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지가 쓰는 편지

하버지의 행복론

- 윤석원(전 전교조교사)

1. 행복의 뜻

홍아야, 하나 묻자. 하버지가 너에게 바라는 것 중에 가장 간절한 것이 무엇이겠니? 글쎄, 잘 모르겠니? 그럼 아빠와 엄마는 네가 어떻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겠니? 얼른 집히지 않는다고? 그럼 누구든지 사랑하는 사람이 어떠하기를 바라겠니? 혹시 내가 행복해지는 거······. 그래, 바로 그거야.네게 사랑하는 아이가 있다면 가장 큰 네 소원은 네 아이가 행복해지는 게 아니겠니.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랄 거야. 그래서 하버지는 사랑을 ‘행복하게 하려는 노력’이라고 정의한단다.

이번 글에서는 네가 행복을 찾는데 도움을 주고 싶었단다. 살아있는 모든 것이 언제나 행복해지려고 애쓰는 것이 네게도 보이지? 인생도 그렇단다. 그래서 예로부터 행복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행복에 대한 어록과 주장들이 많았어. 이른바 행복론이야. 그런데 마침 삼촌이 하버지에게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이라는 책을 권해서 그걸 읽고 나도 너를 위해 나의 행복론을 정리해보고 싶어졌어. 아니, 그 책을 읽기 전에 행복에 대한 얘기를 꺼내고 싶었던 참이었어.

홍아야, 행복을 찾으려면 그게 뭔지를 알아야 그걸 찾을 수 있잖니? 행복을 아는데 가장 중요한 열쇠말은 ‘만족’일 거야. 한마디로 행복은 만족한 상태야. 그럼 만족은 왜 어떻게 생기는 거야? 음-욕구가 있으니까 생기지. 그럼 욕구는 왜 생겨? 어떤 생명체든지 살아있으려면 그리고 더 나아가 타고난 가능성을 실현하려면 생명체 밖에서 안으로 필요한 것을 끊임없이 끌어들여야 돼. 그래서 필요한 것을 밖에서 들여와 충분하게 채우고 싶어하는 마음을 욕구라고 해. 그러니까 욕구는 필요한 것이 부족하다는 느낌, 내 안에 가득 채우고 싶다는 느낌 즉 결핍에 대한 느낌이야.

거꾸로, 만족은 욕구가 채워졌을 때 즉 바라는 대로 이루어졌을 때의 느낌이지. 욕구가 있으니까 만족이 있는 거야. 욕구가 없다면 만족도 당연히 없지. 또 거꾸로 욕구는 만족 때문에 생기는 느낌 즉 만족을 바라는 느낌이야. 그러니까 만족은 욕구 때문에 생기는 느낌이고 욕구도 만족 때문에 생기는 느낌이지. 살아있다는 것은 욕구와 만족 사이의 순환 활동이야. 욕구가 없어도 죽어있는 생명체이고 만족이 없다면 머잖아 죽을 생명체이지. 그래서 모든 생명체가 추구하는 삶의 목적은 행복이고 행복은 욕구가 채워져 만족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어.

2. 행복의 길 – 자아 실현

그러면 하버지, 욕구에 따라 만족한 느낌도 다 다를까? 욕구 즉 바라던 것이 만족한 느낌을 만들어 내니까 바라는 것이 다르면 만족한 느낌도 당연히 다르지. 이를테면 배고픈데 밥을 배불리 먹으면 더 먹고 싶은 생각이 없어지지 않니. 이와 같이 대개 생리적인 욕구는 채워질수록 욕구가 줄어들다 사라져 버려. 그러다 다시 점점 커지고.

그런데 부나 권력이나 명예에 대한 소유 욕구는 쉽게 만족하기 어렵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욕구가 끝이 없어서 만족에 이를 수가 없지.

또 진선미에 대한 자신의 경험 가능성을 실현하고 싶은 욕구도 실현할수록 욕구가 더욱 커져서 그만두고 싶을 만큼 만족에 도달할 수가 없어. 이를테면 네가 새로운 것을 알았다고 해서 새로운 것을 더 알고 싶은 욕구인 지적 호기심이 사라질까. 새로운 것을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서 결코 만족에 이를 수가 없어. 어떤 욕구는 ‘만족한 상태’에 도달하여 일시적으로 사라지지만 어떤 욕구는 채울수록 커지기만 하지. 그러므로 욕구마다 만족한 상태 즉 만족한 느낌이 다르니까 욕구마다 우리에게 주는 행복도 달라.

