀌면서 손에 잡힌 도구가 동물의 이빨이나 발톱보다 훨씬 강력한 무기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것 같아.

원시인들이 사냥을 무엇으로 했는지 안다면 이빨이나 발톱보다 더 강력한 돌도끼나 돌창을 손에 들고서 굳이 신체 일부로써 그보다 못한 공격 무기를 진화시켜야 할 필요가 없었음을 알 수 있었을 거야. 오늘날에는 인간의 머리와 손으로 동족을 수백 번이라도 싹쓸이할 수 있는 핵무기를 만들었어. 쓰기에 따라서는 지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동물의 무기보다 가장 강력하고 공격적인 신체기관은 인간의 머리와 손이야. 폭력을 위한 기관이 없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야.

둘째로 린다 윌슨(사회학자) 박사의 이타설이야. 인간은 생존 본능 때문에 이타적인 행동을 한다고 주장했어. 이는 생존 본능 때문에 공격성을 갖는다는 주장과 대립되지. 백여 차례의 자연 재해를 검토하면서 재난을 당한 희생자들 사이에서 아주 강한 이타주의적인 요소를 발견했대. 경쟁보다는 협력으로 위험이나 재난을 물리치는 것이 살아남을 확률이 더 커서 이타적인 본능으로 진화되었다는 거야.

그러나 하버지는 자연재해에 대응하는 인간의 이타적인 행위를 인정하지만 바로 그 이타적인 이유로 인간이 인간에게 공격적 행동을 한다는 역설을 주장한단다. 즉 편가르기가 자연과 인간일 때 인간이 인간을 위하여 이타적이야.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집단 사이에 갈등으로 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살기 살아남기 위해 상대 인간 집단을 희생적으로 다시 말하면 이타적으로 공격을 하게 되지. 축구 경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의 공격성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돼. 백여 차례의 자연 재해 사례보다 휠씬 더 많은 인간의 전쟁 사례는 모두 양쪽이 이타적인 공격행위 때문에 부딪치는 경우였어. 그러므로 이기적인 본성을 외면하고 이타적 본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한쪽 눈을 감은 주장이야.

셋째로 1986년에 발표된 세비유 선언이야. 전 세계 유명한 과학자 20여 명이 폭력에 대하여 인간의 본성을 밝혔다는 선언이지. 인간이 폭력적인 행동을 하기는 하지만 타고난 것은 아니라는 거야. 폭력은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영향으로 나타난다는 거야. 그렇다면 하버지는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가 있어서 폭력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기 때문에 폭력적 행동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 그런 선순환의 사회가 있는가를 묻게 돼. 우리는 상상으로도 그런 이상 사회를 떠올리기가 쉽지 않아.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대개의 인간이 공감 뉴런으로 공감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타자의 고통을 함께 느낀다는 거야. 그래서 공감된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본능 때문에 남의 고통을 덜어주려는 선행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야. 그러나 선천적으로 공감능력이 부족하게 타고난 사이코패스는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을 달성하며, 때로는 그 과정에서 남몰래 남들을 괴롭힐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을 자랑스러워한대. 이렇게 선천적으로 선한 인간도 있고 악한 인간도 있어.

그러므로 하버지는 인간이 타고난 공감 능력과 폭력적인 사회·환경의 영향 두 힘의 벡터에 따라 한 개인의 폭력성이 늘거나 줄어들 수 있다고 생각해. 똑같은 갈등 상황이지만 다중 가운데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평화적인 타협으로 해결하려는 인간도 있게 마련이야. 인간에게 양쪽 가능성이 있게 마련인데 폭력적인 모든 경우를 사회·환경적인 원인으로 돌려놓고 인간은 선천적으로 선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어.

특히 부처님이 강조하신 자비심을 다시 강조하기 위하여 인간이 본성적으로 착하다고 주장하게 되면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전제하기 때문에 자비심을 기르는데 잘못된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거야. 그러므로 하버지는 착한 본성이라는 전제보다는 인간의 공감 능력이나 자비심의 가치 그것만을 전제로 이야기를 시작하자는 거야.