그럼 행복이 어떻게 달라?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바라는 것 즉 욕구를 여러 가지로 분류해서 그것이 채워졌을 때의 만족한 느낌에 서열 즉 질적인 수준을 정해놓았단다. 욕구의 종류에 따라 만족한 상태에 질적 수준이 다르다는 것은 행복에도 질적인 수준이 있다는 거지. 학자에 따라 조금씩 다른데 이를테면 매슬로우라는 학자는 욕구를 다섯 단계로 분류했어. 그렇다면 욕구 단계마다 만족한 상태 즉 행복의 수준이나 질도 다섯 단계가 있어야 되지.

첫째로 가장 하위단계의 욕구로써 생존에 필요한 의·식·주와 번식에 대한 욕구 등의 생리적 욕구래.둘째로 위험이나 약탈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안정성 욕구. 셋째로 어떤 집단에 소속하여 그 구성원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소속감 욕구이고. 넷째로 부나 권력이나 명예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여 남들의 존경을 받거나 자부심을 느끼고 싶은 자아 존중의 욕구. 다섯째로 자기의 가능성을 실현하여 성숙하고 싶은 자아실현 욕구가 있대.

그러면 이들 욕구를 채운 만족감에 서열을 매기는 기준이 뭐야? 각 단계의 욕구를 만족시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거야. 어느 단계의 욕구든지 이를 충족시켜서 만족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그보다 하위단계의 다른 여러 가지 욕구도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 역은 아니라는 거지.

그리고 또 하나, 행복의 질적인 수준에 차이가 난다는 거야. 상위단계 욕구의 만족 상태가 하위단계 욕구의 만족 상태보다는 더 총체적이고 지속적이고 고차적인 행복을 가져온다는 거야. 단계마다 그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 차이와 행복의 질적인 수준의 차이에 따라서 서열을 정했을 거야.

이를테면 자식에게 물고기를 잡아다 먹여서 1단계의 생리적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보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서 5단계의 자아실현의 욕구 충족시키는 것이 자식에게 더 지속적이며 총체적이고 고차원적인 행복을 주는 방법이지. 매슬로우에 따르면 1% 안팎의 사람들만이 진선미에 대한 자신의 경험 가능성 즉 자아를 실현할 수 있대.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자기완성에 도달하여 행복할 수 있는 사람들이야.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본질적인 특성, 즉 인간의 경험 가능성, 즉 바람직한 인간성을 실현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말했으니까.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라면 동물들은 동물성 즉 그들의 본래적인 자아를 실현해야 행복할 수 있을 거야. 그럼, 홍아야 사자가 행복해지려면 사자의 어떤 특성을 잘 실현해야 되겠니? 그야, 사자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으로 사냥을 잘하는 특성을 잘 살려야 행복해질 수 있겠지. 그럼 사자와 함께 살아야 하는 물소가 행복해지려면?  물소는 질긴 가죽과 튼튼한 다리로 사자의 공격을 뿌리칠 수 있는 특성을 잘 살려야 되고.

그럼, 악마는? 악마? 악마도 행복할 수 있을까? 악마는 악이 어떤 것인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악을 대신하여 보여주는 수단으로 상상해낸 상징이지 실재는 아니잖니. 그러나 만약에 실재라고 가정한다면 그리고 그의 악한 욕구를 채워서 만족할 수 있다면 악마도 당연히 행복하겠지. 만약에 악마의 욕구가 생명을 괴롭혀 못살게 하는 거라면 그 악한 가능성 즉 악한 자아의 특성을 실현해야 악마도 만족하고 행복해질 거야. 그래서 악마가 있다면 그도 행복해지기 위해서 나름대로 그의 악한 자아의 특성을 실현하려고 노력할 거야.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모든 존재는 그것이 지녔던 진선미에 대한 경험 가능성이 실현된 결과란다.홍아야, 그런데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어. 그러니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경험가능성 즉 인간성을 기지고 있잖니. 이성과 의지와 감정을 가지고 진선미를 경험하여 자아를 완성시켜 나가는 가능성 말이야. 그렇다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이면서 행복해지는 방법이 뭐겠니. 그야, 할 수만 있으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을 더 많이 실현하는 것이 그만큼 목적에 다가가는 길이고 더 행복해지는 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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