그러나 불교에서 강조하는 자비심만 가치가 많아서 중요한 말이 아니야. 기독교는 사랑을 유교는 인(仁)을 핵심어로 강조하는데 이 말들도 그 문화권에서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가장 유효한 개념이라서 가장 많이 강조되었던 말들이야. 아마 각 문화권에서 선을 대표하여 가장 많이 강조되었던 말들을 모아 그 말들의 공통 개념을 추상화할 수 있다면 인간이 찾고자했던 가장 중요한 선이 무엇인지 밝혀질 지도 모르지.

하버지는 남의 괴로움을 안타까이 여기는 사랑과 불쌍히 여기는 자비와 측은히 여기는 인이 강조된 것으로 볼 때 가장 중요한 선은 공감 능력이라 생각해.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면 서로를 행복하게 하려는 사랑이나 자비나 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공감능력이니까. 사랑이나 자비나 인은 남의 괴로움에 대한 공감 능력의 다른 이름들이지. 만약에 공감 능력이 없다면 나만의 행복을 위해 남들의 행복을 훔치거나 빼앗거나 짓밟고 부수어야 할 거야.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불행한 상황 하나밖에 남은 선택지가 없으니까.

사랑이나 자비나 인은 각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다른 여러 가지의 긍정적인 마음을 갖게 하는 가장 폭넓고 강력한 동기를 부여했던 말들일 거야. 그러므로 하버지는 선하다는 인간의 본성을 전제하지 않고서도 우리는 공감 능력이나 사랑, 자비, 인 등이 가지고 있는 의미나 가치를 가지고서 바람직한 우리의 행동에 대하여 얼마든지 논할 수 있다고 생각해. 불교적인 전통에 따라 달라이라마가 선택하고 모든 선을 대표하여 가장 강조하는 말은 자비야.

달라이라마가 강조하는 또 하나의 마음은 고요한 마음이야. 이른바 평정심, 평온함, 그리고 맹자의 항심(恒心)이 등이 다 고요한 마음일 거야. 고요한 마음에 반대되는 마음은 들뜬 마음이겠고. 부평초가 뿌리를 내려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바람이나 물결에 휩쓸리고 휘둘리고 흔들리듯이 어떤 힘에 끌려 다니는 들뜬 마음.

그러나 사실은 우리를 흔들고 들뜨게 만드는 것이 마음 밖의 물건이나 사건이 아니야. 그 사물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부정적인 마음 즉 욕망이나 욕구나 욕심에 사로잡혀있는 들떠 있는 우리의 마음이야. 욕심에 사로 잡혀 들떠 있는데도 채워지지 않으면 분노나 미움이나 두려움이나 냉혹함 등 부정적인 마음이 우리를 쥐고 흔들게 되지.

그러면 끝없이 변화하는 현실에서 우리의 삶도 끝없이 일렁이는데 어떻게 고요한 마음을 지켜 행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부정적인 마음에 휩쓸리지 않고 긍정적인 마음을 고요하게 유지할 수 있는가.

달라이라마는 고요한 마음은 무감각하거나 냉정한 마음이 아니래. 그렇다고 비어있는 상태도 아니래. 오히려 예민한 공감으로 사랑과 자비가 가득 찬 마음이래. 이러한 달라이라마의 말로 미루어보면 고요한 마음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야. 긍정적인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를 고요한 마음이라 하는 것 같아. 특히 사랑과 자비심으로 가득 차있어 그 무게 때문에 어떤 욕망의 힘에도 흔들리지 않는 상태라고 풀이 돼.

그러나 우리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다보면 괴롭고 지칠 때 슬며시 이기적인 욕망이 발동하여 사랑과 자비가 말라버릴 수도 있어. 그래서 언제나 마르지 않고 가득 차있으려면 공감으로 끝없이 사랑과 자비를 공급받아야 된대.

“사랑과 자비심을 가지려면 내가 얼마나 괴로움에서 벗어나서 행복하고 싶은지 자신의 간절한 마음으로 미루어 남들도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질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고 도와주는 겁니다.” 아마 언제나 남들의 괴로움에 대한 공감으로 사랑과 자비를 마음에 가득 채우는 것이 고요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달라이라마의 비결인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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